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론 머스크와 조 단위 부호 파시즘의 정치학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식(2025120)에서 머스크가 로마식(파시스트식) 경례를 하고 있다. 그는 이어 나는 여러분에게 진심을 보낸다. 문명의 미래가 보장된 것은 여러분 덕분이다라고 말했다. 출처: PBS News

자본주의는 인종주의 없이는 존재할 수 없– 말콤 엑스(Malcolm X)

일론 머스크는 예외적인 인물이기보다 불평등을 미덕으로, 착취를 볼거리로 바꾸고 자기 체제의 가장 심각한 실패를 가장 위대한 성공으로 착각하는 자본주의 질서가 낳은 기괴한 부산물에 가깝다. 머스크가 세계 최초의 조() 달러 부호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을 둘러싼 언론의 열광은 인간의 진보나 개인적 창의를 기념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더 깊은 사회·정치적 위기의 징후다. 이 현상은 계급 특권의 힘, 갱스터 자본주의의 부패한 영향력, 그리고 부와 가치의 차이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착취와 인간 번영을 혼동하는 문화를 드러낸다.

머스크는 막대한 불평등을 만들어내면서도 부와 권력을 극소수 엘리트의 손에 집중시키는 자본주의 체제의 부패를 상징한다. 이들의 재산은 단순히 시장에 의존하지 않는다. 공공 보조금, 집단 노동, 사회 제도, 공동 자원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는 백인 우월주의, 초국수주의, 그리고 특히 트럼프 시대에 파시즘 정치가 동원하는 열정에 의해 움직이는 권위주의 문화가 떠받친다. 댄 디넬로(Dan Dinello)가 주장했듯이 머스크는 혼란, 잔혹함, 죽음의 화신이 됐다. 이 평가는 쉽게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트럼프의 핵심 집행자로 활동한 역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세계 최고 부자인 머스크는 미국 국제개발처(USAID)의 원조 사업을 폐지하고 대폭 삭감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USAID는 미국 권력이 지닌 모순을 보여주는 기관이었다. 이 기관은 중요한 국제 보건·인도주의 프로그램에 자금을 지원했지만, 동시에 미국의 지정학적·경제적 이익에 부합하는 개발 의제와 정치 질서를 추진하는 소프트파워 수단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그 역사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의 인도주의가 종종 제국주의와 얽혀 있었으며, 정의와 인간의 필요 못지않게 권력과 이윤의 논리에 의해 형성됐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을 인정한다고 해서 기관 해체가 초래한 재앙적 결과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 결과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베키 페레이라(Becky Ferreira)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시 모델에 따르면 USAID 붕괴는 이미 예방할 수 있었던 사망자 762,000명을 발생시켰을 수 있으며, 이 가운데 50만 명은 어린이다. 또한 20262월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예산 삭감으로 인해 2030년까지 900만 명 이상이 예방 가능한 원인으로 사망할 수 있다. [...] 이와 함께 USAID가 폐쇄된 이후 아프리카 전역의 거의 1,000개 행정구역에서 폭력 발생 가능성, 분쟁의 심각성, 분쟁 치사율이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머스크를 둘러싼 신화는 이러한 사회적 기반을 지워버린다. 자수성가한 억만장자는 영웅으로 묘사되는 반면, 그의 부를 가능하게 한 노동자들, 공공 투자, 민주적 제도는 시야에서 사라진다. 제니 크리타라(Jenni Krithara)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며 옳은 말을 했다.

일론 머스크는 성공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불평등과 착취의 상징일 뿐이다. 어떤 억만장자도 혼자서 자신의 부를 창출하지 않았다. 모든 기업 제국 뒤에는 노동자, 공공 인프라, 대학, 연구 프로그램, 천연자원, 그리고 사회 전체가 존재한다.

