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경제학자는 불평등의 중요성을 일축했다. 모두의 소득이 오르는데 불평등이 함께 오른들 누가 신경 쓰겠느냐는 식이다. 그리고 오직 빈곤 완화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우리가 실제로는 모두 불평등을 신경 쓴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또한 빈곤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불평등에는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 내부적으로 모순된다는 점을 밝혔다.
디에고 리베라의 「동결된 자산(Frozen Assets)」(1931년 작)
일부 경제학자들이 흔히 제기하는 주장은 분배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것이 무의미하거나, 더 나쁘게는 해롭다는 것이다. 그들은 분배 문제를 흔히 주의를 흐리는 요소, 포퓰리즘에 대한 영합, 궁극적으로는 파괴적인 시간 낭비로 보았다. 파이를 어떻게 나눌지를 두고 싸우면 파이의 크기가 줄어들어 모두를 더 나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활동, 심지어 그러한 논의 자체도 부정적으로 간주했다. 차라리 근면과 투자에 집중해 파이를 키우는 편이 훨씬 낫다고 여겼다. 잘 알려진 두 경제학자가 최근 이러한 주장을 펼쳤다. 마틴 펠드스타인(Martin Feldstein)은 연방준비제도 불평등 회의(1998a, 1998b, 그리고 거의 동일한 내용이 Feldstein 1999에도 실렸다)의 개회사에서, 모두의 소득이 증가하는 한 누구도 불평등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썼다. 그는 “부유층의 복지가 증가하거나, 고소득의 상승에서 (오로지) 비롯된 불평등의 증가는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1999, 35–36). 로버트 루카스(Robert Lucas)는 2003년 미니애폴리스 연방준비은행 연례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건전한 경제학에 해로운 경향 가운데 가장 유혹적이며, 내 생각에 가장 유독한 것은 분배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Lucas 2003)
다소 궤변적인 형태이든 아니든, 이런 주장은 드물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나는 20년 넘게 불평등 문제를 연구해 왔고, 그동안 이런 주장을 수없이 들었다. 1990년대 초, 세계은행의 고위 연구 경제학자 한 명은 내가 탈공산주의 국가들의 불평등을 연구하자는 제안을 일축했다. 그는 이들 국가가 비합리적인 평등주의의 “희생자”였으며, 사회에서 더 생산적인 구성원에게 더 높은 보상이 돌아가는 것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모든 불평등의 증가는 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4~5년 뒤, 평시 기준으로 기록적인 빈곤 증가가 발생했고, 불평등이 폭발적으로 확대되자, 그 주제는 더 이상 그렇게 터무니없어 보이지 않았다. 워싱턴과 다른 지역의 여러 사교 모임이나 학술 모임에서, 내가 불평등을 연구한다고 소개받으면 보다 정중한 대화 상대들은 펠드스타인과 비슷한 요지를 꺼냈다(“왜 불평등이 중요한가?”). 덜 정중한 이들은 손을 내저으며, 누군가가 불평등을 연구하도록 돈을 받는다는 사실을 국제 관료제의 방만함 탓으로 돌렸다.
나는 이 글의 끝에서 왜 불평등이라는 주제가 다양한 나라와 배경을 지닌 많은 사람에게 그토록 강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해 추측을 제시하겠다. 그러나 먼저 나는 몇 가지 더 실질적인 논점을 제시하겠다. 다만 나는 두 종류의 친평등 논증은 제시하지 않겠다. 첫째, 펠드스타인을 따라[1], 나는 낮은 불평등이 기능적으로 유리하다는 논증에 근거해 내 주장을 세우지 않겠다. 여기에는 중위투표자 논증, 사회적 불안정(그에 따른 낮은 투자), 정치 과정의 왜곡, 시장 실패 등 어떤 유형이든 포함된다. 최근의 두 편의 뛰어난 검토 논문, 에릭 토르베케와 추타통 차루밀린(Eric Thorbecke and Chutatong Charumilind)의 <왜 우리는 모두 불평등을 신경 쓰는가>(World Development, 2002년 9월)와 크리스토퍼 젱크스( Christopher Jencks)의 <불평등은 중요한가?>(Daedalus, 2002년 겨울호)는 불평등이 광범위한 경제적·사회적 문제에 미치는 영향을 요약하고 분석하고 평가했다. 독자는 평등과 효율성이 상호 보완적이라는 기능주의적(또는 도구주의적) 논증이 존재하며, 그 강도는 평등과 효율성을 상충 관계로 보는 반대 논증만큼 강하거나, 어쩌면 더 강하다는 점만 인지하면 된다.
