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영국의 “악마의 공장들”을 연구하면서 자본주의 비판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데이비드 하비가 쓰듯이 그는 자본주의를 하나의 세계적 체제로 이해했다. 만약 그가 오늘날 살아 있었다면 사회주의자들이 중국의 선전(Shenzhen)만큼이나 실리콘밸리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자본의 운동 법칙이 오늘날 중국, 방글라데시, 유럽연합(EU), 미국에서 똑같은 힘으로 적용되는지는 여전히 열린 문제다. 출처: Annie Spratt, Unsplash
다음 글은 데이비드 하비의 책 『자본의 이야기: 자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두가 알아야 할 것』(The Story of Capital)에서 발췌해 편집한 것이다. 이 책은 2월 24일 버소 북스(Verso Books)에서 출간됐다.
칼 마르크스는 1840년대부터 1860년대 사이 영국 산업자본주의의 맥락 속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그 운동 법칙에 관한 이론적 탐구를 전개했다. 그는 처음에는 “산업적으로 더 발전한 나라가 덜 발전한 나라에게 자신의 미래 모습을 보여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했다. 이러한 믿음이 정당했는지는 물론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생애 말기에 이르러 그는 집중적인 인류학 연구와 특히 러시아 사례에 대한 상세한 검토를 거친 뒤 이 명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라고 보는 관점을 비판하는 길을 열었다. 하지만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19세기 중엽 영국 산업자본의 상태에 대한 마르크스의 지식이 매우 깊고 광범위했다는 점이다.
맨체스터에서 만들어진 이론
이 점에서 마르크스는 큰 행운을 누렸다. 영국 정부가 임명한 공장 감독관, 공중보건 관리, 의회 조사위원회들이 아동 노동에서 은행 관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조사하며 방대한 자료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자료가 자신의 해석에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인정하면서 다른 지역의 정보가 “비참한 상태”라고 불평했다.
만약 영국처럼 우리 정부와 의회가 정기적으로 경제 상황을 조사하는 위원회를 임명하고, 그 위원회가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충분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영국의 공장 감독관이나 공중보건 보고관, 여성과 아동 착취를 조사하는 위원들처럼 유능하고 편파적이지 않으며 사람을 가리지 않는 인물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황에 경악했을 것이다.
레너드 호너(Leonard Horner), 스크리븐(Scriven), 그린쇼(Dr Greenshaw) 같은 영국 공장 감독관과 보건 관리들은 핵심 인물이었다. 이러한 국가 관리들이 제공한 기록이 없었다면 『자본론』 제1권은 얼마나 빈약하고 만족스럽지 못했을지 상상해 보라.
마르크스는 또한 정치경제학의 모든 측면에 관한 동시대 신문 기사, 팸플릿, 관련 서적을 방대한 규모로 수집했다. 여기에는 기계 기술을 다룬 앤드루 유어(Andrew Ure)와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의 저작도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44년의 저서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를 통해 마르크스에게 큰 영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맨체스터에서 가족 기업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직접 경험한 노동과 생활에 대해 끊임없이 논평을 제공했다.
여기에 더해 엥겔스는 아일랜드 출신 노동계급 동반자이자 연인이었던 메리 번스의 시선을 통해 맨체스터를 볼 수 있었다. 엥겔스는 그녀를 통해 도시의 아일랜드 이민 노동자들이 살던 악취 나는 빈민 주거지의 참상을 접했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이론 작업에서 항상 갈망했던 역사적 유물론의 토대는 호너, 번스, 엥겔스 같은 사람들로부터 나왔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글에 강력한 정확성과 진정성의 분위기를 부여한다. 또한 우리가 매우 다른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마르크스의 이론이 여전히 설득력 있게 울려 퍼지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이론이 맨체스터 사례의 특수성, 더 넓게는 영국 중심주의나 유럽 중심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에도 근거를 제공한다.