동시에 머스크의 부상은 막대한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것으로 찬양하는 문화와 공적 교육의 힘을 보여준다. 기업가적 천재성과 무한한 성공에 대한 신화가 사회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극단적인 부와 권력의 집중은 분노의 대상이 아니라 찬양의 대상으로 정당화된다. 문제는 단지 한 사람이 수많은 국가보다 더 많은 부를 보유하는 동안 수백만 명이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빈곤과 부실한 의료 환경에 내몰린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분명히 보여주었듯이, 사람들은 이러한 기괴한 불균형과 엄청난 수준의 불평등 및 권력을 자연스럽고 불가피하며 심지어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받는다. 여기에는 경제적 불의를 정상화하면서 그것을 분석하고 그 체제와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시도를 비정치화하는 정치가 작동한다. 머스크가 공감을 백인 기독교 민족주의의 권위주의적 윤리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표현의 자유를 권력의 이익에 부합할 때만 유용한 소모품처럼 취급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 불평등은 치명적인 공적 교육에 의해 유지되는 하나의 볼거리가 된다. 착취는 성취로 재포장되고, 경제 권력이 정치·공적 담론·일상생활을 지배하면서 민주주의 자체가 위협받는다. 언론이 머스크의 부를 찬양하는 행위는 단순한 보도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 세대라면 외설적이라고 여겼을 부의 집중을 사람들이 존경하도록 가르친다. 또한 금권정치를 동경의 대상으로 만들고 박탈을 공적 불의가 아니라 개인적 실패로 바꿔 놓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유명인 담론에 뿌리를 둔 사적 문제가 그것을 만들어낸 더 광범위한 권력과 불평등의 체계로부터 분리된다. 따라서 머스크의 매력을 이해하려면 그의 권력이 조직되고 정당화되는 스펙터클을 분석해야 한다.

머스크 시대의 스펙터클은 더 이상 단순한 주의 분산 장치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은 통치 방식이 됐다. 머스크는 오늘날 권력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능력보다 사람들이 현실을 경험하는 주의 집중의 회로를 점유하는 데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억만장자는 더 이상 단순한 자본 소유자가 아니다. 그는 관심을 설계하고, 감정을 관리하며, 대중의 상상력을 구축하는 존재다.

기 드보르(Guy Debord)가 말한 스펙터클의 사회는 이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스펙터클은 더 이상 텔레비전 화면이나 정치 집회, 광고 캠페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욕망을 조직하고 인식을 형성하며 분노를 보상하는 알고리즘 속에 내장돼 있다. 머스크의 세계에서 가시성 자체가 권력이 된다. 모든 도발, 음모론, 인종차별적 암시, 연극적 제스처는 충격이 사고를 대체하고 악명이 권위와 구분되지 않는 관심 경제를 강화한다.

스펙터클은 더 이상 지배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화려하게 포장한다. 부는 천재성으로 보이고, 잔혹함은 진정성으로 보이며, 민주적 제도의 해체는 용기의 증거로 나타난다. 정치는 공연이 되고 공론장은 공포, 원한, 인위적으로 조성한 피해의식에 의해 조직되는 감정의 시장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머스크의 부는 그가 가능하게 한 정치와 분리할 수 없다. 이 정도 규모의 경제 권력은 단순히 공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생존할 수 있는 조건 자체를 바꿔 놓는다. 머스크의 정치는 이러한 위험을 더욱 증폭시킨다. 그는 막대한 부와 디지털 플랫폼에 대한 통제력을 이용해 음모론을 확산시키고 민주적 제도를 공격했으며 미국과 해외의 극우 및 민족주의 운동을 지원했다. 그는 인종적 공포를 조장하는 언어를 수용했고, 반유대주의 및 백인 민족주의 서사를 증폭했으며, 인종차별적 음모론을 퍼뜨리는 계정을 홍보했고, X를 이용해 한때 정치적 주변부에 머물던 증오를 정상화했다. 이 정도 규모의 부는 단순한 경제적 힘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문화적·교육적 힘이다. 이 부는 민주적 책임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면서 대중의 의식을 형성한다.