둘째, 나는 위 인용문과 그 논지의 전반적 어조에 암묵적으로 드러난, 분배처럼 중요한 쟁점을 정치적 논쟁에서 배제하려는 시도에 관한 논증도 제시하지 않겠다. 분배 문제는 처음부터 정치적 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정치에서 제거하려는 시도는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그러한 주제를 정치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불쾌한 조급함이 감지된다. 나는 이러한 태도가 다소 불쾌한 권위주의적 성향, 혹은 관대하게 말해 가부장주의적 성향을 드러낸다는 논증도 사용하지 않겠다.
시기인가, 정의인가?
마틴 펠드스타인(1999)이 제시한 사례를 보자. 그는 학회에 모인 부유한 경제학자 집단이나 경제학 학술지 구독자들을 예로 들었다. 만약 우리 각자, 즉 경제학자들이 1,000달러씩을 받는다면, (미국에서의) 불평등은 증가한다. 우리 각자는 더 나아지고, 누구도 더 나빠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펠드스타인은 이렇게 묻는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도 없다. 이제 그의 사례를 조금만 수정해 보자. 펠드스타인의 요정이 나에게는 20,000달러를 주고, 다른 참가자들에게는 25센트에서 75센트 사이의 금액을 제각각 준다고 가정하자. 펠드스타인의 이전 결론은 여전히 성립한다. 모두의 복지는 더 커진다. 그러나 그 효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고 나는 감히 제안한다. 많은 참가자는 25센트를 받기를 거부할 수 있고, 어떤 이는 그것을 방에 두고 떠날 수 있으며, 또 어떤 이는 분노 속에 그것을 던져버릴 수 있다. 많은 사람은 내가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20,000달러를 받은 반면, 훨씬 더 자격 있는 다른 구성원들이 그 금액의 1/1000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는 현실에 대해 불리한 논평을 할 것이다. 대부분은 요정이 왜 그토록 터무니없이 후한 선물을 베풀었는지 그 이유를 추측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첫째, 25센트를 받은 많은 사람(아마도 대부분)은 펠드스타인이 말하듯 더 나아졌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느낄 것이다. 그들은 정의감과 적절성에 대한 감각이 상처를 입었다고 느낄 것이다. 사람은 항상 자신을 (자신이 동료라고 여기는) 집단과 비교한다. 따라서 자신이 받는 소득은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얻는 수단일 뿐 아니라, 사회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시적인 인정이다. 그것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표현이다. 따라서 소득의 큰 차이는, 특히 그것이 정당화되지 않았거나 이유가 불분명할 경우,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진다.[2]
핵심은 타인의 소득이 우리의 효용 함수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이 점을 인정하는 순간, 불평등은 우리의 복지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불평등이 무의미하다는 논증은 설 자리를 잃는다. 동료 집단이라는 개념은 모든 불평등 연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3] 상호작용하지 않거나 서로의 존재를 무시하는 두 집단 사이의 불평등을 연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예를 들어 15세기의 모든 일본인과 모든 마야인을 하나로 묶어 결합 불평등을 연구한다고 가정해 보자. 두 집단의 평균 소득이 비슷해 상당히 겹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연구는 아무 의미가 없다. 두 집단은 한 번도 상호작용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국민국가가 등장하고 사람들이 동료 시민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한 국가 내부의 불평등 연구가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오늘날 세계적 불평등 연구는 의미가 있지만, 과거 시기에는 그 의미가 훨씬 약했다. 다시 말해 동료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즉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평등은 무의미하고 오직 자신의 소득만이 복지에 중요할 것이다.[4] 독아론적 세계에서라면 우리는(나는) 불평등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밖의 모든 세계에서 우리는(나는) 불평등을 신경 쓴다.
이제 나는 더 설득력 있는 다른 사례를 찾아보겠다.