자본의 세계화
그러나 자본이라는 경제 체제 자체는 그 기원에서 유럽 중심적이었고 그의 생애 동안에도 계속 그러했다. 자본은 산업 형태로 영국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확산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조건에 적응하고 다양한 형태를 취해야 했다. 때때로 자본은 다른 지역의 원시적 자본주의적 사회 형태나 혼합된 형태와 맞닥뜨려야 했다. 또한 마르크스는 발전이 정체된 지역 경제, 즉 완전한 자본주의 발전을 가로막는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하는 지역을 다뤄야 했다. 예를 들어 비교적 최근까지의 미국 남부나 안토니오 그람시가 직면했던 이탈리아 남부의 낙후 지역이 그런 사례다.
마르크스는 19세기 중엽 영국, 특히 맨체스터 산업주의의 특수성을 통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성격과 특징을 보편화했다. 자본주의의 본질을 어떻게 이론화할 것인가는 마르크스 이전에도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를 괴롭혔던 문제였다. 예를 들어 시장 교환이나 자본주의 생산 같은 사회적 실천의 방대한 기록에서 몇 가지 보편적 개념과 관계를 어떻게 추출할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도출한 개념 체계가 자본의 “운동 법칙”을 해석하는 데 충분히 타당한지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오늘날에도 마르크스가 제시한 자본의 운동 법칙이 중국, 방글라데시, 유럽연합, 미국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지는 여전히 열린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는 마르크스의 시도는 우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강한 적대와 맞서야 한다. 특히 영미 전통에서 그 적대는 매우 강하다. 월터 로드니(Walter Rodney)가 재치 있게 말했듯이 그 전통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읽지 않아도 그것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읽을 필요도 없다.”
마르크스의 분석이 그가 살았던 시대와 장소에서는 정확하고 적절했을지라도 그것이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마오쩌둥, 기니비사우의 아밀카르 카브랄(Amílcar Cabral) 혁명운동, 부르키나파소의 토마 상카라 혁명정부, 가이아나에서 활동한 로드니의 혁명적 작업에도 유효한지는 입증이 필요하다. 로드니는 이에 대해 아마 가장 간결한 답을 제시했다.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의 구체적 결론이 아니라 그 결론에 도달하게 한 조사와 탐구의 방법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과 물질 세계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등장할 때 의식적으로 사상, 개념, 단어에서 출발하는 다른 모든 인식 방식과 결별하고 그것들과 대립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관계에 뿌리를 내렸다.” 로드니는 이것이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즉 “어떤 사회나 상황을 분석할 때 인간들 사이에서 생산 과정에서 형성되는 관계를 찾는 방법론”이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결론이 나온다. “인간의 의식은 자연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형성되고 자연 자체는 인간 노동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화된다. 그리고 인간 노동은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며 그것이 다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만든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과 『공산당 선언』의 정신이다.
오늘날 우리가 모두 자본과 자본의 제국주의적 지정학이 지배하는 물질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만큼 탐구 방법은 “그 체제 내부의 동력”을 이해하는 데 향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자본주의 생산양식 안에 존재하는 착취의 형태를 폭로하고 전복할 수 있다. 이렇게 형성된 이론은 혁명적 성격을 갖는다. 카브랄이 말했듯이 혁명 이론이 있었지만 실패한 혁명은 있을 수 있지만 “혁명 이론 없이 성공한 혁명은 아직 없다.” 기니비사우의 물질적 생산 조건과 사회적 관계가 출발점이었다 하더라도 카브랄에게 그 결론은 혁명 이론의 힘을 어디에서든 동원하는 데 있었다.
마르크스는 맨체스터 산업주의에 집중하면서 상인, 은행가, 지주 계급이 전능한 산업자본의 요구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가정했다. 『자본론』 첫 두 권에서 그는 이러한 다른 자본 분파를 대체로 무시했다. 예를 들어 제1권에서 그는 모든 상품이 자신의 가치대로 거래되고 시장이 완벽하게 작동한다고 가정했다. 또한 “자본이 정상적인 방식으로 유통 과정을 통과한다”고 가정했으며 잉여가치가 지대, 이자, 상업자본의 이윤으로 분할되는 것이 축적 과정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보았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에서 그는 “자본의 법칙은 무제한 경쟁과 산업 생산 속에서만 완전히 실현된다”고 단언했다. 이는 국가가 경쟁을 제한하거나 독점이 형성되거나 자본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문제를 배제한다.
