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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사정 합의와 4기 민주노총, 어디로 가나 |
| 개설일 : 2004년07월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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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취지 : 7월 3일 노동사회단체들이 사회적 합의주의에 반대하는 공동토론회를 가졌다. 토론회를 공동 주최한 노동사회단체들은 노무현정권의 대노동정책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의 '교섭 중심의 투쟁' 기조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모아지기 시작한 지금, 지역과 현장에서, 그리고 전국적인 차원에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활발한 토론을 기대하며 토론방을 개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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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사회적 합의, 역사와 교훈([진보평론]2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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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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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07월 06일 03시 34분 11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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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사회적 합의’, 역사와 그 교훈
[진보평론]20호
박성인/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부소장
새로운 공세
415총선 이후 노무현 정권이 집권2기의 핵심적 개혁과제의 하나로 노사관계개혁을 추진하겠다고 함으로써, 다시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합의주의’ 문제가 노동운동 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미 노무현 정권은 2003년 3월에 민주노총의 전 지도위원이었던 김금수 씨를 노사정위원장에 임명하여 ‘노사관계체제 발전전략(안)’을 마련했고, 2003년 12월에 ‘손배 가압류 문제에 관한 합의’, 2004년 2월에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을 이뤄내는 등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합의’를 추진해 왔다.
415총선 일정 때문에 노사정위원회 내에서의 ‘노사관계체제 발전전략(안)’에 대한 논의 시한이 2004년 6월말까지로 연기되기는 했지만, 올해 안에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이를 정기국회에서 입법화하겠다는 노무현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다. 415총선에서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실패로 지도부가 교체된 한국노총이 이후 노사정위원회에 대해 어떤 방향을 잡을지 변수가 있지만, 8월로 예정된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의 노사정위원회 참여 여부 결정이 추진 중인 ‘사회적 합의’의 1차적인 관건이 될 것이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 ‘사회적 합의’가 시도되어 왔다. 그것이 ‘사회적 합의’였는지 자체는 별개로 치더라도, 여전히 그간 ‘사회적 합의’의 구속력과 노사관계에 미치는 효과, 그리고 노동운동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사회적 합의’ 역시 이러한 시도의 연장선상에서, 또 그를 둘러싼 논란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추진되고 있는 ‘사회적 합의’는 한편으로는 지난 IMF 외환위기 이후 추진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 빈부 격차의 심화와 고용불안,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의 분할 고착화라는 사회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415총선을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노무현 정권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개혁 세력이 경제특구와 자유무역협정(FTA), 그리고 동북아 경제공동체 추진 등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구조조정, 그리고 그를 위한 노동유연화의 제도적 정착을 한국 자본의 사활적 관건으로 추진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사회적 합의’ 시도와 다른 성격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지금 시기 추진되는 ‘사회적 합의’는 비단 노무현 정권에게만이 아니라, 87년 6월 민중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에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이라는 방향에서 자본축적체제의 변화를 모색해 온 한국의 총자본진영에게 그 전환의 한 과정을 성공적으로 매듭할 수 있는지 가름하는 시도가 될 것이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한국의 노동운동은 96~97년 노동자총파업과 IMF 외환위기 이후 전면화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구조조정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생존권과 노동3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해 왔다. ‘고용 없는 성장’, ‘구조조정에 따른 고용불안과 비정규직화’라는 새로운 상황에서,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진영은 혼란과 동요 속에서도 대중투쟁을 통해 생존권을 수호하고 노동3권의 확장을 위해 투쟁해 왔다.
한편으로는 그 투쟁의 성과로, 다른 한편으로는 그 투쟁의 한계로 민주노조운동진영은 진보정당 건설을 통한 의회 진출에 성공하면서도, 민주노조운동의 계급적 단결의 약화, 상층지도부와 현장 조합원간의 분리,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지도부의 전면적 등장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노조운동진영은 ‘신자유주의적 개혁’, ‘선진 노사관계의 정립’, ‘국제 노동기준’이라는 명분으로 추진되는 ‘사회적 합의’ 공세에 다시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 공세에 민주노조운동이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한편으로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의 투쟁의 성과를 총괄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구조조정, 그리고 노동유연화’라는 새로운 자본축적체제에 어떠한 정치적 전망을 가지고 대응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져 왔던 ‘사회적 합의’ 시도에 대해 검토해 보고, 노무현 정권이 추진하고자 하는 ‘사회적 합의’의 성격과 노동운동의 대응 방향에 대해 정리하고자 한다.
