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기획위원 콩아줌마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앞에서는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동자들의 노숙농성이 두달째를 맞고 있습니다. <일터>를 읽는 동지들이라면 다들 알고 계시지요? 하이텍 동지들은 장기간 노조탄압과 감시, 차별이라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을 수반한 적응장애’라는 병을 얻었답니다. 이게 산재가 아니라고 박박 우기고 있는 근로복지공단에서는 “말 잘 하는 걸 보니까 멀쩡하구먼. 가짜 환자 아니야?”라고도 했다는데, 정말 무식하고 한심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글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 애쓰는 동지들이 읽는 것이지만, 부디 공단에서 이번 일터를 읽고 적응장애가 왜 생기며, 어떤 증상을 갖고 있는지 공부 좀 했으면 좋겠군요.
뼈가 부러지면 정형외과, 맹장 수술은 외과, 고혈압 치료는 내과... 이런 식으로 우리가 수많은 병을 몇몇 과에 따라 나누어 보듯이, 정신과 의사들은 수십 가지 정신질환을 몇몇 큰 틀로 나누어서 본답니다. 그러면 적응장애는 ‘신경증’이라는 큰 틀에 속하고, 여기에는 고소공포증이나 광장공포증, 공황장애, 강박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이 이웃으로 있습니다. 이런 질환들의 공통점은 자기 마음 속의 갈등이나 바깥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생기는 불안이 주원인이라는 것입니다.
불안은 마음 속에 일어나는 느낌이지만, 몸으로도 느낄 수 있습니다. 불안할 때 사람의 몸은 혈압이 올라가고 진땀이 나며, 부들부들 떨리거나 어지럽고, 안절부절 못하며, 심하면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등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심리적인 감정 뿐 아니라 실제로 자율신경계통이 활성화되어 신체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지요. 이런 반응은 아주 정상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불안을 느끼면 자기도 모르게 그 느낌을 억압한다는군요. 이런 억압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무의식 중의 방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억압을 ‘방어 기제’라고 부릅니다. 방어 기제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 중에 제일 기초적인 것이 억압이라는군요. 이런 억압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면 우리의 무의식은 또다른 방어 기제들을 동원하여 불안감을 처리하게 되며, 그 결과로 불안과 상관 없어 보이는 여러 증상들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적응장애의 여러 증상들은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불안을 떨쳐보려고 무의식 중에 애쓰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지요.
자, 그러면 적응장애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불안에 대한 방어 기제들에 대해 살펴볼까요?
아까 말씀드린대로, 방어 기제 중에서도 제일 으뜸은 ‘억압’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생각이나 욕망, 충동 등을 무의식 속으로 꾹꾹 눌러서 숨겨버리는 것이에요. 자기가 의식적으로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중에 참는 것입니다. 이게 잘 되면 겉보기에 아주 담담하고 차분해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억압’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트레스가 지나치게 많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지요. 하이텍 동지들이 평소에 차분하고 조리있게 얘기를 하다가도, 예전의 고통스런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면 눈물을 펑펑 쏟거나 말을 더듬을 정도로 흥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꼭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이면 ‘억압’만으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은 이차적 방어 기제들을 동원하게 됩니다.
이차적 방어 기제들은 그 이름들이 좀 어렵고 아리송합니다. 전치, 반동형성, 분리, 격리, 취소... 좌우간 의학 용어들 중에 우리가 쉽게 말하고 쓸 만한 쉬운 표현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좀 짜증이 나지만, 이해하기 쉬운 증상을 예를 들어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지요.
‘전치’란 어떤 대상에 대한 느낌이나 생각을 다른 대상으로 옮겨버리는 것입니다. 가령, 내 인격과 노동권을 오간데 없이 짓밟은 악덕 사업주를 생각하면 치가 떨리도록 미운데, 그 미움만큼 때려줄 수도 없으니 만만한 가족이나 친구, 혹은 아주 동떨어진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의 매를 맞고 사는 여성이 아무 잘못 없는 어린 자녀를 증오하는 일도 있고, 자본의 탄압에 오래 시달리던 노동자가 자기 배우자를 미워하게 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반동 형성’은 말이 아주 어렵습니다만,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것과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는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밉고 증오스러운데, 그 마음은 자기도 느끼지 못할 만큼 깊은 곳에 숨겨버린 채, 아주 너그럽게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이지요.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차마 죽일 수는 없으니 그냥 원수를 사랑해버리는 셈이라고나 할까요.