이러한 방식의 추상화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경쟁이 제한되거나 자본 내부의 다양한 분파 사이에서 권력 균형이 바뀌면 이론에 중요한 수정이 필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업자본의 운동 법칙이 상업자본, 금융자본, 토지자본의 운동 법칙과 동일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최근에는 월마트, 이케아, 애플 같은 대형 기업이 행사하는 구매독점(monopsony) 권력이 산업자본을 점점 더 통제하고 있다. 계약농업 같은 경제 부문에서는 직접 생산자가 상인이나 중개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 또한 특정 시기와 장소에서는 은행과 금융, 부채와 신용, 토지와 부동산 자본의 권력이 자본 축적과 그 위기를 결정적으로 형성했다. 이러한 변화가 요구하는 마르크스 자본 이론의 수정은 이후에 살펴볼 것이다.
마르크스가 맨체스터 산업주의에 집중한 것은 면직물 공장의 노동 과정과 그것이 형성한 노동시장 구조의 특수성을 분석해야 함을 의미했다. 동력 직기(power loom)를 다루는 노동자들은 사실상 기계를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노동자의 기술이 기계로 이전되는 과정은 노동력의 탈숙련화를 가져왔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손직기를 사용하던 반숙련 남성 장인을 대신해 비숙련 아일랜드 노동자나 여성 노동자가 쉽게 투입될 수 있었다. 이는 상인이 원료를 제공하고 완제품을 회수하는 이른바 “외주 생산 체계(putting-out system)”와 결합해 나타났다.
아일랜드 노동자의 고용이 임금과 생활조건을 낮추는 효과를 낳자 마르크스는 이를 문제로 보았다. 그는 처음에는 노동력 가치 하락을 초래한 아일랜드 노동자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해결책이 아일랜드 노동자를 끌어올리는 데 있으며 이것이 계급투쟁 조직화의 첫 단계라고 인식했다. 공장주에게 노동계급 내부의 분열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성별, 민족성, 국적, 종교에 따른 분열은 노동자들을 서로 대립하게 만들어 자본가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지배하도록 도왔다. 자본은 노동에 대한 지배를 전제로 한다. 자본은 인종이나 성별 같은 다른 지배 구조를 동원할수록 노동에 대한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맨체스터 산업자본주의의 특수성에 집중하면서 그의 시야가 편향되었고 리처드 코브던과 존 브라이트가 대표하는 이른바 맨체스터 학파의 자유시장·경쟁·자유무역 교리가 그의 시각을 어느 정도 왜곡했을 수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공장 감독관, 공중보건 관리, 의회 보고서는 맨체스터만 조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맨체스터 산업 자본가 집단이 이데올로기와 정치 영역에서 행사한 영향력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막대한 경제적 부와 권력의 집중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다. “1836년 어느 날 아침 경제학 지식과 아름다운 문체로 유명한 나소 시니어가 옥스퍼드에서 맨체스터로 불려와 자신이 옥스퍼드에서 가르치던 정치경제학을 맨체스터에서 배우게 되었다.” 시니어는 자본가의 이윤이 하루 12시간 노동 중 마지막 한 시간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줄이면 이윤을 창출하는 시간이 사라져 자본주의 체제가 파괴된다고 말했다.
이 “이른바 분석”은 의회뿐 아니라 시니어를 향한 강력한 반박을 불러일으켰다. 그 반박을 제기한 인물은 1833년부터 1857년까지 공장 감독관들과 함께 일했고 마르크스가 “영국 노동계급에 대한 그의 공로는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호너였다. 그리고 결국 10시간 노동법이 통과됐다. 노동일 단축은 사회주의적 미래로 나아가는 작지만 중요한 단계였다고 마르크스는 평가했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자유의 영역, 즉 자유시간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당시 맨체스터 산업자본가들에게 중요한 자유는 다른 종류의 자유였다. 마르크스가 “성스러운 자유무역”이라고 부른 바로 그 자유였다. 맨체스터 학파는 자유무역 경제학을 극찬했고 국가는 이를 정책에 반영했다. 자유무역은 당시 세계 자본주의를 지배하던 산업의 요구와 맞물려 전국적으로 확산했다. 자유무역은 항상 선도적 자본주의 산업과 강대국이 외치는 구호였다. 1990년대 후반 세계무역기구 협정이 주요 다국적 기업과 미국이라는 당시 패권 국가의 요구로 만들어진 사례는 그 명백한 예다.