‘노-경총 사회적 합의’와 ‘어용노총 탈퇴투쟁’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합의’ 시도는 3차례 있었다. 93~94년 김영삼 정권 초기에 경총과 한국노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노-경총 사회적 합의’, 96년 김영삼 정권 말기에 소위 ‘신노사관계 구상’을 중심으로 한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시도, 그리고 IMF 외환위기 극복의 일환으로 98년에 김대중 정권이 추진했던 ‘노사정위원회’가 그것이다. 그 배경과 경과,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진영은 임금인상투쟁과 민주노조 건설을 통한 노동3권의 쟁취를 결합시키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이에 대한 노태우 정권의 대노동정책은 탄압을 통한 민주노조의 배제와 매년 하반기 경제종합대책 발표로 ‘한자리수 임금가이드라인’ 제시하여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임금억제 정책과 민주노조 배제 정책은 변칙적인 임금인상과 민주노조운동의 성장 자체로 무력화되었다. 91년부터 노태우 정권은 임금수준만이 아니라 임금구조, 임금격차, 지급 및 결정방식까지 통제의 대상으로 삼는 ‘총액임금제’ 조치를 위로부터 강제했으나, 민주노조진영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여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93년 초에 출범한 김영삼 정권은 OECD 가입을 추진하면서 자본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신경제정책’ 아래 노동정책을 포섭하고 통제할 목표로 한국노총과 경총간의 ‘노-경총 사회적 합의’를 추진했다. 한자리수 임금인상률과 사업장 내 복지기금 확대, 그리고 정부의 소비자 물가 억제 노력과 고용보험 실시 등을 그 내용으로 하는 ‘노-경총 사회적 합의’는 93년과 94년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는 정부 주도의 일방적인 탄압과 임금통제정책의 한계를 ‘노사간 자율적 합의’라는 형식으로 돌파하고, 한국노총을 중앙단위 단체협상의 파트너로 삼음으로써 민주노조의 저변적인 확산을 저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노-경총 사회적 합의’는 임금정책을 노사간 대립과 교섭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체 국민경제 수준에서 통제하고, ‘고통분담론’이나 ‘국가경쟁력 강화론’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노동조합을 압박하며, 임금억제정책을 고용보험제 실시 등의 사회복지정책으로 보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민주노조운동 배제전략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그 이후 한국사회에서 시도된 ‘사회적 합의’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최초의 ‘사회적 합의’ 시도는 실패했다. 94년의 임금인상률이 노경총의 합의를 뛰어넘는 12.5%가 됐고, 94년에 민주노조운동진영은 ‘노-경총 사회적 합의 반대투쟁’을 대중적인 ‘어용노총 해체투쟁’으로 발전시키면서 오히려 1994년 11월 14일에 ‘민주노총 준비위’가 출범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사회적 합의’가 실패한 것은 ‘고통분담론’이나 ‘국가경쟁력 강화론’이라는 이데올로기 공세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대중은 ‘사회적 합의’를 ‘임금억제정책’으로 인식하게 됐으며, 생계비의 대부분을 임금에만 의존해야 하는 한국 노동자들의 현실에서 획기적인 사회보장정책이나 물가안정 없이 임금억제를 수용할 수 없었다. 또한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대중운동이 성장 발전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사회적 합의의 한 주체인 한국노총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김영삼 정권은 1995년에 노사정을 배제하여 제3자가 사회적 합의의 주체로 나서게 하는 ‘공익 대표제’를 통해 단일 임금가이드라인을 설정하지 않고 업종별로 각각의 임금인상률 제시하는 방법을 시도하지만, 아무런 실효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이 ‘공익대표제’는 이후 ‘노사관계개혁위원회’와 ‘노사정위원회’에서 ‘사회적 합의’ 관철의 유력한 압력수단으로 되살아났다.
