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기획위원 공유정옥
1. 민노당 산재보상법 개정안의 핵심 내용
민주노총/민주노동당의 산재보상법 개정안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산재 미인식 노동자 구제 - 자신의 재해가 업무상 재해인지 여부를 인식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노동자를 진료한 의사 등에게 산업재해분류기준표에 따라 근로자의 상병이 업무상 재해인지 여부를 판단하도록 하는 절차를 신설함.
나. 업무상 재해 인정 방식의 전환 및 평가 기관의 독립성 확보(근로복지공단의 산재승인 권한 폐지) - 현재 보험기금 운용자인 근로복지공단이 보유하고 있는 산재승인 권한을 폐지하고, 1차적으로는 담당 주치의가, 종국적으로는 독립 법인인 심사평가원이 업무상 재해 여부를 판단하게 하였음.
다. 선보장(치료) 후평가 - 의사 등이 노동자의 상병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할 경우 심사평가원의 최종 판단이 내려지기 전이라도 요양(치료)은 먼저 보장되도록 하였음.
라. 재활급여 신설 - 재해 노동자의 원활한 직장 및 사회 복귀를 돕기 위해 재활급여를 신설하였음.
2. 어떻게 볼 것인가
이번 특집의 기획 의도는 바로 이 개정안 내용의 의의와 한계를 평가하고, 그 평가에 입각하여 의의를 최대화하고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 과제를 찾는 것이다. 여기에서 개정안의 의의와 한계를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우리들 자신이 수없이 외쳐왔던 구호, ‘누구나 쉽게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라’와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야말로 현장의 고통과 요구를 가장 잘 반영한 기준이다. 이제 이 두 가지를 기준으로 개정안의 의의와 한계를 평가해보자.
(1) 쉽게 치료받을 수 있는가?
재해 노동자를 진료한 의사가 업무상 재해 여부를 판단하여 우선 치료를 제공한 뒤 근로복지공단에 통보할 수 있도록 하고, 공단에서 요양 승인 여부를 판정하는 역할을 분리하여 별도의 심사평가원을 설치하는 것이 이번 개정안에서 가장 두드러진 내용이다. 여기에는 ‘산재 미인식 노동자의 구제’와 ‘업무상 재해 인정방식의 변화 및 평가기관의 독립성 확보’, 그리고 ‘선보장 후평가’라는 핵심 내용들이 담겨있다.
이 개정안을 바탕으로 한 산재요양 절차는 크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의사가 업무상 재해로 인정한 경우 - 의료기관은 우선 노동자에게 요양 서비스를 제공하며(선보장), 업무상 재해임을 3일 이내에 근로복지공단으로 통보한다. 공단은 7일 이내에 승인을 통보하거나 심사평가원에 적정성 여부 판단을 의뢰해야 한다. 심사평가원은 20일 이내에 공단으로 판단 결과를 통보해야 하며, 공단은 그 결정에 따라야 하고, 이를 지체없이 의료기관과 노동자에게 통보해야 한다. 공단에서 요양 불승인이 통보되면 선보장된 요양 급여는 별도로 정산 절차를 밟으며, 노동자는 이에 대해 심사, 재심사를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요양 승인이 결정되었을 때 사용자는 이에 대한 심사, 재심사를 제기할 수 없다.
② 의사가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은 경우 - 의료기관은 불인정 사실을 환자에게 통보해야 한다. 환자는 직접 공단에 보험급여를 청구할 수 있으며, 이 경우 공단은 반드시 심사평가원에 적정성 여부 판단을 의뢰해야 한다. 심사평가원은 승인 또는 불승인 판단을 공단에 통보하며, 공단은 이를 다시 의료기관과 노동자에게 통보한다.
위 절차를 현행 산재보험 요양 신청 절차와 비교해보면, 의사의 판단에 따라 치료 서비스를 우선 보장받는다고 하더라도 사후 불승인이 나면 진료비를 정산하여 부담해야 한다는 점에서 요양 제공에 대한 원인주의적 접근의 한계는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재해노동자를 이중으로 고생스럽게 만들어온 요양 신청 과정이 상당히 간소해질 것으로 기대되며, 또한 그동안 수많은 재해노동자의 발목을 잡아왔던 ‘사업주 날인 제도’가 자동으로 사라지게 되는 긍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지금보다는 ‘쉽게 치료받을 수 있는’ 제도가 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다만 이처럼 산재요양의 문턱을 낮추는 긍정성이 제대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아직 몇 가지 숙제가 남아있다.
우선 산업재해분류기준표를 어떤 과정으로, 어떤 내용으로 만드느냐가 관건이 된다. 비싸고 복잡한 검사를 거치지 않고도 의사가 문진을 통해 간단히 업무관련성을 파악할 수 있는 질환들의 목록과 진단 기준을 얼마나 포괄적으로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이 제도 변화의 수혜 범위가 크게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작년 경총이 근골격계 직업병 인정기준 개악 시도에 발벗고 나섰던 일을 상기해본다면, 개정안이 통과되더라도 자본은 산재분류기준표의 포괄범위를 최소화하여 무력화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할 것임이 분명하다.
의사나 의료기관이 이 제도에 따른 새로운 역할을 충실히 실행하도록 이끄는 유인책이나 제재 방법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한 숙제이다. 철저한 자본주의 의료체제 속에서 의사들이나 의료기관들이 경제적 이득이나 제재 없이도 번거로운 업무상 재해 판정 과정을 자발적으로 실천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당장 원인주의를 벗어나 결과주의로 전환하기 어려운 조건이기는 하나, 산재요양의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해서는 ‘선보장 후평가’보다도 요양인정기준의 완화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요양인정기준이 완화되지 않는 한 ‘선평가 후보장’과 ‘선보장 후평가’ 사이에는 판정 시기의 차이밖에 남는 것이 없다. 근로복지공단에서 심사기능을 분리하여 독립된 심사평가원을 설립한다고 해도 심사평가원이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요양인정기준을 사용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2)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는가?