마르크스는 1849년 6월 런던으로 이주했고 생애 마지막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영국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언론 보도와 의회 토론을 통해 영국 정치 상황을 면밀히 추적했다. 한동안 그는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런던 특파원으로 일하며 필요한 수입을 얻었다. 1850년대 그는 영국 제국주의 정치의 의미를 뉴욕 독자들에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여기에는 1857~1858년 인도 세포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잔혹성, 1858년 제2차 중국 아편전쟁의 잔혹성, 그리고 동인도회사가 해체되고 인도가 영국의 직접 식민 통치 아래 들어간 과정 등이 포함됐다. 이 시기는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집필에 몰두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과 맨체스터 자유무역 정치 사이의 연결은 분명했다.
1853년에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영국 지배계급은 지금까지 인도의 발전에 대해 우연적이고 일시적이며 예외적인 관심만을 가져왔다. 귀족은 인도를 정복하기를 원했고, 금융귀족은 약탈하기를 원했으며, 공장 자본가들은 더 싸게 상품을 팔기 원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공장 자본가들은 인도를 재생산 가능한 경제로 전환하는 일이 자신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도 시장은 한동안 랭커셔 면직물 산업의 생산 급증을 흡수하는 주요 시장이었다. 영국 제국 권력은 오래된 토착 수공 면직물 산업을 파괴하고 인도를 “영국산 실과 면직물에 의해 범람하는” 시장으로 만들었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거나 기존 시장을 확대해야 할 필요성”은 인도에서도 중국에서만큼 절박했다. 이러한 일이 실패하면 “맨체스터와 글래스고 생산품에 대한 수요 감소” 때문에 “다가오는 산업 위기”가 발생한다.
공장주들의 해법은 철도를 건설해 인도의 공간 경제를 재편하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인도인들이 기계를 이용해 면화를 가공할 수 없었다. 그들은 때로는 젖은 땅을 가로질러 800마일 이상을 소달구지로 면화를 운반해 갠지스 강으로 보내고, 그 다음 희망봉을 돌아 영국으로 운송해 가공한 뒤 다시 인도인들에게 90퍼센트 이상의 비용을 붙여 되팔았다. 공장 자본가들은 값싼 원료에 접근하고 인도 아대륙 전역의 시장을 공간적으로 통합하는 철도망을 원했고 결국 그것을 손에 넣었다. 마르크스는 1856년에서 1859년 사이 영국의 인도 면직물 수출이 250만 파운드에서 610만 파운드로 급증했다고 기록했다.
이 체제가 이미 얼마나 세계적인 것이었는지를 인식하는 일은 중요하다. 맨체스터 체제는 미국 면화 플랜테이션의 노예 노동에 의존했다. 그리고 그 상품의 주요 시장은 카스트 제도가 지배하는 인도였다. 이 전체 체제는 런던 식민지청이 세계의 많은 지역을 무역에 개방하기 위해 폭력과 노골적인 억압까지 동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영국 제국 행정에 의해 관리됐다.
영국 부르주아지, 특히 공장 자본가들은 매우 비열한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였고 노골적인 위선을 동원해 자신의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철도 건설이 결국 인도에 산업 체제를 형성해 “인도 카스트 제도를 떠받치는 세습적 노동 분업을 해체하고 그것이 인도 발전과 힘을 가로막는 결정적 장애를 제거할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보았다. 『공산당 선언』에 나타난 세계화에 대한 설명은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들린다.
부르주아지는 세계 시장을 착취하면서 모든 나라의 생산과 소비에 국제적 성격을 부여했다. 반동 세력의 큰 불만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는 산업이 서 있던 민족적 기반을 산업 아래에서 끌어냈다. 오래된 민족 산업은 이미 파괴되었거나 매일 파괴되고 있다. 그것들은 새로운 산업에 의해 대체된다. 이 새로운 산업은 모든 문명 국가에게 도입이 생존 문제인 산업이며, 더 이상 토착 원료가 아니라 세계의 가장 먼 지역에서 끌어온 원료를 가공하는 산업이다. 그 산업의 생산물은 자국에서만 소비되지 않고 세계 모든 곳에서 소비된다.
