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 바 ‘8/31 부동산 종합대책’을 보면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소장 채만수
90년도의 이맘 때였을 것이다. 서울의 ‘영등포 을구’에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있었고, 민중운동 진영도 '민중후보'를 추대해 출마시키는 등 꽤나 요란하게 선거전에 참가했다.
그런데 그 때 명색이 ‘민중후보’로 추대된 사람이, 다름 아니라 노무현 정부에서 바로 얼마 전까지 국가정보원장, 그러니까 전두환 시절로 말하면 안기부장, 박정희 시절로 말하면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하는 고영구 변호사, 바로 그 사람이다. (- 여담이지만, 민중운동 진영의 안목도 참으로 경탄해야 할 것이다. 불과 10여 년 후에는 국정원장을 하게 되는, 그러한 인물을 ‘민중후보’로 추대하는 그 안목 말이다.)
아무튼, 그때 ‘민중운동 진영의 이념과 사상을 대중에게 선전/선동하는 것이 당면 목표’라던 그 선거전에서 민중운동 진영이 내건 주요 슬로건의 하나, 그러니까 민중운동 진영이 대중에게 목청 높여 선전/선동한 주요 내용의 하나가 다름 아닌 ‘토지공개념’이었고, 그 강화였다.
당시 한국경제의 상황은 노태우 정권이 ‘총체적 위기'라고 규정할 만큼 심각한 경제위기, 즉 공황이 이미 시작된 후였다. 다만, 토지/주택의 가격만은, 경제전망에 관한 한 가히 백치에 가까운 부르주아 언론이나 경제관료들이 “한국경제는 이제 궤도에 올랐다”고 기고만장해 하던 시절인, 직전의 호황말기의 투기 열풍으로 인해 치솟은 채 아직 하락하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른바 ‘토지공개념’ 소동은 바로 그러한 호황말기의 투기 열풍 속에서, 경제문제를 이해할 능력은 없지만, 시류를 타는 데에는 탁월한 감각과 능력을 지닌 소부르주아 시민운동가들에 의해서 지펴진 것이었다.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그 ‘토지공개념’/‘경제정의’라는 구호로 일약 막강무비한 단체로 도약한 ‘경실련’, 그러니까 언필칭 ‘경제정의실천시민연대’였다.
그리고, 당시 민중운동 진영, ‘민중후보’가 “토지공개념” 강화를 외친 것은 바로 그 꽁무니를 따라간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나는 ‘민중후보’ 진영의 토지공개념 소동을 “천둥벌거숭이 어릿광대 놀음”이라고 평가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십수 년을 격하여 최근에 다시 <한겨레>를 위시한 소부르주아적 ‘민주언론’과 많은 시민운동단체들이 ‘토지공개념’을 들고 나오고 있고, “개혁”이라고 두 글자를 이마에 써 붙이고 있는 ‘참여정부’ 역시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포고하고 나섰다. 그리고 오랜 ‘8/31 부동산 종합대책’이란 것을 내놓았다. ― “서민의 주거안정을 위해서”라는 깃발을 휘날리며!
당연히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환호하고 있다.
다만,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은 내심이야 어떻든 적어도 겉으로는 다행히 10여 년 전과 같은 그런 소동은 떨지 않고 있다. 비정규직의 확대 등 고용/임금을 포함한 노동조건의 전반적인 악화, 그에 따른 노동자/민중의 빈곤 심화, 생존권의 위협 등이 지금 노동자/민중이 처한 상황이고, 그러한 상황을 더욱 가혹하게 조성/조장하고 있는 게 바로 노무현 정권이기 때문에, 게다가 사정이 그런데도 작년에 노무현과 그 정권을 지지하여 “탄핵반대”/“탄핵무효”를 외쳤던 게 조금은 겸연쩍기도 해서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낯꼴들을 보면, 과히 싫지 않은 표정이고, 은근히 무언가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참 고소하다”는 말까지도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
심정은 알 만하다.
그러나 문제의 ‘8/31 부동산 종합대책’을 위시해서 부르주아 권력이 내놓고 있는 부동산 대책, 부동산 정책이 과연, 저들의 표현을 빌자면, “서민의 주거안정”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혹은, 정말 그러한 목적으로 내놓고 있는 것일까? 혹시 무언가 독점자본의 이해에 봉사하기 위한 것인데, ‘서민의 주거안정’이라는 포장지로 포장한 것은 아닐까?