‘신노사관계 구상’과 ‘96~97년 노동법개악저지 총파업’
‘사회적 합의’가 한국 경제와 사회의 전망 속에서 다시 새롭게 제기된 것은 1996년 4월 24일에 발표된 김영삼 정권의 ‘21세기 세계 일류국가로의 도약을 위한 신노사관계 구상’이었다. ‘신노사관계 구상’은 ‘참여와 협력의 새로운 노사관계’를 기치로, ‘공동선의 극대화의 원칙’, ‘참여와 협력의 원칙’, ‘노사 자율과 책임의 원칙’, ‘교육 중시와 인간존중의 원칙’, ‘제도와 의식의 세계화의 원칙’ 등 5가지의 원칙을 제시했고, 노동법만이 아니라 노사관계 제도, 관행, 의식까지도 개혁 목표로 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할 기구로서 5월에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로 ‘노사관계 개혁위원회’ 설치했다.
‘참여와 협력의 새로운 노사관계’라는 기치나 ‘5가지 원칙’이라는 화려한 수사와는 달리, ‘신노사관계 구상’이 의도하고 목표로 하는 점은 구체적이고 분명했다. 노동유연화를 법적으로 제도화하고, 민주노총을 협조적 노사관계의 틀로 포섭해 내는 것이었다. 이미 한국의 자본진영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부터 과거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그리고 병영적 노무관리에 기초한 자본축적양식을 탈피하여 새로운 축적 모델을 모색해 왔고, 90년대 초반 민간대기업을 중심으로 ‘신경영전략’이라는 이름으로 시도되어 왔다.
자본간 무한경쟁에서 ‘노동력의 유연한 이용에 기초한 생산성 향상’을 통해 자본의 경쟁력을 확보해 나가려는 ‘신경영전략’은 작업공정의 합리화와 그에 걸맞는 노동력 이용체계의 구축, 정리해고 요건의 완화, 능력주의적 인사제도와 임금체계의 도입, 직반장을 중심으로 한 현장 중심의 노무관리체계의 구축, 기업문화제도의 도입 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는 결국 노동자간 경쟁과 노동통제의 강화를 통해 한편으로는 생산성을 극대화해 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조합의 현장장악력을 무력화시켜 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자본의 요구를 법적,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자본의 운동에 걸맞는 새로운 협조적 노사관계의 틀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 ‘신노사관계 구상’이 직접적으로 목표로 한 것이었다. 정리해고 요건 완화와 월차 및 생리휴가제의 폐지, 변형근로제의 도입, 그리고 근로자 파견법 제정 등 개별적 노사관계법의 개악은 ‘선진화, 국제화’라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자본 운동의 이러한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내 자본의 요구는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세계화 구상’ 아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추진하면서 더욱 절박한 것으로 되었다. 국내 독점자본이 세계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국제 콘쩨른과의 전략적인 협력이 불가피했고, 그에 걸맞는 노사관계의 법적 제도적 정비 또한 불가피했다. 그런데 OECD가입을 위해서는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요구하는 ‘노동법 개정’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국내 노사관계 문제가 국내 독점자본의 국제적 진출을 위한, 즉 새로운 시장개척과 그를 통한 자본축적의 새로운 조건으로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OECD가입을 목표로 하고 있는 김영삼 정권에게 ‘노동법 개정’문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외적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복수노조의 인정,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의 폐지,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의 보장 등 집단적 노사관계법의 부분적 개정은 사실 국제노동기구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93~94년 ‘노-경총 사회적 합의’의 실패를 통해, 김영삼 정부는 그동안 실제로 노사관계 변화를 주도해 왔고, 또 주요한 전략사업장을 포괄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노동정책도 실효성이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따라서 민주노총을 인정한 조건 속에서의 새로운 노사관계 패러다임을 구체화시켜 나가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노사관계 구상’은 한편으로는 국내외 자본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성장으로 인한 노자간 역관계의 변화를 또한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추진된 ‘신노사관계 구상’과 ‘노동법 개정 시도 - 개별적 노사관계법의 개악과 집단적 노사관계법의 부분적 개선의 맞바꾸기’는 결국 ‘노동 문제’가 국가발전전략과 새로운 자본축적체제로의 전환에서 관건적인 요소라는 점, 그리고 ‘노동 문제’의 중심에 민주노총이 있다는 점, 나아가 이러한 민주노총을 ‘사회적 합의’의 장으로 끌어들여 독점자본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하위동반자로 삼겠다는 점 등을 현실에서 확인시켜 주었다.
