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세상사는 이야기] 죽음

[05/10월/세상사는 이야기]
죽음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오주환


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그 사람이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것은 더욱 슬픈 일이다. 그 사람들이 한꺼번에 많을 때 역시 다른 사람들은 더욱 슬퍼한다. 또한 죽은 사람이 더 살수 있었던 사람일 때 그렇지 않은 조건이라면 더 오래 잘 살수 있었던 사람일 때 우리는 더욱 슬퍼한다.

얼마 전 미국의 뉴올린즈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허리케인에 이은 댐의 붕괴로 불어난 물에 빠져 죽었다. 미국정부는 이라크에서의 살상에 많은 비용을 들이느라 이지역의 댐의 붕괴위험에 대한 경고를 지속적으로 무시해 왔다고 한다. 결국 한 번 지나간 허리케인 후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시간쯤에 도시에 물이 차기 시작하였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대피할 수 있는 차량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따라 삶과 죽음은 갈리었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더라도 전망 좋은 데서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위험에 덜 처했으며, 전망이 좋지 않은 저지대에 살던 사람들은 대다수가 죽었다. 죽은 이들은 사회적으로 더 어려운 환경에서 노동하고 주거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라크에선 지난해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군대에 의해 죽었다. 미국의 군사적 폭력에 저항하다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은 자연재해로 사망한 것처럼 보이는 미국의 피해자들보다도 세계의 언론에 의해 주목받지 않는다. 무질서와 혼란에 빠진 민족처럼 묘사될 뿐, 죄 없고 억울한 이들의 죽음으로 결코 동정 받는 모습으로 등장시키지 않는다.

지난 영국에서의 테러로 사망한 어린이에 대해 세계여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동정과 테러에 대한 분노를 자아내게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대에 의한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테러(!)로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팔레스틴 어린이들의 사망에 대해서 세계적인 언론사들은 다루지 않는다.

한국에선 많은 이들에게서 사랑받던 한 여배우가 죽었을 때 여론은 그 일로 애도를 표현했다. 나도 그 여배우의 팬이었다. 그리고 안타까웠다. 얼마 전 울산의 한 자동차공장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죽었다. 그리고 또 며칠이 되지 않아 부산의 신선대 부두에서 화물연대 조합원인 노동자가 온몸에 불을 붙여 자살했다. 그러나, 두 노동자의 죽음이 언론에 의해 애도된 것은 너무나도 불충분했다. 절망을 넘기 어려워 선택한 자살의 순간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리고 그 후 서울의 한 호텔 앞에서 한 택시노동자가 분신을 하였고, 여수에서도 또 다른 농성 중인 노동자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 노동자들 죽음의 공통점은 열심히 일한 만큼 행복하게 살고 싶었으나 그것을 가로막는 그들을 둘러싼 고용구조 속에서의 노동은 희망을 갖기가 너무도 어려웠다는 점이다.

이렇게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모양의 죽음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차별당하는 사람들의 죽음이 숫자상 훨씬 더 많다는 점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그 모든 죽음이 안타까운 것이라는 점이다. 모두가 그렇게 되지 않았어야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두가 똑같이 추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죽음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는 그런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살아남은 자들이 그 몫을 제대로 해야 한다. 같은 이유로 사람들이 또 죽어가는 것을 계속 보고만 있을 수 없지 않는가?

“동지여 그대가 보낸 오늘 하루가 어제 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 동지여 그대가 보낸 오늘 하루가 내가 그토록 투쟁하고 싶었던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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