과거에는 한 나라의 생산이 충족시켰던 욕구 대신 이제는 먼 나라와 기후에서 생산된 상품을 요구하는 새로운 욕구가 나타난다. 과거의 지역적·민족적 고립과 자급자족 대신 모든 방향에서의 교류와 국가 간 보편적 상호의존이 등장한다. 물질적 생산뿐 아니라 지적 생산에서도 마찬가지다. 개별 국가의 지적 산물은 공동 재산이 된다. 민족적 편협성과 협소함은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수많은 민족 문학과 지역 문학에서 세계 문학이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과정이 혁명적 감정을 자극해 사회주의 혁명의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지배계급이 “산업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대체되는지”에 달려 있다. 맨체스터 산업주의, 제국주의, 계급투쟁 사이의 관계는 분명했지만 자유무역 교리에 의해 부분적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 교리는 당시 맨체스터 학파 경제학과 리카도주의 사회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의 저작에 의해 지지됐다.
마르크스 사상의 맨체스터적 물질주의 기반은 제국주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 이론을 만들어냈다. 다만 그것은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부에서 경험되고 이해된 제국주의였다. 그러나 이 제국주의는 단지 시장 식민지화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세계 다른 지역의 원료 접근에 의존했고 특히 원면의 경우 미국 남부 노예경제에 기반을 두었다는 사실을 마르크스는 분명히 인식했다.
노예 생산양식과 급속히 성장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교차하면서 상상하기 어려운 잔혹성이 나타났다. 동시에 “검은 피부에 낙인이 찍힌 곳에서는 흰 피부의 노동도 스스로를 해방할 수 없다.” 맨체스터는 미국 남부의 면화 노예 노동과 남아시아 인구라는 거대한 시장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하며 19세기 세계 자본주의의 신흥 글로벌 경제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것은 오늘날 세계 자본을 지배하는 글로벌 생산·소비 네트워크의 선구자였다.
맨체스터에서 버밍엄으로
그러나 시니어가 맨체스터로 소환된 지 40년 뒤 버밍엄으로 소환되었다면 그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았을 것이다. 그곳의 산업 구조는 달랐고 세계 경제 속 위치도 달랐으며 노동 착취 방식도 달랐다. 노동 생산성은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고 시장도 매우 달랐다.
많은 생산은 거대한 면직물 공장과 달리 비교적 소규모였고 높은 숙련을 요구했다. 일부는 초기적 기계화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매튜 볼턴과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은 버밍엄 교외 스메스윅에서 제조됐다. 웨스트 미들랜즈 지역 전체는 기계 공구와 금속 가공 산업이 지배했으며 이는 랭커셔 면직물 산업과 매우 달랐다.
특히 버밍엄은 총기 생산의 중심지였고 군수 장비, 탄약, 포 생산에 특화되어 있었다. 이런 제품의 시장은 국가 지출과 국가 계약에 크게 의존한다. 그러나 방위 산업의 규모와 미국에서 흔히 군산복합체라고 부르는 체제의 역할은 마르크스가 상상할 수 있었던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예를 들어 1982년 “레이건 불황” 시기 미국 실업률은 10퍼센트를 넘었다. 당시 연방준비제도 의장 폴 볼커는 약 17퍼센트의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금리를 14퍼센트까지 올렸다. 레이건은 사회 지출을 대폭 삭감하고 최고세율을 약 70퍼센트에서 35퍼센트로 낮췄으며 항공관제사 노조(PATCO)를 강경하게 탄압했다.
그 뒤 그는 소련과 군비 경쟁을 벌이기 위해 방위비를 대폭 확대했다. 이 경쟁에서 소련은 결국 패배했다.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진 동안에도 버지니아에서 캐롤라이나를 거쳐 텍사스, 로스앤젤레스, 시애틀 보잉 공장까지 이어지는 방위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일부는 이것을 “군사 케인스주의”라고 불렀다. 이 정책은 모두 적자 재정으로 추진됐고 훗날 딕 체니같은 공화당 정치인은 “레이건이 우리에게 재정 적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고 주장했다.