같은 경제학 학회를 예로 들어 보자. 주최자가 참가자 각자의 학계 내 지위와 논문의 예상 수준을 반영해 사례비를 지급하기로 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그 사례비가 크게 기울어져 있지만 모두 양(+)의 금액이라고 가정하자. 이제 내가 모든 참가자 가운데 가장 적은 금액을, 그것도 상당한 차이로 받았다고 가정하자. 이것이 나 자신의 정의감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는가? 나는 곧 다른 저자들이 받은 사례비를 그들의 출판 실적이나 내가 들은 평판과 비교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물어볼 것이고, 결국 깊이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나의 정의감과 자존감이 영향을 받는다. 첫 번째 사례에서는 많은 사람이 25센트를 경멸하며 거부했을 수 있다. 이 경우 나는 사례비를 받아들이겠지만 상당히 화가 나고, 어쩌면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사례비를 받은 뒤 내 복지가 더 커진다 하더라도(왜냐하면 내 소득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내가 받은 소액의 사례비를 똑같이 받았을 때, 혹은 사례비가 내가 보기에 정의롭다고 느끼는 수준에 더 부합했을 때에 비해 그 증가는 훨씬 작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다른 참가자들이 얼마를 받았는지를 아는 사실 때문에 내 복지가 감소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소득이 나의 효용 함수에 들어간다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불평등은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최후통첩 게임에서 사람들이 일정 금액을 나누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불공정하다고 인식되는 제안을 단번에 거절해 두 사람 모두 더 나빠지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Fong 외 2003).[5] 사람들은 왜 불공정하다고 여기는 제안을 거절하는가? 그렇게 하면 상대방의 소득뿐 아니라 자신의 소득도 줄어드는데도 말이다. 단순히 더 높은 소득에서 얻는 효용 증가보다, 상대방이 훨씬 더 많고 우리 보기에 받을 자격이 없는 소득을 얻게 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부정의의 감정이 초래하는 효용 손실이 더 크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의 소득에 무관심하다면 우리는 결코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세 가지 사례 모두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복지가 타인의 소득에 의존한다는 점을 보였다. 다만 그 표현 방식의 메커니즘이 서로 다를 뿐이다. 첫 번째 사례(“선한 요정”)에서는 우리는 운명의 변덕스러움에 당혹감을 느꼈다. 두 번째 사례(“사례비”)에서는 정의를 문제 삼았다. 세 번째 사례에서는 우리는 단지 상대방의 행동에 역겨움이나 분노를 느꼈다. 그곳에서는 정의도 운명도 개입하지 않았다. 순수한 인간적 혐오나 분노가 작동했다.
더 많은 논거
일부 경제학자는 타인의 소득이 우리의 복지에 영향을 준다는 모든 진술을 시기(envy)의 표현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마틴 펠드스타인은 이를 “앙심에 찬 평등주의”라고 불렀다. 여기서 두 가지 점을 짚을 필요가 있다. 첫째, 윤리는 경제학자의 영역이 아니다. “시기”와 같은 가치 판단이 담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타인의 돈을 탐내는 것은 오직 질투에 눈먼 괴물뿐이라는 식으로 우리를 침묵시키려는 효과를 노린다. 이 점을 인정하자. 시기는 미덕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대부분의 사람, 많은 사람, 혹은 상당한 비율의 사람이 타인의 소득에 대해 시기를 느낀다면, 경제학자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바로 그 사실이다. (그리고 시기란 단지 타인의 소득이 우리의 효용 함수에 들어간다는 뜻일 뿐이다.) 경제학자가 사적으로 이를 승인하든 하지 않든, 시기는 그들의 분석에 포함되어야 한다. 아마도 윤리학자나 종교 지도자는 그러한 태도를 비난할 수 있고, 우리는 인간을 개선하는 일은 그들에게 맡긴다. 그들이 인간을 개선한 뒤에야, 경제학자는 자신의 가정을 수정하고 개인의 복지 함수에서 타인의 소득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시기가 뿌리 뽑혔다는 통보를 받기 전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둘째, 어떤 이들이 시기라고 부르는 것은 위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나쁜) 시기가 아니라 (좋은) 정의감이다. 우리는 단지 시기심 때문에 타인의 소득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부정의가 저질러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향을 받는다. 누군가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이의 눈에는 시기로 보일 수 있는 행동이 실제로는 정의감에서 비롯될 수 있다. 한 사람의 시기는 다른 사람의 정의다. 최근 짐바브웨의 토지 개혁 사례를 생각해 보자. 그것이 생산성을 높일지 해칠지는 잠시 제쳐두자. 반대하는 쪽은 그 운동이 순수한 시기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찬성하는 쪽은 그것을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수단으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동기와 감정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우리가 그것을 “바람직한” 감정이든 “바람직하지 않은” 감정이든 어떤 범주에 넣든,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압도적으로 분명하다. 그리고 인간을 있는 그대로 다루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존재 사실이다. 이 절을 마무리하며, 불평등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상이한 견해를 잘 보여주는 두 인용문을 제시하겠다. 첫째는 국제통화기금(IMF) 전 부총재 앤 크루거(Anne Krueger, 2002)의 비교적 최근 발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소득 분포를 따라 위로 행진하기보다는 절대적 기준에서 물질적 조건을 개선하기를 절실히 원한다. 따라서 불평등보다는 빈곤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 훨씬 낫다.” 이 입장은 마틴 펠드스타인과 로버트 루카스의 입장과 맥을 같이한다. 그리고 1954년에 나온 사이먼 쿠즈네츠(Simon Kuznets, 1965, 174)의 오래된 인용문이 있다.