그런데 김영삼 정권의 ‘신노사관계 구상’은 ‘참여와 협력’이라는 기치와 ‘5원칙’에 걸맞지 않게 낡고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5월에 만들어진 ‘노사관계 개혁위원회’에서 노동법 개정을 둘러 싼 논란은 의례적인 겉치례 과정에 불과했다. 96년 8월 한총련 사태를 전후하여 김영삼 정권은 5․6공 비리인사를 석방, 사면하는 것을 시점으로 경찰력 증원, 국방비 증액, 안기부법 개정 시도 등 반개혁적인 공세를 강화하더니, 9월 초에 제출한 「향후 경제운영방안」에서는 재벌 규제완화와 고임금 구조 해소,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을 통해 경기불안과 무역적자를 해결해 나가겠다는 방침을 구체화했다.
김영삼 정권의 이러한 공세와 맞물려 자본가진영은 9월 6일에 전경련 41개 주요 재벌 기획조정실장회의를 열어 ‘임금총액 규모 동결’ 방침을 발표하고, 노동법 개정과 관련해서는 정리해고 요건의 완화와 함께 복수노조와 제3자 개입 인정을 신중히 추진할 것을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했다. 또한 화이트칼라를 주 대상으로 하는 대량감원이 명예퇴직제, 배치전환, 직급정년제 등을 활용하여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기업 전반의 구조조정과 연관되어 추진되었다. 민주노총과의 ‘사회적 합의’를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압박을 통해 ‘신노사관계 구상’을 관철시켜 나가겠다는 것이었고, 결국 이런 의도는 그해 12월 26일 노동악법의 날치기 통과로 그 본 모습을 드러냈다.
총자본진영의 세계화와 노동유연화 공세, 그리고 이를 노사관계의 제도화로 정착시키려는 ‘신노사관계 구상’과 그에 따른 노동법 개악 시도에 대해, 민주노총의 초기 대응은 혼란과 동요 그 자체였다.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겪는 문제일 수도 있었지만,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이라는 기치를 내건 1기 지도부(위원장 권영길)의 사회개혁투쟁노선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96년 사업계획서]에서 “민주노총의 실체를 인정한다면 노사공익 중재단을 구성할 수 있다는 유화적인 입장”과 자본에 의해 노조 상층부가 포섭되는 선진국형 노사관계를 의미하는 ‘민주적 노사관계’론을 제출하였고, 4월 ‘신노사관계 구상’이 발표된 이후에는 ‘노사관계 개혁위원회’에 참여냐 불참이냐를 둘러싸서 논란을 벌였으며, 그해 7월 단위노조대표자 수련회에서 현장으로부터 강력한 문제제기가 있었음에도 이후 집단적 노사관계법과 개별적 노사관계법의 맞바꾸기 구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노동법 개악 의도가 분명해진 가운데 11월 들어 총파업 돌입 여부를 둘러 싼 민주노총의 동요와 혼란에 종지부를 찍어준 것은 김영삼 정권의 노동악법 날치기 통과였다.
1996년 12월 26일,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여,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에 돌입했다. 96년 12월 26일에서부터 97년 1월 말까지 40여일간, 파업참가 누적규모가 3,206개 노조에 파업 참가 연인원이 359만7,011명에 이르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정치총파업이었다. 이러한 정치총파업이 가능했던 것은 한편으로는 ‘정리해고제’의 법적 제도화 자체가 전체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키는 조건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87년 이후 지속된 대중투쟁동력과 투쟁 경험, 그리고 민주노총이라는 내셔널센터의 존재와 대공장 노동조합이라는 주력부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7년 1월 18일, 민주노총 지도부가 ‘유연한 전술’이라는 명목으로 수요파업으로 전환한 이후에 투쟁의 주도권을 상실했고, 결국 3월 국회에서 노동악법 재개정이 통과됐지만,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96~97년 총파업투쟁은 한편으로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개되어 왔던 총자본과 총노동간의 대립을 총괄하는 투쟁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투쟁의 승패와 관계없이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세계화 시대에 다가 올 노동과 자본간 피할 수 없는 격돌을 알리는 서곡이기도 했다.