이번 개정안에는 보험급여의 종류에 직업재활, 사회재활, 심리재활 등의 ‘재활급여’가 추가로 명시되었다. 근로복지공단이 ‘재활요양원’을 설치, 운영하여 모든 재해노동자가 원직장 복귀, 재취업, 전직, 자영업 등으로 직업복귀가 이루어질 때까지 직업훈련, 취업 알선, 취업 후의 사후관리까지 1:1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재해노동자가 실제로 직업재활, 사회재활, 심리재활 등 포괄적 재활 서비스를 누릴 권리를 보장한다는 취지를 달성하기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 게다가 이를 담당할 재활요양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현재 운영되고 있는 산재의료관리원을 재활요양원으로 전환한다는 발상은 재해노동자의 현실과 너무도 동떨어진 안이라 하겠다. 수많은 재해노동자들이 실제로 재활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각 시/군/구 수준에 하나씩 재활요양원이 들어서야 한다. 또한 의학적 재활이라면 모를까 직업/사회/심리적 측면의 재활을 굳이 의료기관에서만 제공할 필요는 없다.
그런 점에서 몸이 불편한 재해노동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각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다양한 측면의 재활 서비스를 포괄할 수 있도록 의료기관 및 각종 교육/복지기관, 그리고 민간기관 시설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미 몇몇 단위 사업장 노동조합에서는 이러한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 길을 모색하는 중이다. 재해노동자의 재활과 현장 복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안을 모색하고 시도해온 이러한 시도들도 꼼꼼히 검토되어야 한다.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재해노동자의 현실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그들의 구체적 고통과 요구,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행착오들을 반영하기 위한 노력이 좀 더 필요하다.
3. 무엇을 해야 하는가
노동보건운동 제 단체들이 모여 산재보험제도 개혁 공대위(이하 ‘공대위’)를 만든 것은 지난 2001년이었다. 공대위는 산재보험과 근로복지공단의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였으나 현장 활동에 밀접하게 결합하지 못한 채 해소되었다.
그 이후 2002-3년의 근골격계 직업병 집단요양투쟁이 있었고, 이에 대한 자본의 역공이 전면화되기 시작한 2004년이 되자 다시 한 번 민주노총과 금속연맹, 그리고 노동보건 제 단체들이 ‘근골격계 직업병 인정기준 폐기와 산재보험 공공성 강화를 위한 공투위(이하 공투위)’를 결성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일터> 2005년 7월호 연구소 리포트 '산재보험관련 노동보건진영 대응 역사' 참조)
하지만 공대위부터 공투위에 이르는 몇 년간의 공동 활동 속에서도 산재보험 제도 개혁에 대해서는 노동보건운동 진영 안의 서로 다른 입장들이 좁혀지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추상적인 수준에서 제도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은 있었지만, 매 시기 정세와 당면 실천 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산재보험 제도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제도개혁 요구의 우선순위와 전술에 대한 입장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차이들을 극복하는 방법은 현장의 구체적인 고통을 함께 확인하고, 이를 ‘우리’의 요구로 조직해내는 사안별, 지역별 연대와 공동실천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노동보건운동 진영은 연대와 공동실천을 통해 현장의 고통과 요구를 확인하고 나누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이후, 여러 입장 차이는 물론이고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놓고 대중의 요구를 모으고 조직해야 한다는 과제조차 "당을 중심으로 한 입법추진"이라는 방식에 의해 일순간에 압도된 듯 하다.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실과 노동조합 상급단체 담당자, 그리고 진보적인 전문가들이 모여서 개정안을 만들어냈고, 그 나머지는 - 노동보건운동단체이건 현장 노동자이건 - 그 내용을 받아보는 입장, 선전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현장의 요구와 참여를 조직하지 못하고 상층과 전문가에 국한되어 일을 추진해온 과정상의 한계는 분명하다. 개정안이 나온 지 두 달이 되어가고 국회 입법 발의를 한 달 남겨둔 지금도, 투쟁의 현장에서는 ‘산재보험 개혁하라’는 추상적 구호 이상의 구체적인 개정안 내용이 요구로 외쳐지지 않는다. 최근 ‘누구나 쉽게 치료받게 하라’와 ‘제대로 치료하라’는 주장으로 조금은 구체화되고 있지만, 아직 대중적인 요구로 자리잡았다고 하기에는 이르다.
그렇다면 이 개정 법안에 활력을 불어넣고 이번 시도를 현장 실천과 투쟁의 성과로 자리매김하려면 우리는 현장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노동재해와 관련된 각 사안별 투쟁 속에서 각 투쟁들의 계기가 되었던 당사자들의 구체적 고통을 ‘누구나 쉽게 치료받게 하라’와 ‘제대로 치료하라’는 대중적 요구로 적극 조직해야 한다.
또한 그 요구들이 이번 개정안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혹은 덜 반영되었는지를 면밀히 검토하고, 부족하거나 넘치는 부분을 채워가야 한다.
끝으로, 제도 개혁은 상층과 전문가의 몫이고 현장 투쟁은 그 현장 활동가의 몫이라는 식으로 나누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제도 개혁에 활력과 현장성을 부여하는 것을 자기 과제로 삼아야 한다. 현장의 고통을 조금 더 확장된 요구로 조직해내고, 그 요구를 담아 제도 개혁의 내용과 과정에 현장의 실천적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바로 노동보건 현장활동가의 책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