저소득과 관련된 물질적 고통의 감소는 오히려 정치적 긴장을 완화하기보다 증가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공동체의 훨씬 더 큰 [소득] 증가를 목격하면서 생겨나는 빈곤층의 정치적 고통과 긴장은 오히려 더 커졌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불평등 연구를 싫어하는가?
내가 불평등 연구를 시작했을 때 나는 공산주의 국가에 살고 있었다. 내 박사학위 논문은 불평등을 주제로 했다. 당시에는 이를 완곡하게 “민감한 주제”라고 불렀다. 지배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그 주제를 싫어했다. 그것이 사회주의 아래의 보편적 평등이라는 신화를 폭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주의가 완전하고 평등하길 원했지만, 그것이 불완전하고 불평등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내가 자본주의 사회로 옮겨 살게 되었을 때, 부유한 사람들과 그 지지자들 역시 그 주제에 반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은 존재하는 모든 불평등이 정당하다고 느꼈다. 그들의 관점에서 모든 소득은 정당하고 공정하며 필요했고, 거의 신이 정해준 것과 같았다. 시장이 신의 역할을 대신했다. 실증 연구는 불필요했다. 그런 연구는 단지 문제와 불화를 조장하고,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따라서 두 체제의 엘리트는 불평등 연구가 불필요하다는 데 대체로 동의했다. 한쪽에서는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냈기 때문이었고, 다른 쪽에서는 그 수준이 수용 가능한지 암묵적으로 질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평등에 대한 실증 연구에 이처럼 큰 민감성을 보인다는 사실은, 아마도 수세기에 걸친 종교적 교육과 계몽주의에서 비롯된 우리의 암묵적 전제가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평등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은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것임을 보여준다.[6] 동일하고 오목한 효용 함수를 전제한 공리주의의 범위 안에서도 불평등을 비판할 두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고 센(2000, 67)은 썼다. 첫째, 불평등은 효용을 생산하는 데 비효율적이다(왜냐하면 가난한 이들에게 일부를 재분배하면 전체 복지 수준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은 또한 부정의하다. 다시 말해 엘리트가 불평등 연구를 우려하는 것은 근거 없는 일이 아니다. 불평등이라는 말이 언급될 때마다 사람들은 그것의 정당성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왜 불평등이 아니라 빈곤만을 걱정한다는 입장은 설득력이 약한가?
만약 우리가 불평등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면, 빈곤에 대한 관심을 설명하기도 매우 어렵다. (1)모든 소득이 정당하다거나, (2)타인의 소득이 나의 복지 함수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왜 내가 많은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사실을 걱정해야 하는가? 심지어 (2)만 성립하더라도, 빈곤의 존재가 왜 나에게 중요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은 불평등 연구에는 반대하지만, 모든 사람이 최소한의 생활 수준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최빈층의 복지에는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의 효용 함수에 오직 일부 사람들, 곧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만이 들어가고 다른 누구의 복지도(나나 내 가족을 제외하면)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다른 것인가? 따라서 빈곤에 대한 관심을 주장하는 사람은 타인의 소득이 자신의 효용 함수에 들어간다는 점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자신의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특정 집단(가난한 사람들)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들은 무시하기를 바랄 뿐이다. 빈곤에는 관심을 두면서 불평등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입장의 모순은, 그 입장이 한 사람의 복지 함수 안에 오직 자신의 소득과 저소득층(가난한 사람들)의 소득만을 위한 자리만을 남겨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쉽게 드러난다.