‘신노사관계 구상’이 한국의 노동자계급에게 제기한 문제, 즉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이 국가경쟁력 강화와 생산성 향상 논리에 기초한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에 동참하면서 그 잉여의 일부를 분배받을 것인가, 아니면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의 시대에 그 저항의 대중적 교두보로 서나갈 것인가의 제기에,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노동자계급의 대답은 혼란과 동요 속에서도 ‘총파업’이었다.
‘노사정위원회’와 ‘민주노총의 정체성 위기’
96~97년 노동자총파업이 ‘신노사관계 구상’이라는 허구적인 ‘사회적 합의’ 시도는 무산시켰지만, 노동법의 개악 그 자체를 저지시켜 내지 못한 결과, 민주노총의 상층 지도부가 97년 대선을 통한 진보정당 건설로 매진하는 동안, 노동현장은 총파업투쟁의 패배와 노동법 재개정의 여파로 강화되는 자본의 공세와 노동통제로 심각한 어려움과 고통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8월 초에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 ‘기업구조조정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 촉구된 이후, 재경원을 중심으로 기업의 인수⋅합병 시 정리해고를 가능케 하는 ‘구조조정 특별법’ 개정이 추진되고, 8월 말에는 임금과 인원감축에 대한 노조동의서 첨부를 주 내용으로 하는 부도유예협약이 개정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국내 자본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위한 공세가 본격화될 즈음, 97년 10월말에 한국 사회는 외환금융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결국 김영삼 정부는 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처방으로 IMF에서 제시한, 긴축정책과 구조조정, 개방화, 국공유기업의 사유화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정책 권고를 전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IMF관리체제 아래서 추진되는 구조조정은 고용⋅실업문제를 한국 노사관계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구조조정이 목표로 하고 있는 공공⋅금융⋅기업부문에서의 시장원리 확립은 고용관리의 유연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97년 말 대선기간 중에 고용문제, 즉 정리해고에 따른 대량실업 문제는 선거의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고, 대선 후보들은 고용협약 또는 위기극복을 위한 국민협약의 체결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자민련과의 선거연합을 통해 집권에 성공한 김대중 정부는 선거 때의 공약과는 달리, 외환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외자유치를 위해 IMF에서 요구한 노동유연화, 즉 정리해고제의 도입을 전적으로 승인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를 자임하고 있고, 과거와 같은 일방적인 노동통제를 곧바로 구사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해 12월 말에 ‘IMF체제 극복을 위한 노사정위원회’ 구성을 공식 제의했다. 이러한 제안은 대선과정에서 한국노총이 국민회의와의 정책연합을 선언했고, 민주노총 역시 구조조정에 따른 대량해고의 불안 때문에 대중투쟁을 추스르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12월 3일에 ‘사회적 합의기구’ 구성을 제안한 바에 따른 것이었다.
이런 배경 아래서 98년 1월 15일에 ‘1기 노사정위원회’가 출범했고, 이후 두차례에 걸쳐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간의 공정한 고통분담에 관한 공동선언문’이 나온 뒤, 2월 9일에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이 잠정 합의되기에 이르렀다. 잠정 합의의 내용은 그 이전에도 추진하려고 하다 좌절됐던 ‘맞바꾸기’였다.
노동자는 노동기본권을 부분적으로 보장(공무원과 교원의 단결권 보장, 정치자금법 개정으로 노조의 정치활동 보장, 실업자의 초기업단위 노조 가입 허용 등)받는 대신,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의 법제화에 동의하고, 기업은 구조조정을 촉진하는 대신 경영투명성 확보(결합재무제표 의무화)에 노력하며, 정부는 고용 및 실업 대책, 물가안정, 임금안정과 노사협력 증진, 그리고 사회보장제도의 확충(고용보험 1인 이상 확대 실시, 임금채권보장제도 도입)에 노력한다는 합의였다. 즉 노사정간에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와 노동기본권의 부분적 신장이라는 정치적 교환이 잠정 합의됐다.