머스크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존재를 상징한다. 그는 유명인 문화, 알고리즘 권력, 권위주의 정치를 하나의 인물 안에 결합해 국가와 제도를 가로지르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는 단지 정치적 견해를 가진 자본가가 아니다. 그는 과잉, 도발, 금기 파괴의 연출을 중심으로 조직된 하나의 스펙터클 그 자체다. 이러한 인물의 매력은 경제학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미학적 관점에서도 이해해야 한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한때 파시즘 미학이 정치를 스타일, 의례, 감정적 강렬함이 결합한 도취적 드라마로 바꾼다고 주장했다. 그 매력은 사상보다 감각에 있다. 권력의 짜릿함, 힘의 유혹, 금기 파괴의 화려함이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머스크는 이 전통을 디지털 시대에 맞게 갱신했다. 그는 규범, , 민주적 책임에 구속받지 않는 무법자 억만장자이자 반항적 천재로 자신을 연출한다. 그가 추종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잔혹함을 용기로, 지배를 자유로 착각하는 운동에 속해 있다는 감정적 경험이다.

스펙터클이 벌이는 가장 큰 기만은 머스크라는 개인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새로운 정치경제의 설계자로서의 머스크를 가리는 데 있다. 천재와 순교자의 이미지 사이를 오가는 연출 뒤에는 단순히 공공 영역의 일부를 해체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사적 권력을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프로젝트가 존재한다. 그는 자신의 기업들을 국가 및 군사 인프라에 통합하고, 이를 규제하는 제도를 약화하며, 공공 자원을 과두제적 부와 영향력의 원천으로 전환하려 한다.

머스크의 부상은 개인의 주도성이나 기업가적 천재성의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공공 자원, 국가 보조금, 집단 노동, 기술 인프라를 사유화해 소수 과두 엘리트의 부를 늘리는 사회 질서가 만들어낸 결과다. 머스크는 사회계약을 경멸한다. 사회계약은 부에 의무를 부과하고 권력에 민주적 제약을 가하기 때문이다. 퀸 슬로보디언(Quinn Slobodian)과 벤 타노프(Ben Tarnoff)는 『머스크주의: 혼란스러운 시대를 위한 안내서』(Muskism: A Guide for the Perplexed)에서 머스크가 그 대신 국가 권력과 기술 통제를 결합하고, 민주적 책임성보다 알고리즘 통치를 우위에 두며, 인종화된 배제를 사회 질서의 원리로 정상화하는 극우 비전을 추진한다고 지적한다. 머스크의 정치 프로젝트는 자유를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형태의 종속을 만들어낸다. 또한 기술을 민주화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전례 없는 권력을 사적 영역에 집중시킨다.

윌 번치(Will Bunch)는 머스크가 X를 인종적 적대감과 백인 민족주의 정치의 글로벌 증폭기로 바꿔 놓았다고 지적하며 옳은 말을 했다. 그는 표현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극우 인플루언서들을 반복적으로 부각했고, 증오 발언으로 퇴출당한 계정을 복구했으며, 이민자와 유색인종을 서구 문명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묘사하는 서사를 확산시켰다. 2026년 벨파스트(Belfast) 반이민 폭동 직전 머스크는 극우 선동가 토미 로빈슨(Tommy Robinson)이 사람들에게 거리로 나서라고 촉구한 메시지를 확산시켰고, 여기에 반복해서, 그리고 크게 항의해야만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라는 자신의 발언을 덧붙였다. 그 결과는 즉각적이고 끔찍했다. 이민자 공동체를 겨냥한 공격이 발생했고, 이민자들의 주소가 온라인에 공개됐으며, 주택이 불에 탔다. 그리고 세계 최고 부자가 정당화하고 지지한 인종적 증오의 온라인 문화가 확산했다.