정밀 공학과 총기·증기기관 제조는 면직기 관리 노동과 전혀 다른 노동 형태를 요구한다. 거의 한 세기 뒤 웨스트 미들랜즈는 자동차 산업이 자리 잡는 산업 지역이 되었다. 코번트리, 애스턴, 옥스퍼드가 중심이었고 버밍엄은 상업 중심지 역할을 했다. 반면 맨체스터와 랭커셔 면직물 도시들은 자동차 산업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미국에서도 매사추세츠 로웰 같은 섬유 산업 도시 모델은 피츠버그 철강 도시나 이후 디트로이트 자동차 산업 모델과 매우 달랐다.
마르크스가 맨체스터 대신 버밍엄 산업을 중심으로 『자본론』을 썼다면 이론 이야기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기술 변화가 이미 하나의 사업이 되고 있었다. 또한 이 산업 조직은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언급한 집적 경제(agglomeration economy)에 크게 의존했다.
버밍엄 산업은 기계 공구 숙련 노동자와 비교적 안정된 임금을 받는 노동력에 의존했다. 노동계급 내부 분열은 맨체스터처럼 민족이나 종교가 아니라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의 구분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증기기관 제작 금속 단조 기술을 가진 노동자는 매우 가치 있는 존재였다. 기업은 그런 노동자가 벨기에나 프랑스 등 경쟁 기업으로 떠나는 것을 막아야 했다. 동시에 버밍엄 제조업자들은 폴란드, 프로이센 등 어떤 배경이든 숙련 노동자를 환영했다. 맨체스터와 달리 민족이나 종교 차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기술만 있으면 충분했다.
이 경험이 보여준 미래의 모습은 1840년대 맨체스터가 보여준 미래와 상당히 달랐다. 1864년 런던에서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가 창립됐을 때 마르크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조직에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스페인 등에서 온 숙련되고 교육 수준이 높은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1860년대 프랑스-스위스 국경의 쥐라 산맥 시계공들은 정치적 의식이 매우 높기로 유명했다.
이 노동자들은 1860년대 후반 유럽 전역의 파업과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기금을 모았다. 그 흐름은 1871년 파리 코뮌으로 이어졌고 국제적 참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비교적 부유한 노동자였기 때문에 레닌은 훗날 이들을 “노동귀족”이라고 부르며 제국주의를 지지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1860년 무렵 산업가 조지프 체임벌린, 이른바 “래디컬 조”는 도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가스와 식수 공급, 공교육, 주택 정책을 통해 숙련된 노동계급의 생활을 개선하려 했다. 그는 버밍엄 시장이 되면서 일부 개혁을 실제로 실행했다. 당시 “가스와 물 사회주의”는 많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으로 여겨졌다.
체임벌린은 이러한 정책을 추진했지만 이후 식민지 확장을 적극 지지하는 정치인이 되었다. 내부 개혁과 국내 시장 확대가 부르주아 권력에 의해 막히자 시장 확대를 위해 식민지 확장이라는 “공간적 해결(spatial fix)”을 선택했다. 1885년 베를린 회의에서 이루어진 아프리카 분할은 이러한 제국주의 경쟁의 정점이었다.
1840~1850년대 맨체스터 산업주의가 보여준 미래는 1870년대 버밍엄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만약 엥겔스의 아버지가 맨체스터 섬유 공장이 아니라 버밍엄의 기계·총기 산업 공장을 운영했다면 『자본론』의 내용도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공장 감독관 보고서와 점점 전투적으로 변하는 노동계급의 글을 통해 자본 일반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켰다.
오늘날 자본의 미래는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있는가
오늘날 관찰자들은 방글라데시 다카 외곽 라나 플라자 붕괴 사건을 보면 맨체스터 시대가 여전히 계속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2013년 4월 24일, 이 의류 공장이 붕괴해 노동자 1,129명이 사망했고 대부분이 여성 노동자였다.
또한 중국 선전의 폭스콘 공장도 같은 사례다. 이 공장은 애플 제품 대부분을 생산하며 수십만 노동자를 고용한다. 노동자 자살 사건이 이어지자 회사는 기숙사 주변에 긴 안전망을 설치했다.
