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지금까지 주크만세(Zucman tax, 슈퍼리치에 대해 최소 2%의 세율을 부과하자는 내용의 글로벌 부유세)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 나는 일반적으로 모든 소득이나 자산 불평등 문제를 세금으로 해결하려는 접근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두 가지 사건이 내가 다시 생각하게 했고, 나는 이제 주크만세를 강력히 지지하며 어쩌면 그것을 더 강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 세금의 근거는 그것이 부자들의 부를 크게 훼손할 것이라는 데 있지 않다. 또한 막대한 세수를 거둘 것이라는 데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것은 탐욕에 대한 세금이다. 그것은 교육적 세금이다.
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두 가지 최근 사건은 무엇인가.
첫 번째는 안드레아 카푸셀라(Andrea Capussela)가 나의 『대전환』(The Great Global Transformation)을 서평한 일이다. 그 서평은 「국가주의, 탐욕, 그리고 소유」라는 제목의 마지막 장에 대한 나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안드레아는 그 장에 대해 상당히 많이 썼고 논의를 더욱 확장했다. 그의 서평 제목은 「우리 세계에 대한 흠잡을 데 없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초상」이다. 나는 그것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흥미롭게도 <파이낸셜 타임스>에 실린 마틴 울프(Martin Wolf)의 짧은 서평 역시 이 책에서 오직 그 부분만을 다루었다.
나는 그 부분을 어느 정도 잊고 있었다. 내 책의 95%는 다른 주제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은 다섯 쪽이나 여섯 쪽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장에서 탐욕, 즉 플레오넥시아(pleonexia)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데이비드 레이 윌리엄스(David Lay Williams)의 최근 저서 『가장 위대한 모든 역병』(The Greatest of all Plagues)도 플레오넥시아를 아름답게 논한다. 플레오넥시아는 상한이 없는 탐욕이다. 그것은 재화와 서비스의 소비가 주는 내재적 쾌락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 효용은 다른 곳에서 온다. 그것은 외재적이다. 나는 『대전환』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물은 소유자가 부와 권력을 지녔다는 이미지를 타인에게 전달하기 때문에 간접적 효용을 가진다. 부와 권력의 이미지는 상한이 없다. 즉, 일정 기간에 소비할 수 있는 음식이나 의복과 달리 물리적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은 흔히 탐욕이라 불리는 것, 플라톤과 그리스인들이 말한 플레오넥시아,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결코 만족하지 않는 탐욕이 된다. 탐욕은 외재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내부에서 판정할 수 없다. 일정 한도를 넘는 재화의 증가가 추가적 효용을 주지 않는다고 객관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이 주는 효용은 외부의 관찰자에게서 온다. 그 관찰자는 우리의 소유를 인식하거나 인정함으로써 그것을 유용한 것으로 확인하고, 우리는 더 강한 인정을 받기 위해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한다. 가장 사소한 일상 활동까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행위는 이러한 기능을 수행한다. 우리는 시간을 상품화하고, 그 새로운 상품은 타인에게 보일 때만 가치를 획득한다. 자신의 점심이나 숲속 산책을 촬영해 혼자 간직하는 것은 낭비다. 그것은 활동 자체가 주는 잠재적 즐거움 이상을 거의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면 우리는 부의 인정을 받거나, 더 중요하게는 행복의 인정을 받는다. 타인이 우리의 행복을 확인해 주는 것은 탐욕의 한 특징이다. 쾌락은 더 이상 활동이나 재화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었다고 타인이 인정하는 데 있다. 상황은 더 나아갈 수 있다. 효용을 전혀 주지 않거나 오히려 고된 일인 활동도 그것을 행복으로 제시할 수 있다면 그 제시 자체로 가치를 얻는다. 나는 고전 음악을 듣는 일을 두려워하거나 극도로 지루해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공연이나 값비싼 공연에 참석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을 보내고, 비록 실제로는 비참하더라도 겉으로 행복해 보일 수 있다면, 타인이 나를 행복하다고 인식한다는 확신이 공연 중의 지루함을 압도할 만큼 강한 효용을 준다. 탐욕은 우리가 소유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엔진’이다. 우리는 소유의 획득을 궁극적 목표로 본다. 그것은 쾌락적 즐거움을 주기 때문만이 아니라 개인의 가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탐욕은 마르크스(Marx)가 정의했듯이 ‘추상적 쾌락주의’다.