법적 근거조차 없는 정치적 합의기구에 불과한 1기 노사정위원회에서의 합의는 그것이 ‘잠정’ 합의였다고는 하지만, 결국 민주노총 1기 지도부(위원장 직무대행 배석범)가 자신의 조합원을 정리해고 하는데 동의한 것으로 곧바로 고용불안 및 생존권 위협에 직면한 현장조합원들로부터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2월 중순,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는 ‘노사정위원회’에서의 잠정합의안을 부결시켰고, 1기 지도부는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이어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단병호)를 중심으로 ‘2.9. 잠정합의안’ 철회를 위한 총파업을 결의했으나, 2월 말에 총파업마저 민주노총의 분열 가능성, 대중투쟁동력의 부재란 이유로 철회되고 말았고, 민주노총은 이 두 가지 계기, 즉 ‘잠정 합의’와 ‘총파업 철회’로 심각한 지도력의 위기,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3월 말, 이러한 지도력의 위기, 정체성의 위기를 민주노총의 혁신과 대중투쟁으로 돌파해 나가겠다는 2기 지도부(위원장 이갑용)가 선거를 통해 새로 들어섰고, 2기 지도부는 5월1일 노동절투쟁을 기점으로 대중투쟁동력에 불을 붙이면서 5월말에는 총파업투쟁을 조직해 냈다.
기만적인 ‘사회적 합의’로 정리해고제에 대한 민주노총의 잠정합의를 이끌어 내는데 성공한 김대중 정권은 3월에 대통령 자문기구로서의 노사정위원회 설치령을 제정한 다음, 합의 사항의 이행 점검, 경제위기 극복과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 등을 협의해 나갈 2기 노사정위원회를 5월 말에 민주노총을 제외한 후 출범시켰다. 그러나 6월10일로 예정되어 있던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에 맞추어 경제외교에 필요한 노사안정의 구도를 마련하기 위해, 김대중 정권의 강력한 지시에 의해 6월5일 노정간에 현안문제를 둘러 싼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민주노총은 6월10일 제2차 총파업을 철회하고 2기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실 ‘6.5.합의’의 내용이라는 것이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의 남용 방지에 대한 방안 논의, 노사정위원회에 근로시간위원회를 설치하여 근로시간단축방안 논의, 노조조직과 교섭체계의 산별화 등 제도적 개선방안 논의, 노사정위원회 위상 강화, 삼미특수강 문제 해결, 노동절 집회 구속자와 5.27. 총파업 관련자에 대한 고소고발 철회 등, 실질적인 조치가 없는 ‘논의’에 대한 약속에 불과한 것으로, 이러한 합의를 근거로 민주노총 2기 지도부가 총파업을 철회하고 다시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한 것은 6월 4일 지자체 선거 이후로 예정되어 있던 금융⋅공공부문 구조조정에 대한 부담감이 크게 작용했다고는 하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대중투쟁 교두보로서의 민주노총의 위상과 지도력을 다시 한 번 훼손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이어 2기 노사정위원회에서는 6월 말에 공공⋅금융부문 구조조정에 대한 노동계의 협의 요구에 따라 ‘공공부문 구조조정 특별위원회’와 ‘금융산업 발전대책위원회’를 구성했지만, 정부가 퇴출기업과 퇴출은행, 그리고 공기업 민영화 방침을 일방적으로 발표하면서 추진하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7월 10일에 노사정위원회 불참 선언을 하고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 방침으로 맞섰다. 민주노총은 7월14일에서 16일까지 공공, 공익, 금속, 금융산업 연맹 중심으로 총파업을 전개한 후 7월 23일 총파업을 준비하다가 다시 7월23일에 노정간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총파업 방침을 철회하고, 7월 말에 2기 노사정위원회는 재가동되었다. 7월 23일의 합의 내용 역시 퇴출 금융기관 노동자의 생계대책과 55개 퇴출기업 노동자의 고용대책을 노사정위원회에서 논의, 삼미특수강 노동자들을 포철계열 창원특수강에 취업, 현대자동차 등 정리해고 문제가 쟁점인 사업장의 평화적인 분규 해결, 노사정위원회 위상 강화 등 구체적인 실현 계획도 구속력도 없는 것들이었다.