빈곤을 걱정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위치한 어떤 임의의 소득 수준 이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신의 복지 함수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반면 그 수준을 넘는 모든 소득 변화는(자신의 소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자신을 무관심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시나리오가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한다. 우리보다 더 부유한 타인에게 시선을 돌리고, 그들의 소득이 우리의 복지에도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하는 순간, 우리는 단지 빈곤에 대한 관심에서 불평등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한다.
이처럼 다소 설득력이 떨어지는 “빈곤만을 걱정한다”는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도덕주의적 외피가 덧씌워진다. 즉 어떤 빈곤선 이하의 모든 소득에 대한 관심은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에 공감한다는 점에서 “선하다”고 간주되는 반면, 자신보다 높은 모든 소득에 대한 관심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보다 덜 가진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에 대해 훨씬 더 자주 생각하고 더 크게 신경 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복지 함수에 들어갈 가능성이 더 큰 것은 “연민”이 아니라 “시기”다. 나는 더 강한 주장도 제기할 수 있다. 일부 경제학자가 선호하는 빈곤과 불평등의 전혀 다른 취급, 두 개념 사이의 날카로운 구분은, 주어진 소득 분배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지에 대한 문제 제기를 보다 무해한 통로, 즉 표면적으로는 극빈층에 대한 관심이라는 통로로 우회시키는 방식일 수 있다.
빈곤에 대한 관심은 부유층이 자신의 소득에 대해 아무도 문제 삼지 않도록 지불할 용의가 있는 대가다. 다시 말해 빈곤에 대한 관심은 많은 사람의 나쁜 양심을 마취하는 역할을 한다. 많은 부유층에게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은 “사회적 자금 세탁”이다. 그것은 의심스러운 방식으로 부를 획득했거나, 상속받았거나,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돈을 벌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활동이다.
부를 획득하는 방식이 덜 떳떳한 경우가 불가피할 수도 있고, 그것이 진보와 문명을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일 수도 있다. “빈곤 없는 세계”는 온갖 종류의 부정을 보증하는 세계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불가피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된다.[7]
주
[1] “나는 불평등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을 거부하고, 부유층의 더 높은 소득이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불평등을 옹호하기 위해 제시된 기능적 논증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Feldstein 1999, 35).
[2] 흥미로운 언어적 사실이 있다. 어떤 사람의 부에 대해 영어로 묻는 올바른 질문은 “X씨의 자산 가치는 얼마인가?”가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X씨의 가치는 얼마인가?”로 축약된다. 개인의 내재적 가치와 그의 외재적 부가 혼동된다.
[3] 같은 지적은 센(2000, 64)도 “준거 집단(reference group)”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제기했다. 그는 “복지 측정의 초점은 그 집단에 속한 개인들의 효용에만 맞추어지며, 그 집단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효용은 직접적으로 고려되지 않는다”고 썼다. 경험적 행복 연구에 기초해 프랭크(2004, 72쪽)도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다. 최근의 행복 연구들은 일정 시점에서는 소득이 증가할수록 행복도 증가한다(“돈은 행복을 산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발견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가난한 사람, 중산층, 부유층 모두의 소득이 훨씬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변하지 않았다. 이는 행복에 중요한 것은 절대소득이 아니라 상대소득임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득 분포상 위치가 절대소득 수준보다 우리의 효용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
[4] 동료 집단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있다. 세계은행은 세계 여러 지역에 현지 사무소를 두고 있다. 그곳에 채용된 직원들은 일반적으로 현지 동료들보다 훨씬 많은 급여를 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은행에서 일하는 것을 매우 기뻐한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 워싱턴 본부에서 동일한 경제학자로 채용된 사람이 받는 급여의 일부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면 현지 채용 직원들은 동료 집단이 바뀌었기 때문에 매우 불행해지고 사기가 떨어진다.
