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산재보상보험제도를 말한다2
2. 산재보험 관련 노동보건진영 대응 역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조직위원장 배영희
사회보장제도는 이윤추구를 위해 통제되지 않는 자본의 무차별적 노동력 착취에 대해 국가가 개입하여 일정정도의 ‘노동력 유지’를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로지 국가에 의한 시혜와 온정의 손길로 발전되어 온 것만은 아님을 지난 호 ‘사회보장의 발전 역사’에서 밝힌 바 있다.
우리의 투쟁은 제도를 강제하면서도 그 안에 가두어지지 않는다. 투쟁이 벌여질 때에 이미 국가가 점잖게 ‘제도’로 가두어놓은 그 상태를 뛰어넘어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자 투쟁의 요구와 열기를 놓치지 않고 얼마나 진전해 나아갈 수 있는가가 바로 우리 투쟁의 성패이고 산재보험 투쟁의 진전일 것이다. 이렇게 투쟁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져 오고 있는 산재보험 대응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나라의 산재보험은 1963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군사정권에 의해 급조된 산재보험이 노동자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부터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억눌려 왔던 노동자들의 기본적 요구가 곳곳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자본의 노동자 살인행각인 직업병과 그 폐해도 속속들이 폭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8년 수은중독으로 영문없이 죽어간 어린 문송면의 죽음은 노동자의 건강에 관심을 가졌던 산업보건 전문가들과 노동자들의 가슴에 처절한 고통과 아픔을 남기며 노동보건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 당시 진보적 운동가들에 의해 88년 ‘노동과 건강 연구회’가 창립되었는데, 노동과 건강 연구회는 창립하자마자 문송면군 대책활동이나 137일 간의 원진레이온 장례투쟁 등 대책활동의 중심에 서서 선전, 홍보, 집회 등의 투쟁을 벌여왔다. 또한 87년 투쟁의 성과로 민주적인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또 산재 문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인식이 확대되면서 산안관련 활동가 및 부서들이 일부 노동조합 내에 만들어지게 되었다. 1990년 전노협이 출범하면서 산업안전보건국을 중앙에 두고 전국적 규모의 사업을 시도하였으며, 1989년 대우조선 노동조합에서 산안활동이 시작되면서 이후 조선업종 산업안전부서 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어 자주적인 산안관련 주체들이 형성되게 되었다.
1981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이 소위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미명 하에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하였는데 이에 대응하여 노동과 건강 연구회에서는 산업안전보건법개정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전국적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각종 선전과 홍보,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서명운동, 공청회나 집회 등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89년 12월 여야 단일안으로 국회를 통화한 법은 당시 산재추방운동이 요구하였던 ‘정보청구권(알 권리)’, ‘노동자 참여권(참여할 권리)’, ‘작업중지권(거부할 권리)’등의 핵심적인 조항은 배제된 채 개정되었다.
결국 이 시기 노동보건 운동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배경으로 하여 발전하였으나 진보적 지식인의 운동적 열정에 근거한 산재 대책활동, 노조교육활동, 연구활동, 법개정 중심의 활동에 그쳐 초보적 운동의 성격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러한 객관적, 주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동력을 현장으로부터 형성시켜내고 이를 사회적 투쟁으로까지 이끌어 내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92년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소위 세계화로 상징되는 신경영 전략으로 노동환경을 극단적인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재편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신경영전략은 구체적으로 노동대중의 단결을 저해하고 노동강도를 강화하며 노동환경을 악화시켜 노동자의 건강권을 원천적으로 제한해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전노협으로 상징되던 전투적 노동조합운동은 아직까지 노동자 건강의 문제를 조직적인 운동의 주제로까지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었고, 노동과 건강 연구회와 같은 전문단체의 활동은 90년대 중반으로 나아가면서 정책대안 마련이라는 역할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1994년 김영삼 정부가 산업안전보건법과 산재보상보험법, 사업장의 작업환경측정에 관한 규정을 개악하고자 하였고 <산업안전관련 규제완화방안>을 마련하여 추진하려는 것에 대하여 노동운동의 조직적인 대응은 외부 노동보건 단체가 벌이고 있던 공청회나 선전사업을 중심으로 한 기획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한계는 결국 현장의 동력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고 안정적인 산업보건 부서를 구축하지 못함으로써 이전의 산재추방운동의 시기에 보여주었던 사회적 투쟁으로서의 노동보건운동의 역사성을 약화시키게 되었다. 아울러 노동보건운동이 전체 운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협소한 운동으로 인식되어지거나 전문주의에 압도되어 정체성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한편 노동운동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산안관련 사업은 그 활동의 목표와 방향이 현장운동을 복원하고 이를 정치적 영역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소위 산안담당자들의 활동으로서 또는 민주노총의 일상사업 정도로 그치고 있는 한계를 보이고 있기도 했다. 결국 이 시기 법과 제도의 개선을 바탕으로 한 산업보건정책 투쟁의 관점을 취함으로써 노동보건 투쟁이 노동조합운동 내에서 계급적 정치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노동보건 운동의 후퇴를 비판하며 산재추방운동을 노동현장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으로 위치 짓고 이를 통하여 현장에서의 노동운동의 대중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었다.