반탐욕적 교육세는 과도하게 부유한 사람들의 부를 아주 조금만 줄이더라도 사회가 극단적 탐욕과 그것에 수반하는 권력과 허영, 그리고 그런 부의 소유자를 향한 잘못된 숭배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거나 무관심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면책의 감각을 주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두 번째 사건이 등장한다. 엡스타인 사건이다. 부유층이 보여준 면책적 행태는 어떤 형태로든 사회적 제약을 요구한다. 주크만세는 그러한 겸손한 제약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나는 여기에 더해 모든 억만장자를 위한 사회적 신용제도를 생각했다. 어떤 일을 잘하면 세금을 덜 내고, 끔찍한 일을 하면 설령 그것이 겉으로 합법이라 하더라도 세금을 더 낸다.
사회적 신용제도는 막대한 부를 가진 사람들의 행동을 사회적 감시 아래 두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들은 더 이상 다보스(Davos)에서 무의미하게 재산을 자선에 기부하겠다고 ‘서약’하는 선언을 하지 못한다. 마크 저커버그는 자기 재산의 99%를 기부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날 이후 그 ‘서약’에 대해 다시 들은 적이 있는가.
여기서 사회적 신용제도는 실제로 작동한다.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거나, 아니면 과세를 당한다. 그것은 교육적 도구다. 나는 그것을 ‘반엡스타인 사회적 신용제도’라고 부른다.
추신. 억만장자를 위한 사회적 신용제도는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가. 핵심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억만장자의 (1) 과시적 소비, (2) 정치적 영향력, (3) 미디어 권력을 제한하고자 한다. 과시적 소비를 제한하거나 과도한 세금으로 처벌해야 하는 이유는 거대한 부의 격차가 어느 정도 불가피하더라도 그것을 모든 사람 앞에 전시하지 않도록 하고, 그것이 숭배나 증오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2)의 목표는 억만장자를 공동체나 국가의 다른 구성원과 더 비슷한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소노미아(isonomia)를 말한다. 이소노미아는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모든 개인이 대략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더 나은 용어다. 오늘날 이른바 민주주의는 부자의 정치적 권력이 제약받지 않기 때문에 이소노미아의 흔적조차 없다. 마지막으로 (3)은 소수의 권력을 제한하는 데 필요하다.
다음은 가능한 가격표다.
한 해에 전용기를 너무 자주 이용하거나, 개인 요트를 타고 항해하거나, 고급 리조트에서 너무 많은 날을 보내면, 순자산의 1~2%를 세금으로 낸다.
정치적 목적에 1,000달러를 초과하는 금액을 기부하면, 즉 정치인 선거 캠프나 로비 회사, 비정부기구에 기부하면, 그 행위는 허용하지만 세율에 따라 순자산의 1~5%를 세금으로 낸다.
언론 기관에 1,000달러를 초과해 기부하거나 블룸버그(Bloomberg),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 애틀랜틱(The Atlantic), 엑스/트위터(X/Twitter) 같은 언론 기관을 소유하면, 순자산의 1~5%를 세금으로 낸다.
비정치적 교육, 보건, 문화 목적에 10만 달러를 초과해 기부하면, 금액과 사례에 따라 순자산의 1~3% 범위에서 세금 감면을 받을 수 있다.
[출처] A pedagogical tax - by Branko Milanovic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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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는 경제학자로 불평등과 경제정의 문제를 연구한다.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LIS)의 선임 학자이며 뉴욕시립대학교(CUNY) 대학원의 객원석좌교수다. 세계은행(World Bank) 연구소 수석 경제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메릴랜드대학과 존스홉킨스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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