제이디 스미스(Zadie Smith)는 한때 파시즘의 선전 기계가 포스터, 라디오, 확성기에 의존했다고 지적했다. 이는 오늘날 일론 머스크가 보유한 수단과 비교하면 조악한 도구들이다. 이 비교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날의 위험은 단지 극단주의 메시지 자체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러한 메시지를 유통하는 인프라에 있다. 알고리즘은 분노를 보상하고 감정을 동기화하며, 종종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순응을 강요한다. 선전 기계는 더 이상 멀리서 시민들에게 소리치지 않는다. 그것은 시민들의 주머니에 들어가 욕망을 관리하고 두려움을 조용히 조직한다.

머스크는 바로 그러한 기계를 지배한다. X는 단순한 소통 플랫폼이 아니다. 그것은 관심, 적대감, 이념적 소속감을 생산하는 장치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점점 더 판단과 비판적 사고의 부담을 피드가 만들어내는 감정적 리듬에 넘겨준다. 스펙터클은 사회 조직의 한 형태가 되고, 개인들에게 숙고보다 반응을, 정치적 삶을 끝없는 분노와 적대의 연극으로 경험하도록 가르친다.

X는 더 이상 단순한 소통 네트워크가 아니다. 그것은 권위주의 정치의 인프라가 됐다. 인종주의를 정상화하고 분노를 보상하며 백인의 피해의식을 전 세계적 적대감과 잔혹성의 스펙터클로 전환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백인 피해자 정치의 주요 설계자 가운데 한 명이 됐다. 이 정치에서는 백인들이 흑인, 유색인종, 이민자라는 위험한 침입자들에게 끊임없이 포위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인종차별적 게시물과 음모론적 수사, 그리고 리스토어 브리튼(Restore Britain) 같은 극우 반이민 운동에 대한 지지를 어떻게 달리 설명할 수 있겠는가.

X는 디지털 시대의 가장 강력한 교육 장치 가운데 하나가 됐다. 수백만 명에게 잔혹함을 용기와 동일시하고, 인종적 위계를 상식으로 받아들이며, 증오를 진실로 여기도록 가르친다. 표현의 자유로 포장된 것은 점점 민주주의적 삶의 시민적·윤리적 토대를 침식하는 권위주의적 욕망의 기계로 작동하고 있다. 머스크를 둘러싼 상징성도 점점 불길해지고 있다. 그는 정치 집회에서 나치 경례를 연상시킨다는 비판을 받은 제스처를 취한 뒤, 이에 대한 비판에 성찰 대신 조롱으로 대응했다. 이 사건은 도발을 스펙터클로 만들고, 잔혹함을 공적 미덕으로 바꾸며, 역사적 망각을 파시즘적 사상을 평범하고 상식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전제조건으로 활용하는 권위주의 정치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파시즘은 대개 강제수용소나 군사 쿠데타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것은 경멸의 정상화, 폭력의 사소화, 그리고 윤리적 책임에서 벗어난 권력의 찬양으로 시작한다.

머스크의 영향력 확대는 막대한 부, 기술 권력, 정치적 영향력이 결합해 민주주의를 내부에서 잠식하는 새로운 형태의 과두 지배를 보여주는 경고 신호가 됐다. 위험은 그가 해외의 극우 운동과 권위주의 인물을 지지한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한 명의 억만장자가 공적 토론을 왜곡하고 민주적 제도를 불안정하게 만들며 국경을 넘어 정치적 삶을 형성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에 있다. 머스크는 본질적 문제가 아니다. 그는 하나의 증상이다. 더 큰 문제는 사적 부가 공적 삶을 떠받치는 제도와 문화에 이처럼 막대한 권력을 행사할 때 민주주의의 흔적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세계 최고 부자가 상상하기 어려운 부를 축적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분열을 심화시키고 민주주의 규범을 훼손하는 정치를 지지하는 모습은 축적에는 보상을 주면서 사회적 책임은 버리는 갱스터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을 드러낸다. 조 단위 부호의 정치는 단순한 부의 집중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 영향력, 그리고 사회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의 집중이다.