‘분리’는 말 그대로 세상을 딱 분리하여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분리’라는 방어기제가 발동하면, 근로복지공단 방용석 이사장이 지 본분을 잊고 하이텍 여성노동자들을 탄압하는데 눈이 벌개진 꼴을 보고는 ‘남자들은 다 못되고 여자들은 다 착하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격리’란 어떤 생각을 할 때 따라오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자기의 의식으로부터 몰아내버리는 것입니다. 추락사, 폭발사, 산재불승인 비관자살 등 노동재해로 인해 목숨을 잃은 동지들의 영정이 근로복지공단 앞 농성장 길가에 두달째 먼지와 비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그 수많은 영정들을 들여다보는 일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더 이상 슬프거나 분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취소’는 내 무의식 속에 있는 감정이나 욕구 때문에 상대가 어떤 피해를 입었을 거라고 상상하고, 그 피해를 없애서 원상 복귀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좀 어렵군요.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하이텍 자본가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서도 그동안 선량하게 살아온지라 그 증오심이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오뉴월에도 찬서리가 내린다는 한을 가슴에 품고 있으니, 어쩌면 그 인간에게 어떤 고통을 가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무의식 중에 상상하게 될 수 있지요. 그러면 무의식 중에 내가 가해자로 바뀌고, 그 가해자로서의 죄책감을 씻어버리기 위해서 손을 수없이 씻는 등 엉뚱한 생각이나 행동에 집착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적응장애의 증상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대표 증상은 불안과 우울이지만, 앞에서 살펴본 여러 가지 방어 기제들 중 어느 것이 주로 작동하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적응장애 환자라도 저마다 조금씩 다른 증상이 추가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공격적인 행동을 하거나 무모한 모험을 시도할 수도 있구요, 또 어떤 이는 사람 만나는 일을 회피하거나 남에게 혹독하게 굴 수도 있겠지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런저런 증상들이 나타나는 까닭은 스트레스로 인한 불안을 이겨보려고 무의식이 노력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겉으로 보이는 증상이 아니라 그 내면의 고통과 스트레스, 그리고 그걸 가져온 원인에 주목해야겠지요.
적응장애 때문에 잠을 못자거나 두통, 근육통 등 신체적 고통이 심하면 필요할 때는 약을 조금씩 먹어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적응장애 자체는 특별한 약물이나 입원치료 등에 의존하지 않아도 치료할 수 있습니다. 대개 개인적인 상담치료를 하는데, 비슷한 스트레스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집단으로 고충을 나누고 해결책을 찾는 집단정신치료도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하는군요. 그렇게 해서 스트레스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 없애면 대개 몇 달 안으로 증상들이 사라진답니다.
그러니 하이텍 동지들의 적응장애를 치유하는 길은 그 원인이 되는 노조 탄압과 감시, 차별을 뿌리 뽑는 일일 겁니다. 근로복지공단에서는 ‘아프다면서 어떻게 노숙투쟁을 하냐’고 수군대던데, ‘이렇게 함께 있고 연대하는 것이 바로 집단 치료다’라는 걸 좀 가르쳐 주어야겠지요.
<일터>독자들께서도 좀 더 열심히 영등포 노숙농성장으로 모여주시고, 먼 지역 동지들은 지역 내에서 대공단 투쟁을 열심히 조직해주세요. 그것이야말로 하이텍 동지들이 잃어버린 건강과 노동권을 되찾는데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이니까요. 이제 보니 적응장애 그까이 꺼, 찰떡같이 연대해서 힘차게 투쟁하는 게 곧 병과 싸우는 ‘투병’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