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 이훈구
뭘 위한 ‘동맹(同盟)’인가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서 첨병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 국무장관 라이스는 최근 ‘동맹(同盟)’을 강조하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강화하기 위한 한미관계의 현실과 지향에 대한 미국, 아니 초국적 자본의 견해를 전세계에 강요하기에 바쁘다. 그 견해에 따르면 무릇 ‘동맹(同盟)’이란 ‘공동의 이해’와 ‘공동의 가치’, 그리고 ‘공동의 위기’를 공유하고, 구체적 행위를 공동으로 책임지는 관계이어야 한다. 물론 ‘대빵’과 그에 추종하는 ‘똘마니’들이라는 위계에 흠집을 내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이겠지만.
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동맹은 무력적 침략과 살육을 정당화하는데 이르렀고 동시에 일상적 착취를 전체 노동자들이 스스로 감내케 하는 유연생산체제의 지구적 구축단계를 지나고 있다. 착취와 억압, 나아가 침략전쟁조차 불사하는 자본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자본의 이윤 사수’, ‘시장과 민주의 확대’,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는 노동자 민중의 저항 체재내화’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즉, 자본은 ‘괜찮은 자본세상 만들기’ 프로젝트를 전지구적으로 확산시키려는 ‘동맹(同盟)’관계를 조직하는데 혈안인 것이다. 반면 노동은 ‘살 맛나는 일터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난한 저항의 몸짓을 국제적으로 확대해 나가려 하고 있다. 결국 노동과정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 일상에 대한 통제를 둘러싼 자본과 노동의 힘겨루기 국면이 전지구적으로 본격화되고 있다.
노무현정부는 ‘미제’ 따라가기가 아니라 스스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주체선언을 집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말과 행동으로 일삼아 왔다. 저항한 노동자 민중은 폭압으로 확인해왔고, 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은 ‘삶의 파괴’와 ‘삶의 질 저하’를 피부로 느껴왔다. 최근 2-3년에 걸쳐,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은 경총과 전경련의 힘을 등에 업고 노동자의 건강과 기본 일상 권리에 대해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노동과정에서 자본의 ‘이윤’ 창출에 종사해야 할 임금노동자들이 ‘이윤’보다 ‘인간’을 중시하면서 노동과정에 대한 노동의 통제력을 강화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본과 정부의 동맹관계의 축을 뿌리 채 흔들 수 있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폭압과 폭력을 일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과 정부의 폭력과 착취에 맞서 노동은 ‘동맹(同盟)’을 통해, 아니 ‘동맹(同盟)’을 위해 온 몸으로 투쟁해왔다. 노동의 동맹은 가능하고, 반드시 이뤄내어야 할 숙제이다. 임금노예가 아니라 ‘사람인 노동자’로서 살아가기 위해 숙명과 같은 과제이다. 노동의 동맹, 핵심은 분명하다. 전태일 열사를 포함한 수많은 열사들의 외침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민주노총 및 각 연맹의 강령에서 볼 수도 있다. 물론 투쟁하고 실천하는 주체들의 저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노동해방 쟁취’와 ‘평등세상 건설’이 그것이다.
투쟁에 대해 곱씹기
자본세상에 맞서 저항한 대부분이 놀라거나 부러워 할 정도로 이 땅에서 노동자 민중의 저항은 지속적이고 거세었다. 비정규노동자 관련법 개악과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 법제화 시도를 둘러싼 노동과 자본간 한판 격돌이 목전에 있다. 사회적 합의주의 분쇄투쟁과 현장대중투쟁을 위한 지혜와 힘 모으기 방안에 대해 다종다양한 의견과 실천이 제안되고 있기도 하다. 지금 이 시각에도 폭압적인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노동기본권과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한 부단한 각개 전투가 전국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다. 전체 노동자의 희망은 계속된다.
씁씁한 현실도 있다. 민주노총의 강령은 액자에 갇혀 몇몇 지도부의 교섭 무기로 전락되어 노동자의 머리와 가슴 속에 살아 숨쉬고 있지 않고, 개인의 기억과 추억 속에 갇혀버린 듯하다. 무릇 관료란 관료만의 힘으로 탄생키도 어렵고, 지속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현재, 관료주의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히고 공유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노련한 운동선배나 과학적 사상과 이념으로 무장한 특출한 이에 의해 해결할 수도 없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핵심은 관료주의 양산한 노동조합과 개별노동자들의 왜곡된 실천과정에 있다. 요구와 지향은 오간데 없고, 그저 조직과 당사자들의 눈앞의 이해만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 없이는 실천정세, 당면과제, 선전 및 조직활동, 그리고 투쟁 과제 등은 그저 말과 글일 뿐이고, 주장하고 고민하는 이들의 것 이상으로 진전할 수 없다.