가장 큰 위험은 머스크 개인이 아니라 그를 찬양하는 문화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주체성을 약화하고 사회적 보호 장치를 무너뜨리는 세력을 박수로 맞이하도록 점점 교육받고 있다. 그들은 자신을 지배하는 사람들을 존경하도록, 잔혹함을 강인함으로 착각하도록, 민주주의를 억만장자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권력을 행사하는 자유와 동일시하도록 유도된다. 조 단위 부호의 정치는 살아 있는 시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사회의 종착점이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무감각해지고 도덕적으로 마비된 시민들로, 자신의 박탈을 찬양하고 고독을 자유로 받아들이며 비참함을 위대함의 대가로 수용하도록 교육받는다.

최초의 조 달러 부호는 인간 성취의 기념비가 아니다. 그는 축적을 위대함으로, 유독한 남성성을 리더십으로, 지배를 성공으로 착각하는 부패한 사회 질서에 대한 고발이다. 머스크가 공감을 약점으로 보고 표현의 자유를 쉽게 버릴 수 있는 원칙으로 여기는 것이 놀라운 일인가? 공감과 표현의 자유는 그가 점점 더 지지하는 잔혹함, 백인 민족주의, 무제한 권력의 정치에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머스크는 부를 숭배하고, 스펙터클을 진실로 착각하며, 지배를 자유와 혼동하는 문화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그는 자본주의, 디지털 기술, 파시즘적 감성이 전례 없는 방식으로 결합하는 새로운 권위주의적 형성의 출현을 상징한다. 그는 기술 파시즘 질서의 화신이다. 이는 국가 권력, 디지털 기술, 과두적 부가 결합해 민주적 제도를 침식하고 약탈적 엘리트의 이익에 맞게 사회를 재편하는 신자유주의적 갱스터 자본주의의 최신 형태다.

그가 초래하는 위험은 단지 그가 지지하는 정책이나 증폭시키는 운동에 있지 않다. 위험은 그가 만들어내는 세계에 있다. 그 세계에서는 알고리즘이 판단을 대체하고, 잔혹함이 오락이 되며, 인종주의가 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재포장되고, 민주주의가 적대감의 스펙터클과 조작된 동의에 의해 속이 빈 껍데기로 전락한다.

트럼프가 권위주의의 연극적 정치를 구현한다면 머스크는 그 기술적 미래를 상징한다. 그는 새로운 스펙터클 기계의 설계자이며, 그 기계는 지구적 규모로 의식을 형성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머스크는 단순히 세계 최고 부자가 아니다. 그는 21세기의 가장 강력한 공적 교육자 가운데 한 명으로, 수백만 명에게 비자유의 쾌락과 권위주의적 욕망의 미학을 가르치고 있다.

머스크는 우리 시대의 예외가 아니다. 그는 잔혹함을 강인함으로 찬양하고, 민주주의를 과두 권력이 잠식하며, 자유를 부자들의 특권으로 축소하는 사회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증상이다. 이것은 단순히 실패한 사회가 아니다. 이것은 신화를 벗겨낸 자본주의의 실체이며, 그 안에 내재한 갱스터적·권위주의적·파시즘적 충동을 그대로 드러낸 모습이다.

[출처] Elon Musk and the Politics of Trillionaire Fascism - CounterPunch.org

[번역] 하주영 

덧붙이는 말

헨리 A. 지루(Henry A. Giroux)는 현재 맥마스터대학교(McMaster University) 영어·문화연구학과의 공공이익 학술연구 석좌교수(McMaster University Chair for Scholarship in the Public Interest)이자 비판적 교육학 분야의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 특훈학자(Distinguished Scholar in Critical Pedagogy)로 활동하고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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