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철도노동조합 철도매점본부
글/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霖
사진/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박지선
강제용역전환 철폐,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철도매점 노동자들은 지난 2001년 1월 17일 노동조합을 창립하였다. 창립 과정에서 노동조합 설립 신고 반려 및 노조위원장 해고 등의 난관이 있었고, 2003년 12월 대법원의 노동조합 인정 판결이 날 때까지, 노동조합의 교섭요청에 홍익회사측은 노조 및 조합원 불인정의 이유로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철도매점노동조합의 교섭요청은 지속되었으나 사측의 거절로 단 한 차례의 교섭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2005년 2월 16일 철도매점노동조합은 휴무투쟁에 돌입, 22일 이후에는 본격적인 파업투쟁을 진행하였다. 홍익회 본사 점거 농성 및 서울역 대합실에서의 단식농성 등 파업투쟁은 171일간 이어졌다.
부평역에 오기까지 - 신지식 동지를 만나다
내가 1985년인가 홍익회에 입사해서 열차에서 손님들이 짐을 가지고 내리면 그걸 운반해주는 일을 했거든. 한 7-8개월 했나? 하다가 폼에서 실족을 해가지고 기차가 통과해 버렸지. 그래서 두 다리를 짤렸어. 회사에서는 그 당시 위로금이라고 병원에 누워 있는데 30만원을 주고는 그냥 딱 끊어 버리더라고. 홍익회가 어용노조지만 가서 ‘내 가족들하고 살아갈 수 있는 생계 대책을 세워 주어야 할 것 아니냐’ 얘길 했지. 그러다 90년 3월에 매점이 하나 나왔으니까 하라 그러더라고. 부천 지하매장을 하는데 2명이 매달려서 50-55만원 벌었어. 그래도 그 때는 화폐가치가 있었으니까 괜찮았지. 무엇보다 두 다리 없는 장애인이지만 돈을 벌 수 있다는 보람 하나 가지고 죽자 살자 했지. 1년 반 정도 있으니까 대합실 쪽으로 옮겨주더라고. 근데 몸이 불편하니까 과자 상자를 받고 쌓고 하는 게 사실 힘들더라. 그래서 신문 매장으로 옮겨 달라 했더니 간석역으로 옮겨줬는데 장사가 전혀 안 되는 거야. 그래 또 5년인가를 싸웠더니 02년에 여기 부평역에서 일하던 사람이 부정한 짓을 해 짤려서 자리가 비었다고 와서 하라 하더라고.
가족들이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천만의 만만의 콩떡이야
홍익회에서 지정하지 않은 상품을 팔았다고 짤렸는데, 그게 억지지. 글자 그대로면 우리는 사업자등록증을 가진 개인사업자 아녀, 개인사업자가 다른 곳에서 물품을 납품 받아 팔 수도 있는 거지. 그니까 완전히 간판만 개인사업자라니까. 체육대회 나와라 안 나오면 짤린다, 교육 들어라 안 들으면 불이익 생긴다, 영업장 개폐문제나 뭐 다 그렇다고...
일례로 부모가 죽었어. 그러면 누군가 사람을 대체를 해놓고 가야지 그냥 가면 고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했어. 그냥 문 닫아 놓고 가면 장례식장에 직원이 와서 키를 달라고. 다른 사람이라도 장사를 한다고. 어딜 놀러가려 해도 가게 문을 절대 내리면 안 되니까 부부동반은 불가야. 한 사람은 남아서 가게를 봐야 하거든. 한 번은 놀러 갈려고 버스를 대절하자 그랬거든. 그랬더니 다음 날 아침에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 놀러 가기로 한 날 교육이 있다고 공고문이 붙는 거야. 만일 교육 불참시 불이익이 돌아갈테니까 알아서 해라 그런 식으로...
새벽 6시부터 밤 11시까지 일을 하는데, 집사람이 문을 열면 내가 한 9시에 나와서 교대를 해주고, 점심을 먹어야 하니까 2시경에 집사람이 다시 나와. 근데 보다시피 안이 좁고 그래서 밥을 먹기가 힘들거든. 그래 집에 가서 밥을 먹지. 하루에 2끼 먹어. 화장실? 아까 못 봤어? 물통 큰 것 2개 안에 놔두고 있잖아. 소변은 안에서 그렇게 해결하고, 대변은 숙달이 되어 그런지 하루 동안은 꿈쩍을 안 해. 어느 매장이나 다 똑같을 거야. 이번 싸움 끝나고 이제 한 달에 이틀을 쉴 수 있게 되었지. 하루만 쉬면은 3만원 주고, 이틀 다 쉬면 안 주고, 하루도 안 쉬어도 3만원 주고. 그 전에는 연중무휴였어.