‘이윤’과 ‘건강’을 중심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 노동과정에 대한 노동의 통제력을 세우고 확대하는 과정에 복무해야 할 노동자 건강권 쟁취투쟁을 통해 요구와 지향을 일치시키고, 요구만 하는 주체가 아니라 실천주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부단한 현장실천에 힘을 쏟는 것은 하나의 방안이리라.
최근 노동자 건강권 쟁취를 위한 근로복지공단에 대한 전국차원의 저항을 중심으로 당면 실천과제를 확인해 보자. 우선 지향과 요구의 측면에서, 요구는 있되 지향과의 관계는 주머니 속에 숨겨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볼 일이다. 투쟁요구의 절박함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할 투쟁요구로서 ‘산재인정기준 개악지침’과 ‘산재요양업무 통제지침’ 등을 폐기하고, 치료받을 권리를 쟁취해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현재까지 대부분의 건강권 쟁취투쟁은 착취와 억압의 결과인 산재에 대해 인정투쟁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런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인정투쟁을 전국과 전산업으로 확대하면서, 동시에 자본의 이윤창출을 위한 노동과정이 노동자의 건강을 제일의 잣대로 삼는 노동자 통제력 강화에 기초한 예방투쟁을 병행해 나가야 한다. 그래야 골병과 죽음을 강요하면서, 치료받고 보상받아야 할 권리조차 침해하고 있는 자본과 정부의 공세에 맞서는 것이 일회적이거나 사안적이지 않을 수 있다. 나아가 산안법의 공공성 강화가 법제도적 개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장의 건강권 쟁취투쟁의 교두보로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치료받을 권리 쟁취라는 당면 요구와 건강하게 일할 권리 쟁취라는 지향을 일치시켜 나갈 수 있으며, 노동과 자본간의 화해할 수 없는 이윤과 건강의 긴장을 지속적, 조직적, 대중적으로 확장하고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건강권 쟁취투쟁 주체로서 선봉투쟁대오와 전체 노동자들에 대한 현실적인 진단 역시 투쟁과정에서 반드시 곱씹어야 할 것이다. 민주노총도 참여하고 있는 ‘공투위’부터 살펴보자. 공투위는 이름을 쓰는 것에서부터 빗나가 있다. 공투위가 아니라, 민주노총/공투위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민주노총을 돋보여야 하거나 제일 힘이 세기 때문일까. 아니면, 공투위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안전보건단체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까. 여하튼 공투위는 사실상 명의상의 공동투쟁에 그치고 있고, 요구상의 공동요구수준에서 협의적 대응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향은 공공연하게 이야기되지 못한 채, 암중모색 중이다. 당면 투쟁과제가 ‘계륵’과 같아서야 될 일이 아니다. 서로 힘을 모아 투쟁을 하기보다는 서로에게 떠넘기기에 급급한 모습도 부정하기 어렵다. 몇몇 영향력이 있는 이들의 생색내기와 떡고물 챙기기에 머물러서야 어찌 이 싸움을 이길 수 있겠는가. 이러한 어려움의 근저에는 투쟁에 직간접적으로 결합한 노동안전활동 주체들과 투쟁하는 주체들에 제한되어 있는 투쟁요구와 과정에 대한 대중적 확대를 조직적으로 집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서 대리투쟁은 또 다른 대리투쟁을 부르게 되고, 현안 투쟁주체들은 고립되기 십상이다. 긴 병에 효자효녀 없다는 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장기투쟁대오들이 겪고 있는 현실에 대한 준비를 당장부터 해야 한다. 근로복지공단에 대한 당면 투쟁과제는 전체 노동자의 노동과정과 일상의 질을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 노동자들이 산재 당사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 나아가 전체 노동자들의 문제임을 확인하고 동의하게 하느냐에 성패가 달려있다.