8월 초에 노사정위원회는 1기 합의 사항에 대한 이행점검을 위해 4대 소위원회(경제개혁소위, 고용실업대책소위, 노사관계소위, 사회보장소위)와 ‘노사정위원회 위상강화 소위’를 구성하여 논의를 전개해 나갔으나, ‘사회적 합의’를 위한 노사정위원회 내부에서의 논의와 달리, 현실에서는 9월 3일에 만도기계 노동자들의 투쟁에 공권력을 투입하고, 금융기관의 고용조정과 공기업에 대한 민영화 방안을 강행하는 등 노동탄압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전면화해 나갔다. 결국 민주노총은 1999년 2월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원회’를 신자유주의의 청소부 기구나 구조조정의 들러리 기구로 일축하여 노사정위원회 탈퇴를 결정하고, 동시에 구조조정 및 정리해고의 중단, 노동시간 단축, 사회안정망 구축, 산별교섭체계의 확보 등 주요 요구를 실질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대정부⋅대자본 교섭틀을 쟁취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김대중 정권 아래서,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합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를 추진해 나가는데 민주노총을 들러리로 세우는 것에 불과했고, 결국 97년 11월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의 전면화와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허구적인 사회적 합의 전략에 민주노총 지도부가 분명한 대중적 전선을 치지 못함으로서,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대한 확고한 대중적 교두보로서의 역할과 지도력을 상실하였고, 그 결과 민주노조운동은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에 맞선 초기 전국적 대중투쟁전선이 노사정위원회라는 허구적인 ‘사회적 합의’ 공세에 교란되어 총자본과 총노동 진영간의 힘 관계를 변화시켜 내지 못하자, 그 이후 그 부담은 고스란히 현장노동자들의 몫이 되었다. 1998년 9월 현대자동차 정리해고저지 파업투쟁과 10월 만도기계노조의 파업에서부터 2001년 2월 대우자동차 노조 정리해고저지 파업투쟁과 5월 이후 민주노총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 및 김대중 정권퇴진투쟁’, 그리고 2003년 비정규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분신투쟁에 이르기까지, 민주노총 지도부의 정체성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거세어지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에 맞선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투쟁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를 제대로 저지시켜 내지 못한 채, 개별적인 투쟁으로 고립되어 각개 격파되었다.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최대 피해자이며, 동시에 민주노조운동의 사각지대였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000년 이후에는 스스로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생존권과 민주적 권리를 사수하기 위한 투쟁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공세에 맞선 새로운 투쟁의 주체로 성장하기도 했고, 또 2004년 415총선을 통해 투쟁의 성과가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이라는 부분적 결실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 공세가 일상적으로 정착되면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노동자의 분열이 고착화됐고, 정규직 노동자는 고용불안과 노동강도의 강화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빈곤과 차별로 극심한 고통에 처하게 됐으며, 민주노조운동은 지도력의 위기에 따른 상층지도력과 현장조합원의 분리, 단위노조의 현장장악력 무력화, 그리고 대중파업 자체의 무기력화라는 엄혹한 현실에 직면하게 됐다.
‘선진노사관계 로드맵’과 ‘다시 기로에 선 노동운동’
415총선에서의 승리를 통해 집권 1기 정치개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노무현 정권은 그 여세를 몰아 집권 2기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핵심과제인 ‘노사관계 개혁’을 강행할 것이다. 이미 그 방향과 내용은 정해졌다. ‘선진 노사관계 로드맵’이 그것이다. ‘선진 노사관계 로드맵’의 핵심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의 제도적 완결을 위해 요구되는 ‘노동유연화의 확대 강화’와 ‘노동기본권의 부분적 보장’을 맞바꾸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글로벌 스탠다드’, 그리고 비정규직 보호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분으로 ‘노사정위원회’를 재가동하여, 다시 한번 ‘사회적 합의’라는 형식으로 추진하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정리해고와 직장폐쇄 요건을 완화하고 조업 방해나 생산시설을 점거하는 폭력행위에 즉각적으로 공권력을 투입하는 기준을 마련하면서, 이를 사업의 일부 양도시 근로자에게 승계 거부권을 부여하고, 통상임금에 상여금과 각종 수당을 포함시키는 것, 그리고 비정규직에 대한 시혜적 수준의 보호 정책과 공무원 노조의 부분적 인정, 그리고 업종별 교섭 체계 보장 등을 ‘사회적 합의’의 형식으로 맞바꾸려는 것이다.