이런 현실은 『자본론』의 “노동일” 장에 그대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유사하다. 이러한 조건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일정한 사회 개혁이나 “가스와 물 사회주의”조차도 큰 변화처럼 보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매우 불균등한 지리적 발전을 만들어낸다. 마르크스 시대에도 미국 경제학자 헨리 찰스 캐리의 보호무역 이론은 미국 신생 산업을 영국 산업에서 보호하려는 필요를 반영했다.
반대로 프랑스 경제학자 프레데리크 바스티아는 자유시장과 자유방임을 강하게 옹호했다. 이는 프랑스 산업가들이 국가 규제에서 벗어나려는 요구를 반영했다.
마르크스 시대에도 미래를 보여주는 가장 발전된 지역의 모습은 계속 변하고 있었고 지역마다 매우 달랐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사회주의 미래를 보여주는 자본주의 형태는 어디에 있는가. 라나 플라자 공장인가, 선전 산업인가, 아마존 물류 창고인가, 구글 노동자인가, 마이크로소프트 노동자인가, 아니면 세계 주요 공항 노동자인가.
마르크스가 묘사한 현실은 단지 미래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대안을 상상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것은 당시 현실의 비참함을 역사적 유물론적으로 부정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마르크스에게 그 출발점은 맨체스터 산업 지역이었다. 공장과 광산의 노동 조건, 도시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 조건은 변화의 필요성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소외와 위협을 극복하려는 사회주의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고 지역마다 다른 형태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과거 사회주의 모델을 이상적이고 고정된 형태로 숭배하는 경향에서 벗어나야 한다.
케인스가 말했듯 우리는 이미 죽은 경제학자의 생각에 지배될 위험이 있다. 마찬가지로 과거 사회주의 모델에 대한 맹목적 충성도 정치적 장애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현재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확히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오늘날 조건에 맞는 새로운 사회주의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은 지역 조건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문제와 스웨덴 문제는 서로 다르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은 노동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포드주의 산업 모델을 도입했다. 이 전략은 산업 기반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지만 자본주의 사회 관계를 일부 유지하는 대가를 치렀다.
1978년 이후 중국이 세계 경제에 편입되면서 자본의 운동 법칙을 받아들여야 했다. 바로 이 법칙이 1840년대 맨체스터와 오늘날 선전 폭스콘 공장, 방글라데시 라나 플라자를 연결한다.
오늘날 중국은 실리콘밸리 모델을 참고하면서 동시에 “공동 부유(common prosperity)” 정책과 사회 복지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 분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의 이론은 맨체스터의 특수성을 넘어선다. 그의 “구체적 추상(concrete abstractions)”은 맨체스터와 버밍엄, 선전과 실리콘밸리를 모두 설명할 수 있다.
마르크스 시대에는 산업자본이 영국과 서유럽, 미국 동부에서만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경제 대부분은 자본의 운동 법칙 아래 놓여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자본 분석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이제 정보 부족이 아니라 정보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노동자 생활 조건, 사회 복지 실패, 극심한 빈곤에 대한 자료는 넘쳐난다.
문제는 정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노동 투쟁이 다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대중 운동은 단순한 노동 문제보다 경제 체제가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에서 발생한다.
환경 파괴와 극심한 불평등은 강한 사회적 분노를 낳는다.
이러한 현실은 토마 피케티가 세계적 부유세를 주장하게 만든 배경이기도 하다.
결국 사회주의 정치 전략은 노동력 순환과 자본 축적의 관계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노동력 순환의 모든 단계에서 소외가 지배한다면 심각한 사회적 위기가 발생한다. 그리고 현대 경제학의 “이른바 분석”은 이러한 현실을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가리는 경우가 많다.
[출처] David Harvey on Marxism for the 21st Century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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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는 뉴욕 시립대학교(City University of New York) 대학원센터(Graduate Center) 인류학·지리학 저명 교수다. 그의 최근 저서로는 『세계의 길』(The Ways of the World)과 『반자본주의 연대기』(The Anti-Capitalist Chronicles)가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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