이 싸움은 이겨야 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했다. 근로복지공단부터 보자. 공단이사장인 소위 30년 경력의 노동운동출신 방용석이 제일 겁내는 것은 무얼까. 대중적 저항이지 싶다. 자기 말마따나 “목을 걸고 안 된다. 민주노총이 와도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버티고 있는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의 힘은 어디에 있을까. 그에게 무소불위의 힘은 없다. 정부와 자본의 태도를 뒷심으로 삼고 있으되, 대중투쟁의 힘에 밀리면 바꿔질 인물일 뿐이기에, 광범위한 현장의 저항으로 파렴치한임이 만천하에 폭로되어 정부와 자본으로부터 쓸모가 다된 인물로 판단되는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일 터다. 허면 그리해야 할 것이다. 투쟁주체들도 ‘목을 걸어야’ 할 밖에 다른 수가 있을 턱이 있겠는가. 동시에 서울은 전국이 아니다. 전국은 전국에 있다. 당면 투쟁의 중심 교두보를 전국화하면서, 선봉대오를 중심으로 지역차원에서 대중참여를 확대해나가야 한다. 그래야 사활을 건 노동자건강권 쟁취투쟁이지 않겠는가. 현장을 바꿀 주체를 만들고, 노동자의 노동과정 통제력을 강화해나가는 투쟁으로 진전시키는데 혼신의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투쟁승리와 ‘동맹(同盟)’의 주체되기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특히 노무현 집권 이후 총파업투쟁 조직과 전국투쟁전선 구축이라는 과제가 제기되지 않은 해가 없었다. 정세로부터 제출되기도 하였고, 당면 투쟁과제의 절박함으로부터 제안되기도 하였으며, 주체형성이라는 측면에서 요구와 지향을 대중적으로 현실화하기 위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근래 들어 노동자운동 내부의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넓게 퍼지고 있다. 각설하고 대부분의 이들이 동의하는 것은 투쟁전선 구축에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과 함께 ‘노동해방 쟁취’라는 지향을 일상적으로 선전선동해야 하며, 자신의 역할을 올곧게 받아 안고 실천할 주체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데 있다고 정리해도 크게 엇나가지는 않는다 싶다. 이를 위해 그동안 어느만큼 실천해왔는가를 행동으로 반성해야 한다.
지금은 저항투쟁의 역동성을 중심으로 대중투쟁의 신뢰구축과 투쟁승리에 대한 경험축적 그리고 임금노동자의 굴레를 벗고 전체노동자의 일부이자 전체로 서나가는데 힘을 모아야 할 터다. 노동자 건강권 쟁취를 위한 나아가 ‘노동해방 쟁취’을 위한 ‘동맹(同盟)’의 주체들을 만드는 일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자. 그 출발은 당면투쟁에 대한 의의와 목표 그리고 과정에 대한 대중주체들과의 호흡에 있다. 그래야 당면투쟁을 이길 수 있고, 전국투쟁전선 구축이 손에 틀어쥘 정도로 가시화 될 수 있다. 전선구축은 투쟁요구와 지향에 대한 동의와 행동 주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전선구축의 주장이 있어왔지만, 전선은 유실되거나 교란되어 오지 않았던가. 노동자 건강권 쟁취투쟁을 통해 노동자운동을 복원코자 하는 ‘싹’은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주변의 토양을 가꾸고, 불시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 때 키워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승패는 함께 저항하는 주체들에 의한 일상활동의 폭과 깊이에 달려있다. ‘동맹(同盟)’의 싹은 전체 노동자의 몫이다.
실천제언, 이렇게 행동하자.
1. 하루에 한 명씩 현장동료들과 서로의 몸상태와 현장원인에 대해 이야기하자.
2. 당면 투쟁요구는 노동자의 삶과 노동과정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소토론 해보자.
3. 현장 대자보/소자보 작업을 통해 당면 투쟁에 대한 현장선전을 전개하자.
4. 근로복지공단에 항의 행동-항의 팩스, 항의 전화 등-을 조직하고 참여하자.
5. 지역차원에서 적어도 주 1회씩 공단 앞 대중저항을 조직하고 참여하자.
6. 선봉대오들의 필승 결사투쟁 결의를 북돋고 함께하기 위해 노동조합차원에서 투쟁결의를 할 수 있도록 공식안건으로 제안하고 실천결의를 조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