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누구도, 일하다 죽지 않고 아프지 않게”

28일 ‘세계산재사망노동자 추모의 날’... 산재 유가족의 절실한 이야기

“죽음을 각오하고 일터에 나가는 노동자는 없습니다. 내 가족이 출근했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매일 각오하는 가족 또한 없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2,4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어나갑니다. “죽은 자를 추모하고 산 자를 위해 투쟁하라!” 4월 28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의 날 정신입니다. 죽지 않고 일할 권리는 그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선언입니다.” - 이미선 민주노총 부위원장 발언 중에서

‘세계산재사망노동자 추모의 날’인 28일 오전, 산재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이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산업재해로 소중한 가족과 동료를 떠나보낸 이들은 “기억과 추모가 또 다른 죽음을 막을 수 있다”며 더는 누구도 “일하다 죽거나 다치고 아프지 않는” 세상을 향해 마음을 모았다. 

1993년 5월 10일 태국의 한 장난감 공장에 큰 불이 번졌다. ‘심슨 가족’ 인형을 만들던 노동자 188명이 목숨을 잃고 500여 명이 크게 다쳤다. 회사는 노동자들이 인형을 훔쳐갈 수도 있다는 이유로, 밖에서 공장 문을 걸어 잠그고 일하도록 했기에, 불이난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은 제 때에 몸을 피하기 어려웠다. 목숨을 잃은 노동자 대부분은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3년 뒤 96년 4월 28일, UN의 지속가능한 발전위원회 회의에 참여했던 각국 노동조합 대표자들이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며 촛불을 들었고, 이후 국제노동기구(ILO)와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CFTU)이 이를 계기로 매년 4월 28일을 ‘세계산재사망노동자 추모의 날’로 삼았다.

한국에서도 2024년 10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으로 2025년부터 매년 4월 28일을 ‘산업재해근로자의 날’이란 이름의 법정기념일로 지정했다. 

‘산업재해근로자의 날’, 명칭도 정부 행사 형식도 바꿔야

고 이한빛 PD의 아버지인 이용관 ‘다시는’ 공동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산업재해근로자의 날’이라는 명칭부터가 세계산재사망노동자추모의 날의 취지를 충분히 담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한빛 PD는 2016년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신입 조연출로 일하다 세상을 떠난 방송노동자로, 그의 죽음 이후 방송·미디어 산업에 만연한 장시간·불안정 노동의 폐해가 사회적으로 환기됐다. 

이 공동대표는 정부의 기념 방식 역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 행사가 산재사망 노동자를 추모하고 재발 방지를 다짐하는 국민적 추모제가 아니라, 각계 대표자들이 모이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기념식”에 머물고 있다며 유감을 밝혔다. ‘다시는’은 앞서 고용노동부와의 간담회에서 유가족과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추모제 형식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용관 공동대표는 그러면서 법정기념일 명칭을 ‘산업재해근로자의 날’에서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로 바꾸고, 4월 28일을 “산재 피해 유가족과 시민은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또 다른 죽음이 반복되지 않게 다짐하는 자리”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정부는 이날 서울 중소기업중앙회관에서 제2회 ‘산업재해근로자의 날’ 기념식을 열고, 산재 극복과 사회복귀 지원 등에 기여한 유공자를 포상했다. 행사에는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 노사단체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세계산재사망노동자 추모의 날 기자회견' 현장. 사진: 민주노총

“심장 같은 딸을 잃은” 아리셀 참사 유가족의 호소도

2024년 6월 경기 화성 아리셀 리튬전지 공장 화재 참사로 “심장 같은 딸을 잃은” 이순희 아리셀참사가족협의회 대표도 발언에 나섰다. 당시 참사로 노동자 23명이 숨졌고, 사망자 다수는 이주노동자였다. 이 대표는 중대재해처벌법 등으로 기소된 박순관 아리셀 대표가 최근 항소심에서 1심 징역 15년에서 징역 4년으로 감형된 데 대해 “외국인이라서 이런 무시와 모욕을 받는 것인가”, “돈 없는 사람은 이렇게 당해도 되는 것인가”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항소심은 박 대표의 아들 박중언 총괄본부장에 대해서도 징역 15년에서 7년으로 감형했다. 

이 대표는 아리셀 참사를 “안전교육 하나 없고, 이주노동자라고 차별해 생명을 가볍게 여겨 위험한 환경을 방치해 일어난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딸을 잃고서 유가족이 싸우지 않으면 뭐든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며, 그래서 “유가족들은 눈물을 멈추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해 소리 높혀 싸우고 있다고 밝혔다. 이순희 대표는 그러면서 “지금도 희생자들의 신체 일부가 사고 현장에 남아 있다”며 유해 수습을 호소하고,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모두가 “차별받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나라”를 위해 함께 힘을 모아달라고 마음을 전했다. 