이와 같은 문제제기는 잘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1996년의 산재추방 7월 공동사업은 이전과 달리 민주노총이 주관하고 산업보건 전문단체가 지원하는 활동방식으로 전환하였는데 민주노총 산업안전보건부의 ‘산업재해의 심각성을 적극 폭로하는 장으로 만들려고 하며, 작업중지권 완전확보, 건강진단 및 작업환경측정제도의 노동조합 참여권 보장 등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의 필요성을 적극 선전하고 투쟁을 전개하겠다’는 포부에도 불구하고 산재노동자 추모사업, 산재추방 결의대회, 실태조사 발표회, 산안법 개정 공청회, 산재노동자 직업재활 방안 공청회 등으로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금융위기로부터 시작된 IMF 사태는 노동보건운동의 성과를 송두리째 빼앗아가고자 했다. 김대중 정부는 경제발전 독려 차원에서 행정 규제완화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산업안전보건의 규제를 완화시키고, 산재요양 관련 지침을 통한 급여 제한과 요양 제한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김대중 정부의 공격에 편승하여 자본가들은 산재보험의 비용부담을 내세워 산재민간보험도입을 주장한다든지 변형근로제도 등의 도입을 통한 노동조건의 악화를 기도하였다. 이러한 법적/제도적 장치의 약화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 현장에서의 노동자들의 통제권력의 해체이다. 이미 고용불안으로 현장에서의 노자관계가 위기에 처하고 있었으며 각종 투쟁의 성과로 만들어진 단협안이 경제위기라는 이름으로 폐지되거나 해체되었다.
1999년 3월 울산에서 지난 10년간 산재추방운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해온 단체 및 개인이 참여하여 산재추방운동연합(이하 산추련)이 결성되었다. 산추련은 지난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형성, 발전된 노동자 운동을 반영하면서 한편으로는 88년 문송면군 사망으로부터 시작된 노동자 건강권 확보를 위한 일련의 집단적, 조직적 투쟁의 역사를 한 차원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1999년 근로복지공단의 강제요양 종결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상관 투쟁을 지나면서 산재추방운동이 전체 민중과 노동자들의 건강한 삶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노동과 자본의 대립전선 속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해야 하는지, 이를 위해 노동운동의 현장 장악력 강화를 위한 도구로 어떻게 활용되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이견들이 제출되면서 산추련은 다시 해소되었다. 이후 현장통제력 쟁취를 중심으로 노동보건운동이 전체 노동운동의 혁신에 복무해야 한다고 판단한 노동보건 운동진영은 노동보건연대회의를 운영하여 폭압적인 신자유주의로 인한 노동강도 강화저지 싸움의 단초를 조직해 나갔다.
그 결과 2002년 대우조선에서 76명의 노동자가 근골격계 직업병 집단 산재승인을 쟁취하게 되었는데 현재 폭증하고 있는 직업병의 문제가 자본의 신자유주의에 의한 노동강도 강화에 있음을 명확히 하는 투쟁이었다. 한편 99년 결성된 산추련 해소로 단절되어 있던 노동보건진영이 다시 모여 2001년 산재보험제도 개혁 공대위가 구성되었다. 산재보험제도 개혁 공대위는 노동자들의 제대로 된 치료와 복귀, 그리고 산재에서 노동자 스스로를 탈락시키게 하는 낮은 보장성의 문제를 제기하며 산재보험과 근로복지공단의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현장과의 결합력 있는 활동을 전개하지 못한 채 해소되었다.
2002년 대우조선 근골격계 직업병 투쟁을 중심으로 직업병의 문제를 노동현장의 문제, 노동과정의 문제로 인식하고 노동강도 강화 저지를 위한 싸움이 조직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투쟁의 확산과 동시에 실제 벌여져야 할 노동과정에 대한 노동자들의 개입과 통제를 위한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2004년 경총은 기업안전위원회를 마련하고 정부와 함께 폭압적인 공격을 해오고 있다.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시행령이 마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내부 지침으로 산재인정의 기준을 엄격히 할뿐만 아니라 기존의 재해 노동자를 파렴치한으로 몰며 각종 치료중단과 통제, 불승인을 남발하며 그간의 투쟁을 되돌리고 있다.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을 중심으로 노동보건 제 단체들이 다시 모여 근골격계 직업병 인정기준 폐기와 산재보험 공공성 강화를 위한 공투위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지만 그 대응 역시 많이 부족하다. 현장은 이미 자본의 폭압적인 구조조정으로 골병들거나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데 반해 노동보건 활동의 영역은 아직도 직업병을 인정하라거나 제도를 바꾸라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구조조정으로 인해 망가진 현장의 조직력을 복원하고 개량화되는 조합운동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노동보건운동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면 끊임없는 직업병 인정 투쟁과 제도개혁에도 현장의 골병과 죽음은 멈춰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지난 십여년간 투쟁의 힘으로 단련되어져 온 노동보건운동의 역사를 이어받아 직업병 인정과 치료에 그치지 않는 정치적 투쟁의 의미로, 전체 노동운동의 혁신에 복무하는 투쟁으로 다시 한 번 거듭날 때만이 반격의 고리를 잡아갈 수 있음은 백번 말해도 모자라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