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직업병에 걸리는 “○○노동자 ○○사건”들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왔다. 멀리 1950년대의 탄광 노동자 진폐증부터 1988년 故문송면 군의 수은중독과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이황화탄소 중독, 1995년 LG전자부품 여성노동자 2-브로모프로판 중독에 의한 불임, 그리고 2002년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집단요양투쟁 이후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여러 현장에서의 근골격계 직업병 등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다.
최근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타이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앉은뱅이병’. 사실은 전혀 새롭지도 신기하지도 않은 직업병이다. 노말헥산으로 인한 다발성 신경염은 미국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찍이 1930년대부터 유명한 직업병이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30년 전에 널리 알려진 바 있다. 1974년 신발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바로 이 노말헥산에 의한 다발성 신경염으로 진단받아 세상에 알려졌던 것이다. 다시 말해 공업용 세척제나 접착제를 사용하는 노동자들은 노말헥산 중독의 위험이 크며, 사업주는 중독 예방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는 수십년 전부터 알려진 산업보건/산업위생 영역의 상식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번 사건처럼 그 ‘상식’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2. 줄지 않는 노동재해
그래서인지 노동재해(업무상 사고와 업무상 질병)의 발생 규모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전체 노동재해율은 1960년대 이래 조금씩 감소해왔지만, 1998년 이후 다시 증가하고 있다. 노동재해로 인한 사망률도 꾸준히 증가하다가 199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하였으나, 아직도 한 해에 약 3천명이 노동재해로 목숨을 잃고 있는 형편이다.
노동재해의 규모만큼이나 그 내용과 질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노동환경의 변화로 인해 업무상 사고에 비해 업무상 질병의 비중이 점차 증가하고는 있으나, 아직도 전체 재해 중 90% 이상은 사고로 인한 것이다. 특히 전체의 70% 이상은 협착/추락/낙하 등 재래형 사고가 차지하고 있다. 이는 안전과 재해 예방을 위한 사업주의 의무가 방기되고 있기 때문인 동시에, 인력 감축/작업량 증가/다기능화 등을 통하여 노동자가 안전을 생각할 여지조차 없이 일해야 할 만큼 현장의 노동강도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3. 직업병은 사라지지 않고, 옮겨지고 있다
물론 노동안전보건 현실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작업복과 안전모, 안전화, 장갑 등 개인 보호구의 성능은 나날이 고급화되고 사업장 보건진단 시스템이나 안전보건교육도 다각화되어왔다. 보다 적극적으로 환기시설이나 공정 개조 등 작업 환경을 개선한 사업장들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노동재해의 위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좀 더 취약한 노동자에게 옮겨질 뿐이다. 직업병이나 사고가 많이 생겼던 위험 작업은 외부 하청업체나 사내하청/임시계약직 노동자, 그도 아니면 연수생의 이름으로 들어와 있는 이주노동자의 몫으로 전가된다.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비정규직/이주노동자들은 재해와 직업병이 빈발하는 고위험 작업에 종사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그렇다고 각종 안전보건 체계의 혜택을 누리는, 일부 대규모 사업장의 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안전하지 않다. 이들에게는 지속적인 구조조정 속에서 고용불안과 노동강도 강화라는 새로운 위험이 닥쳐왔다. 아무리 성능 좋은 보호구나 최신식의 환기시설도 노동강도 강화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해줄 수는 없었다. 그 결과는 근골격계 질환/뇌심혈관계 질환 등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과 사망의 가파른 상승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의 위험이 다른 곳으로 이전되고, 그 자리에 또다시 새로운 위험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4. 위험도 수출하는 세계화
고위험 작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자본의 시도는 국제적인 수준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을 일컬어 ‘유해산업의 수출(Export of Hazard)’이라고 부른다. 유해산업의 수출은 세계화의 또 다른 이름이다. 자본은 공장 하나를 구조조정할 때 유해공정을 가장 먼저 아웃소싱 하듯, 전 산업에 걸친 구조조정을 기획할 때도 유해산업을 최우선으로 배치해온 것이다.
가령 미국은 1998년 필리핀과 콜롬비아에 투자한 총 금액 중 무려 41%와 22%를 유해산업에 쏟아부었다.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도 다를 바 없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이른 바 제3세계 국가들로 공장을 이전해두었다. 북유럽 국가들의 재해율이 낮은 이유는 고위험 노동을 이주노동자에게 전가시키거나 아예 외국으로 내보내버려 자국 내에서 재해가 생길래야 생길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원진레이온이 바로 이러한 과정을 고스란히 밟았다. 원진레이온 자본은 일찍이 미국, 일본에서 이황화탄소 중독의 주범으로 낙인찍힌 기계를 고스란히 들여와 공장을 가동하였으며, 결국 6백여명의 직업병 환자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고 공장문을 닫았다. 그러나 1994년, 그 기계는 또다시 중국 단둥으로 팔려갔다.
5. 얻는 자와 잃는 자
자본의 입장에서는 조직된 노동자들의 문제제기와 저항이나 유해산업에 대한 정부의 까다로운 환경규제가 모두 각종 비용의 증가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본은 고위험 작업․유해산업을 공장 밖으로, 나라 밖으로 이전시킴으로써 보다 손쉽게 비용절감을 꾀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자본은 구조조정과 세계시장 침투를 별다른 저항 없이, 심지어 적절한 명분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이득을 또 하나 챙긴다.
반면에 노동자의 입장에서 그 결과는 참담하다. 미조직․비정규직․이주․후진국의 노동자는 기본적인 노동권이 보장되지 못한 상태에 더하여 온갖 고위험 작업을 도맡게 된다. 고위험 작업을 벗어나게 된 노동자들도 다를 바 없다. 몇 가지 유해물질들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대신 고용불안과 현장 통제권의 상실, 그리고 노동강도 강화라는 새로운 위험에 처하게 되며, 그 결과 근골격계 질환이나 과로사 등의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6. 해결을 위하여
노말헥산 같은 유기용제는 3만 가지가 넘는다.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은 유기용제 이외에도 수만 가지의 화학물질들과 물리적 노동환경 및 온갖 생물학적 유해요인 등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이에 더하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현장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옴에 따라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고용불안, 고도의 노동강도가 노동자의 목숨을 갉아먹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고용허가제 또한 저비용/무권리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려는 신자유주의의 일면에 다름 아니다.
노말 헥산을 사용하지 않는 사업장도, 이주노동자보다 나은 노동 조건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그 어느 곳에 있는 어느 노동자도 예외 없이 위험한 현실, 이것이 바로 우리 일터의 현주소이다.
그러므로 이번 사건은 피해 노동자에 대한 보상, 사업주 처벌, 노말 헥산에 대한 규제 강화, 이주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에 대한 관리감독 강화 등으로 종결될 수 없다. 70여년 전 미국에서 30년 전 한국으로, 그리고 또 다시 지금 현재 한국 내의 이주노동자들로 끊임없이 이전되어온 위험을 끊어낼 수 있는 실천을 시작해야 한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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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콩아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