즉 노무현 정권이 강행하려고 하는 ‘사회적 합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은 불가피한 현실로 관철시켜 나가되, 이 과정에서 생기는 노동자민중의 저항이나 폐해는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노동자계급의 분할 포섭과 ‘사회적 안전망과 보호 정책’, 즉 시혜적 정책으로 보완하면서, 계급적 대립과 분화를 형식적 민주주의의 제도적⋅절차적 완성이라는 포획의 틀 안에서 작동하도록 봉합하고 재편성하려는 전략”이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 공세로 노동운동진영은 다시 한 번 기로에 서게 되었다. 과연 과거 ‘사회적 합의’의 역사에서 노동운동진영은 어떠한 교훈을 얻을 것인가? 또 현 정세에서 ‘사회적 합의’ 공세의 방향과 성격을 어떻게 파악하고 대응해 나갈 것인가?
먼저 노동운동진영은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본질,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사회적 합의의 허구성 등에 대해 분명한 정치적 판단을 해야 한다. 노사관계 개혁의 핵심은 자본의 세계화에 요구되는 ‘노동유연화의 제도화’에 있다. 노동유연화의 제도화는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불안과 노동강도의 강화, 비정규직 노동자의 양산과 구조화가 정착되는 것을 의미하며,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분할 통제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려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이러한 노사관계 개혁에 동의하는 순간, 87년 노동자대투쟁과 96~97년 노동자총차업투쟁 이후 그나마 유지해 왔던 민주노조운동의 정체성은 다시 한 번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즉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합의’할 지점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 점을 대중적으로 분명하게 하지 않고, 교섭 구조 중심으로 접근해 간다면 또 한번 대중투쟁의 가능성은 교란될 것이다.
다음으로 ‘노사정위원회’에서의 사회적 합의를 위한 논의는 어떤 구속력도 갖지 못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노사정위원회에서 합의를 통해 개혁을 관철시켜 나갈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여론을 동원한 사회적 압박을 통해 정부와 국회를 중심으로 노사관계 개혁을 강행해 나갈 것이다. 즉 노무현 정권은 ‘사회적 합의’를 강조하고는 있지만, ‘사회적 합의’ 자체에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415총선을 통해 국회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고, 노사정위원회에서의 합의가 아니더라도 경제특구나 FTA 등 다른 관철 수단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 문제와 일자리 창출 문제에 대해,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분할 대응의 방향, 즉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의 이기주의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기만적인 여론 공세를 전면화하고 있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 2기의 개혁 구상에 맞선 민주노총의 투쟁 기조와 요구에 대해 분명하게 대중적으로 확인하고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중층적 교섭체계 마련이 아니라 민주노총의 2004년 투쟁 과제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투쟁전선을 구축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민주노총 4기 지도부(위원장 이수호)는 “‘논의 의제의 확대’, ‘참가 주체의 대표성 확대’, ‘기구의 조직적 재정적 독립성의 확보’, ‘의사결정 절차의 개선’ 등 노사정위원회 조직을 개편하여 실질적인 사회적 교섭 기구로 된다”면 참여할 의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교섭기구에서 논의 의제의 확대를 주장하기 이전에,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입장과 요구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여 대중적으로 공유해 나가는 것이 1차적으로 중요하고, 사회적 교섭기구의 실질적인 개편 주장 이전에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간의 계급적 단결을 아래로부터 조직해 내는 것이 시급하며, 기구의 조직적 재정적 독립성 확보 주장 이전에 민주노총의 재정적 독립성과 조직적 대표성을 확보하는 것이 더욱 관건이다.
다시 한번 기로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노사정합의가 사회적 합의주의로 발전해 나가기 위한 성립조건은 노동자의 노동⋅생활조건이 계급갈등을 완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향상되고, 노조의 역량이 실체를 담은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함과 동시에 민주적 의사 표출을 가능케 하는 정치제제가 제도화되었을 때 가능하며, 이러한 조건이 형성되지 않을 경우의 사회적 합의는 또 다른 노동통제의 구실이 되며 계급대립의 관리(억압) 기구가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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