적어도, 비뚤어진 내 눈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저들의 ‘토지공개념’이 작금의 토지 기타 부동산의 집적/집중을 마치 지주적 혹은 개인적 집적/집중의 문제인 듯이 파악하고 선전/선동하는 것이 애당초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부동산에 대한 투기 열풍과 그에 따른 가격의 폭등이 마치 자본주의적 생산의 움직임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마치 개인의 사악한 투기 ‘심리’의 문제인 듯이 파악하고 선전/선동하는 것이 애당초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투기 열풍이 다 그렇듯 부동산 투기 열풍 역시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 그 병리의 표현이요, 전반적인 과잉생산에 의한 이윤율의 급격한 저하에 따른 현상이다. 주기적으로 열풍이 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작금의 토지 기타 부동산의 집적/집중의 핵심 주체는 독점자본이다. 삼성 등 재벌/독점자본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전국에 걸쳐 가지고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토지/주택/건물, 기타 부동산을 보라. 지주적/개인적 집적/집중이 없지 않지만, 저들 독점자본의 그것에 비하면 초라한 것일 뿐이다.
잘못된 진단은 당연히 잘못된 처방을 낳는다. 그러나 이는 단지 순진한 소부르주아 시민운동에만 적용되는 말일 것이다.
국가/정부, 즉 독점자본의 이익에 봉사하는 그들은, 자신들의 정책이 사실은 독점자본의 이해에 봉사하기 위한 것임을 잘 알면서, 대중의 저항을 고려하여 “서민의 주거안정을 위해서”라는 포장지로 감싸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설마? ― 그렇다면, “나 같으면 부동산이 아니라 주식에 걸겠다”는, 노 아무개의 말씀을 상기하라.
사실, 이른바 ‘토지공개념’이나 그에 기반한 정책들은 토지/주택 등 부동산의 집적/집중을 저지/완화하는 것이긴 커녕, 그것을 더욱 촉진/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해 대립구도는 (독점)자본 대 ‘비자본가적 토지/주택 소유’인데, 부동산 보유세와 같은 수단을 통한 압박은 비자본가적 소유자에게만 가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에 의한 토지/주택/건물의 소유와 이용, 그것은 압박의 대상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장려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해 대립의 당사자가 (독점)자본과 ‘비자본가적 소유자’라면, 노동자/민중의 이해는?
다름 아니라, (독점)자본에 대한 예속의 심화, 그것이다. 아니 그렇겠는가, (독점)자본에 의한 부동산의 소유/지배가 강화돼 가는데? ― 그런데도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의 적지 않은 수의 활동가/이론가들이 ‘토지공개념’ 등 저들의 선전/정책을 초들고 나선다.
한편, 아직 완전히는 자본주의화 되지 못한, 전통적 관념과, 또 현실적으로 겪는 ‘집 없는 설움’ 탓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자기 주택 소유’는 당연히 노동운동의 목표의 하나여야 한다고 믿는다. 잔인하게 들릴지라도, 그러나 이 또한 소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의 영향 때문이다.
충남대의 류동민 교수 같은 자가 이 글을 읽으면, 필시 또 “기독교도들이 사도신경을 외우듯” 맑스주의 문헌을 인용한다고 하겠지만, 엥겔스의 <주택문제(1872)>를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고 싶다. '주택문제'에 대한 정말 노동자계급적 관점을 갖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그 글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주택을 사야 한다는 모든 사고(思考)는 이 또한 ... (소부르주아적인: 인용자)프루동의 반동적인 기본적 견해에 기초하는 것이다.”(MEW, Bd. 18, S. 225)
“돌푸스(M. Dollfus)와 그 일당은 자신의 공장 노동자들에게 소주택을 연부(年賦)로 팖으로써 노동자들 사이의 혁명적 정신을 질식시킴과 동시에 ... 노동자들을 그들이 일하는 공장에 묶어두려고 하였다.”(S. 226)
“노동자는 이러한 주택을 획득하기 위해서 무거운 저당채무를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고, 그리하여 그들은 더욱 완전히 고용주의 노예가 돼버린다. 그들은 자기의 주택에 묶여서 ... 고용주의 말이라면 어떤 노동조건이든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S. 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