“산재 진실 은폐하는 쿠팡과 김범석”.. “고용노동부도 공범”

쿠팡 대구칠곡물류센터에서 일하다 숨진 고 장덕준 씨의 어머니 박미숙 씨는 쿠팡이 아들의 죽음에 대한 구조적 원인을 은폐하고 노동자 개인의 탓으로 돌리려 했다고 규탄했다. 그는 쿠팡이 공개적으로는 산재 신청에 협조하겠다고 했지만, 유족에게는 “급여대장조차 제공하지 않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였고, 업무를 확인할 자료도 내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동료조차 “이게 우리 밥줄입니다. 증언을 하면 다시는 쿠팡에 다닐 수 없어요”라며 난색을 표했다고 했다. 박 씨는 유족이 결국 “언론 기사를 모아 산재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박 씨는 손해배상 소송 과정에서도 쿠팡이 장 씨의 죽음을 과도한 다이어트나 개인 부주의 탓으로 돌렸다고 토로했다. 또한 김범석 의장의 직접 지시로 “덕준이가 일했던 기록들은 조직적으로 철저히 지워지고 왜곡과 조작됐다”고 지적하고, 고용노동부도 “덕준이 죽음의 진실을 축소하고 무마해버리는 공범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쿠팡과 김 의장이 이제라도 장 씨의 죽음에 사과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한편, 고용노동부에게도 제대로된 수사로 진실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가려진 문화예술노동의 위험”...“산재보험 당연·전면 적용과 진짜 사장 전액 부담을”

안명희 문화예술노동연대 정책위원장은 문화예술 작품은 일상 곳곳에 있지만, 그것이 “어떤 노동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고 있는지”는 가려져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문화예술노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한다는 이유로, 또 “내가 좋아서 선택해서 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노동자성을 부정당하고, 무대와 촬영장, 콘서트장, 책상 앞과 사이버공간, “살인적 마감” 속에서 다치고 죽어도 산재로 인정받기 어렵고 아무도 그에 대해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안 위원장은 현행 예술인 산재보험도 예술인이 직접 가입하고 보험료를 부담하는 방식에 머물러 있다며, 이 제도가 “문화예술노동자를 보호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현재 예술인 산재보험은 원하는 예술인이 신청해 가입하고, 납부 보험료 일부를 지원받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안 위원장은 산재보험을 당연적용·전면적용하고 “산재보험료는 진짜 사장이 전액 부담”해야 한다며, 제대로 된 제도 설계를 위해 정부가 문화예술 노동조합과 교섭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진짜 사장이 책임지는 구조만이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는 지름길”

끝으로 이미선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죽음을 각오하고 일터에 나가는 노동자는 없다”고 말문을 열면서, 그러나 해마다 2,4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터에서 목숨을 잃는 참혹한 현실을 환기하고 4월 28일은 여전히 노동자에게 “눈물과 분노의 시간”이라고 짚었다. 

그는 역대 정부의 산재 근절 대책이 “자본의 논리 앞에 무너졌다”며, “광장의 민주주의로 탄생한 이재명 정부의 노동존중이 실제 산업현장에서 노동자 생명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감축에 대한 강력한 메세지에도”불구하고 아리셀 항소심 판결처럼 중대재해처벌법의 취지를 무력화하는 판단이 반복되고,  경남 진주 CU 물류센터 앞에서 파업 투쟁을 벌이던 화물노동자가 사측의 대체 차량에 치여 목숨을 잃는 등의 참변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위원장은 이 같은 참변이 우연이 아니라, 일터의 위험을 하청·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 등 더 불안정한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그는 “위험의 외주화를 중단하라”며, 5인 미만 사업장이나 특고·플랫폼 노동자라는 이유로 안전의 사각지대에 방치되는 비극을 국가가 멈춰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일터의 규모와 낡은 근로기준법을 근거로 노동자 생명을 차별로 방임해서는 안 된다”며 모든 노동자에게 산업안전보건법을 전면 적용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 “진짜 사장이 책임지는 구조만이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는 지름길”이라며 실질적 원청 책임과 원청 교섭 보장을 촉구했다.

대통령 메시지 “현장 변화” 말했지만...

한편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페이스북에 “더는 삶의 터전이 죽음의 현장이 되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올해 1분기 산재 사망자가 전년 대비 17.5% 감소하는 등 현장에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고도 언급했다. 

1분기 산재 사망자 수는 전년 동기 대비 감소했지만, 고용노동부가 지난달 발표한 2025년 재해조사 대상 사망사고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누적 산재 사고 사망자는 605명으로 전년보다 16명 늘었고, 사망사고 건수도 573건으로 전년 대비 증가했다. 해당 범주의 산재 사망자와 사고 건수가 늘어난 것은 2022년 통계 작성 시작 이후 처음있는 일이다. 


기자회견 참여자들이 ‘생명’을 의미하는 붉은 종이꽃을 ‘다시는’이라는 글자에 붙여 더는 누구도 일하다 죽지 않고, 다치거나 아프지 않는 세상에 대한 염원을 모으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민주노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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