[5] 최후통첩 게임에서 두 사람은 일정 금액을 나누어야 한다. A가 제안을 하고, B가 이를 수락하거나 거절한다. B가 거절하면 두 사람 모두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압도적인 실험 결과는 전체 금액의 30% 미만을 제안하는 경우 거절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실험은 여러 나라와 환경에서, 세 달치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걸고도 수행되었다(Fong 외 2003, 8쪽 인용).
[6]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표현은 과도한 단순화다. 사람들이 정확히 어떤 점에서 동일하지 않은지를 묻는 순간 우리는 소득의 불평등을 정당화할 문을 열게 된다. 센(1979)은 관찰된 소득 불평등이 공리주의 원칙(총복지 극대화), 초기 조건의 차이(예를 들어 1인당 총효용의 평등을 목표로 한다면 장애인은 건강한 사람보다 더 높은 소득을 받아야 한다), 혹은 보다 넓게는 인간의 다양성에 근거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정 능력을 동일하게 보장하려면 소득이 차등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 사람들의 “동일성”은 (1) 동일한 규칙이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점, (2) 각 규칙의 목표가 사람들의 조건을 평등화하는 데 있다는 점(그 조건이 어떻게 정의되든)을 의미한다. 조건의 평등화는 소득의 차이를 수반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파레토 원칙과 어떻게 다른가? 파레토 원칙에는 무엇을 평등화하려는 시도가 없다. 초기 소득이나 자산이 주어진 것으로 전제된다. 다시 말해 규칙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2)의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7] 역사적으로 의심스러운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자선 목적으로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 막대한 재산의 일부라도 그렇게 사용되는 편이 낫다. 세금 회피라는 사적 동기를 배제하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직업적 삶에서 결코 윤리적 모범과 거리가 멀었던 사람들(“자선가들”)의 도덕적 우월성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그래서 뉴욕 5번가를 거닐다 록펠러 센터에 이르렀을 때 접하게 되는 “자본주의적 서정성”에 대해 경멸 외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 자신의 돈으로 자기 집 뒤뜰에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적 대도시의 중심에 세우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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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b. “Overview.” Introduction to the Federal Reserve Conference on Income Inequality: Issues and Policy Options, Symposium Proceedings.
———. 1999. “Reducing Poverty Not Inequality.” Public Interest, 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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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 Amartya. 1979. “Equality of What?” Tanner Lecture on Human Values, Stanford University, May 22.
해설
이 글은 2007년 ⟪챌린지 매거진⟫(Challenge Magazine) 제50권 제5호에 실린 나의 논문이다. 데이비드 레이 윌리엄스와 돈 부드로 사이의 최근 불평등 논쟁이 이 글을 떠올리게 했고, 다시 세상에 내놓게 만들었다(원래 게재되었던 저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한 이유다). 나는 2003년경 워싱턴의 카네기 국제평화기금에서 일할 때 이 글을 썼다. 이 글은 마틴 펠드스타인이 빈곤에 관한 한 학회에서 한 발언과, 이후 그의 저술에서 반복한 주장에 자극받아 작성했다. 나는 이 글을 여러 경제학 저널의 ‘노트 섹션’에 투고했지만 모두 게재를 거부당했다. 나는 특히 ⟪경제적 불평등 저널⟫(Journal of Economic Inequality)에서 거절당한 일에 실망했다. 그 저널에는 이러한 보다 폭넓은 불평등 논의를 다루기에 적합한 섹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2004년 이탈리아어 번역본으로 ⟪농업문제⟫(La Questione Agraria) 제4호에 처음 실렸다. 몇 년 뒤 당시 챌린지매거진의 편집장이던 제프 매드릭에게 이 글을 언급했을 때, 그는 이 저널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이 글은 2007년에 결국 그곳에 게재되었다.
이 글에 함께 실린 그림은 디에고 리베라의 「동결된 자산(Frozen Assets)」(1931년 작)이다.
[출처] Why We All Care About Inequality (But Are Loath to Admit It)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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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는 경제학자로 불평등과 경제정의 문제를 연구한다.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LIS)의 선임 학자이며 뉴욕시립대학교(CUNY) 대학원의 객원석좌교수다. 세계은행(World Bank) 연구소 수석 경제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메릴랜드대학과 존스홉킨스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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