월급? 받아 본 적 없어
같은 부평에 있어도 매장마다 매출이 다르지. 그날 그날 팔아서 회사에 송금하고, 월 말에 입금액수에 따라 용역수수료를 받는 거지. 월 1,000만원 미만은 19%, 1,000-2,000만원은 13%, 3,000만원 이상은 8,9%. 아이고... 월급 같았으면 내가 경력이 높아서 엄청날 거야. 전에는 회사 직원이었는데, 월급이 아니고 성과급으로 나왔지. 특수영업원, 성과급영업원으로 이름도 계속 바뀌었지. 법원에서 근로기준법 위반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용역이라는 사슬을 씌운 거야.
산재야 받았지. 내가 다칠 당시에는 4대 보험이 다 적용이 되었으니까. 다리를 잘려 누워있는데 복지부직원이 나온 거야. 귀에다 대고 ‘어떻게 된 게 선생님께서는 대한민국에서 정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계셨네요. 뭔가 선생님을 도와드리고 싶어도 대한민국에서 정한 최저임금에 준하는 보상을 해주는 것 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는데 눈물이 얼마나 쏟아지던지. 일시불로 수령을 하면 그 때 당시 705만원이라고 했는데, 다달이 받겠다고 했지. 3개월에 48만 여원이 나왔는데, 연금이 통장에 입금되는 날이면 무조건 슈퍼에 가서 생필품하고 석 달 먹을 쌀을 사놓고 또 석 달을 기다리는 거야. 그러고 있는데 노태우가 정신이 나갔는지 요상한 문자를 써가면서 보험료를 20%를 올린 거야. 석 달에 70만원대로 올라가더라구. 말하자면 승진해서 봉급 타는 것 저리가라였지.
싸워야지... 싸울 수밖에 없어
매점 사람들도 노조에 가입하려고 13명이 수원지부로 모여 가서, 왜 우리가 노조에 가입이 안 되는지 분명한 이류를 이야기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입시켜 달라 그랬더니 그 때부터 보이지 않는 탄압이 들어오더만. 그러다가 갑자가 용역전환 얘기가 들리기 시작하는 거야. 용역이라면 그나마 회사에 소속된 노동자라는 것까지 박탈하겠다는 것 아냐. 이건 안 된다 해서 노조를 만들려고 했지. 집에 갔더니 집에서도 난리가 났더라고. 몸도 불편한 사람이 왜 그러느냐. 그나마 온 가족이 매달려 벌어먹고 사는 건데 그것마저 없어지만 어쩌려고 그러냐. 그 당시 회사에서 ‘용역에 동의하지 않으면 바로 자른다. 회사 방침에 의해 어쩔 수 없다’ 그랬거든. 이게 삶의 터전인데 그걸 무기로 해서 말을 하니 응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가 있겠어. 사측에서는 본인들이 동의했다고 하지만은 가족 생계를 담보로 해서 공갈 협박한 거지. 그래 용역이라는 올가미에 우리가 빠져든 거지. 그래도 안 되겠다, 적어도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해서 노조도 만들고 싸움도 하게 된 거지.
‘두 다리도 없는 놈이 회사에서 먹고 살 길 열어줬으면 그거나 하면서 먹고 살지 웬 지랄이냐’ 그럴 때가 가장 부담이야. 내가 이렇게 싸우는 걸 이해 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 똑같은 사람인데... 그래도 이런 사람들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더라구. 서울역 점거하고 있는데 떡을 머리에 이고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가 하루는 김도 안 빠진 뜨끈뜨끈한 떡을 우리한테 딱 가져다 주고 ‘어이고. 먹을 것이나 제대로 먹냐? 먹어라.’ 그러면서 당신이 팔러가는 떡을 덜어주고 가더라고. 내가 그 아줌마 우동 한 그릇 사 드렸거든. ‘나 우동 한 그릇 먹으면 되네. 자네들이 이렇게 싸우니까 못 사는 사람들도 살 수 있는 거네.’ 그러는데 가슴이 찡하더라고. 그래서 우리들의 싸움이 우리들만의 싸움은 아니구나. 전체를 위한 싸움이구나.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서 우리가 싸우고 있구나 싶었지.
철도매점노조는 철도노조와 철도공사의 중재로 34명의 해고자 전원 복직, 손배가압류 철회 및 민/형사 소송 취하 등을 주 골자로 하는 합의안을 도출하였다. 그러나 매점 재고실사라는 미명 하에 부족금 수백만원을 당장 입금시키지 않으면 재계약을 할 수 없다는 사측의 또다른 탄압이 시작되었다. 싸움은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