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집행위원장 김재광
잘못된 설정 - 산재보험은 상품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자와 판매하는 자 간의 불만과 분쟁은 불가피하다. 불가피성의 원인은 그 가치에 대한 서로의 상이한 이해에 따른 것인데, 노동력에서부터 남대문 시장의 옷가지까지 가치평가에 대한 불만과 분쟁은 다양하기만 하다. 한편 가치의 성립 자체에 대한 다른 이해로 불만과 분쟁이 존재하기도 한다. 즉 대가를 지불할 만한 가치(상품)제공이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이것은 요구한다거나, 분명한 가치제공이 있었음에도 이를 아예 거부하는 경우가 그렇다. 또한 특정한 조건이 형성되면 약정된 가치를 제공받기로 하고, 이를 위해 일상 시기 일정한 기여를 하는 경우 그 특정조건 형성의 가부 및 범위 여부가 그렇다. 이는 형법상 사기죄에서부터 임금체불, 보험급여 부적용 등 다양한 양태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산업재해보상보험에 있어 그 보험자(근로복지공단)과 수혜자(노동자), 보험가입자(자본, 사용자)와의 분쟁은 불가피한 것일까? 다시 말해 현실적으로 근로복지공단(이하 공단)이 어떠한 노력을 하던 애초에 설정된 관계상(상품 매매의 이해 당사자), 정말 불가피한가를 질문하는 한편, 이러한 설정이 타당한가를 곱씹는 것이다.
공단과 노동자 간에 축발되는 분쟁의 최대 쟁점은 요양 불승인, 요양종결 등이다.(장해등급 판정은 그 정도가 덜하고, 재활과 관련되어서는 분쟁할 여지조차 거의 없다.) 그런데 이러한 분쟁의 원인은 산재보험과 공단 운영의 주요 골격이 자본주의 상품으로서의 보험 방식을 별다른 수정 없이 그대로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다만 그 재원의 강제성만이 수정된 것이다.) 따라서 공단은 급여의 보장에 앞서 발생의 원인을 깐깐하게 따지고(특정조건의 가부), 승인 이후에도 상품으로서의 보험을 유지하기 위해 여간 애를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민간 보험회사와 그 급여제공 행태가 다를 바 없는데 반해, 가입의 강제성과 승인의 절대성(적어도 법원에 가기 전에)으로 인해 분쟁의 파고는 높고 그 각은 예리하다. 따라서 이 상태에서 분쟁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 불가피성은 어디까지나 상품으로서의 산재보험일 때이다. 굳이 산재보험의 연원과 배경, 그리고 사회적 의의를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산재보험이 자본과 노동의 타협의 산물이고 사회 공적서비스라는 것을 반박할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상품인 보험으로써 성립할 이유가 없으며, 공단의 설립취지는 사회서비스의 강화에 있는 것이다. 산재보험과 공단은 노동자가 사고나 질병을 당하면 치료하고, 재활하게 하여 노동현장으로 복귀하는 것을 도우면 되는 것이다. 재해의 원인은 재발의 방지와 위험요인을 개선하는 것이면 족하다. 나이롱 환자의 정의도 치료될 질병이 있느냐 없느냐로 정의되고, 의료기관의 나태와 도덕도 적정하고 적극적 치료에 임했는가로 평가되어야 한다. 지금과 같이 사회서비스로서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산재보험과 공단이 민간보험과 자본처럼 운영되기 때문에 피할 수 있는 분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산재보험과 공단의 운영에서 상품의 요소는 제거되어야 한다. 정체성을 망각하는 잘못된 설정이 자본을 제외한 모두에게 고통을 준다.
못된 관행부터 고치자
결국 현재의 잘못된 설정을 본 취지에 맞게 고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제도를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것으로 당장 이루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니다. 설사 보험제도가 그렇다 해도 운영의 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공단이 사회서비스로서 역할을 다잡는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공단의 운영규정과 인정기준은 현실에서 초법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법원 판결이 어찌되었든 재해노동자에게 공단의 규정과 지침이 우선이다. 현재의 규정과 기준이 (신자유주의 정책과 무관하지 않은) 비용절감과 급여의 효율성 제고일진대, 이것을 뒤집어 보장의 확대, 효과적인 요양에 맞추어진다면, 재활의 활성화로 맞추어진다면, 분쟁은 적어도 노동자가 자살하고, 시너를 부여잡고, 천막을 치고, 배를 곪는 지금의 양태에서 벗어날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공단 직원과 분노한 노동자의 멱살잡이는 ‘과격민원 대응지침’으로 해결될 수 없다. 공단은 당장 ‘승인처리기간 연장사유에 있어 사업주 날인 사항’을 폐기해야 한다. ‘자문의 판단의 결정력을 강화시키는 규정은 폐기’해야 한다. ‘병원이전 시 사전승인 규정’을 폐기해야 한다. 재해조사는 승인 여부가 아니라 원인개선과 예방을 위해 이루져야 한다. 인정기준을 넓히지 못하겠다면 그대로라도 두면 족하다. 공단이 못하겠다면 노동진영이 해야 한다. 산재보험법이 개선된다 하여도 공단의 관행이 제자리걸음이라면 소용이 없다. 심사기능이 분리되어 새로운 기구가 생기더라도 공단의 관행을 답습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산재보험이 상품적 속성을 씻어버리고, 사회공적서비스로 제자리를 찾게 하기 위한 총체적 노력 중 하나이며, 주요한 것은 오히려 그 잘못된 속성을 강화하는, 일선 기관의 관행을 분쇄하는 것이다. 공단의 독소규정과 불합리한 기준 등의 분쇄 과정과 결과는 우선 재해노동자를 그나마 편안케 할 것이고, 잘못된 제도를 재설정하는 유력한 지름길에 노동자를 주체로 서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