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4월/칼럼] 전망은 현실 안에 있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슨 감정일까 의아했다. 비정규 노동법 개악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하던 날, 나는 국회 앞 집회대오에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다른 회의에 들어가 있었다. 몇 달 전이었다면 그 회의를 때려치우고 일단 국회 앞에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이 다 빠져서 그랬을까? 아니면 달려가 봐야 소용 없을 것이라는 자조감이었을까? 아니면 계속 통과시킨다 아니다를 반복해온 사태로 인해 무감각해진 것이었을까? 다시 생각해보면 가기 싫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곳에 가서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지, 이 상황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다시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아직 우리 민주노조운동 진영의 많은 이들이 ‘비정규직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른다. 물론 비정규직이 되어서도 숨을 죽이고 살면, 그저 주는 대로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살아가기만 하고 버티기만 하면 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생존 때문에 고민하고, 재계약 때문에 고민할 때마다 불끈불끈 솟는 마음의 감정을 잘 다스리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이 ‘노동자’임을 깨닫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을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 비정규직이라는 이 굴레가 얼마나 무겁고 억압적인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 GM대우 창원 비정규지회 동지들의 노조 사무실과 그 앞의 천막이 침탈당하고 지회 동지들은 차에 실려서 공장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들은 공장의 높다란 굴뚝 위에 올라가 ‘요구안이 관철될 때까지 내려오지 않겠다’는 세 명 간부들의 고공농성을 지원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 이 동지들이 공장 밖으로 밀려나고 굴뚝에는 세 동지만 덩그마니 남았을 것이다. 그 공장 넓은 곳 어디에도 그 동지들 자리 하나 없어 그렇게 굴뚝 위에 올라가 주먹 쥐고 있다.
집안의 기대를 받는 아들들인 이들이, 일을 하면서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고 일했을 이들이, 결혼도 하고 자기 인생의 전망을 새롭게 세우기를 꿈꾸었을 이들이, 불법파견의 희생자가 되어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하고, 차별받으면서 살아왔던 삶을 넘어서고자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폭력 앞에 내몰리고 있는데, 그런데 ‘비정규직이 된다는 것’이 그렇게 가벼운 일이란 말인가?

정부의 노동법 개악은 이런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법이다. 삶의 가치와 자부심과 전망을 깡그리 버리고 정말로 노예처럼 생각 없이 살아가거나, 아니면 문제의식을 갖고 들고 일어서려면 두들겨 맞고, 쫓겨나고, 구속되고, 손해배상 당하라고 하는 법이다. 기간제 사유제한을 받지 않고, 2년 동안 자유롭게 이런 비정규직을 쓰겠다고 한다. 2년이 지나면 자유롭게 짜르고 다른 노동자 새로 고용하면 된다고 한다. 파견제 노동자들 많이 만들겠다고 한다. 지금 26개 업종으로도 모자라서 더 늘리겠다고 한다. 역시 2년에 한 번씩 두해살이 신세가 되어 이 회사 저 회사 떠돌아다니라 한다. 노동조합 활동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 한다.
그런데 노동부에서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2년이 지나면 짤리는 것이 아니라 정규직화하는 것이라고. 물론 그 입으로 또 이야기하기는 한다. 계약직의 사용사유를 제한하라고 노동계가 요구하고 있지만 그렇게 되면 노동시장의 충격이 너무 커서 안 된다고 말이다. 한 입으로 모순된 소리를 지껄인다.
그렇지만 우린 안다. 벌써부터 장기계약직들을 정규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대량해고가 시작되고 있다. 10년이 넘게 일하던 계약직을 해고해놓고, 이것을 부당해고로 인정하면 은행권에서 장기계약직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기업에 부담이 되니 부당해고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뻔뻔하게 하는 제일은행에서부터, 학교 영양사들을 장기계약을 해왔다는 이유로 해고하고, 장기계약을 해왔던 기간제 교사에게 3개월짜리 계약서를 들이미는 공공부문의 상태를 생각해보라.
10년이 넘도록 일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가 파견노동자로 전환한 후 2년이 되기 한 달 전에 노란 해고봉투를 받아야 했던 방송사 비정규노조 동지들, 이 회사 저 회사로 팔려다니고 큰 소리 한 번 못치고 눈치 보며, 고용과 노동조건에 아무런 책임을 질 능력이 없는 파견회사에 또박또박 임금을 떼이면서도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던 파견노동자들의 삶을 이제는 더 많은 노동자들이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월차를 쓰겠다고 했다가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난자당하고, 노조 만들었다고 해고당한 불법파견 노동자들을 생각해보라. 분명히 노동자는 불법파견의 희생자인데, 불법파견을 저지른 원청회사는 오히려 간부들을 납치하고 미행하고 사사건건 경비대의 폭력으로 노동자들을 멍들게 하고 길거리로 내모는 이 사실을 들여다봐야 한다.

이러한 비정규직을 늘리겠다고 하면서도 비정규직 ‘보호’법안이라는 알량한 이름을 쓸 수 있는 그 배짱이 나는 무섭다. 한 인간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고용이라는 목줄로 사람을 옭아매어 끌고다니면서도 웃으면서 ‘합리적인 결정’ 운운할 수 있는 이 야비함이 나는 슬프다. 비정규직은 책상 머리에 있는 이름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인데도, 도대체 그 실체가 뭔지 알 수 없는 ‘국가경쟁력’이니 ‘노동시장 충격’이니 운운하며 비정규직 양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삶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무엇을 고민하는 것일까?
물론 그들은 주장한다. ‘차별시정 조치’를 취한다고. 정규직과 조금이라도 업무의 내용이 다르면 차별로 인정조차 받지 못할 그런 조항 하나 만들어놓고 생색을 낸다. 이제 비정규직의 업무를 점점 분리시키고 있어서 그 어떤 노동자도 ‘합리적 차별’을 설명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어떤 비정규 노동자 개인이 차별이라고 회사를 고소할 수 있으랴. ‘고용’이라는 목줄에 매어 있는데 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차별을 조금이라도 고쳐달라고 애원했는가? 그러지 않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오히려 우리가 노동조합을 만들고 우리가 투쟁해서 차별을 없애겠다고 했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그러한 노동조합을 인정하지도 않고, 철저하게 탄압을 해도 눈 감고 나몰라라 하고, 법적으로 하자가 없으니 모르겠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선심 쓰는 것처럼 차별을 없애겠다고 한다. 차별은 노동자들의 힘으로 없애는 것이다. 우리의 투쟁을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다. 선심 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기본권을 그렇게 목 놓아 주장했던 것이다.

사실 투쟁이 제대로 벌어지지 않았다. 정규직 노동자들도 한편으로는 고용불안에 떨고 있으므로 비정규직이 방패막이가 되어주길 바라는 심정으로 두 눈 질끈 감고 있을 수도 있다. 또는 단협으로 일단은 보장을 받을 수 있으니까 조금 더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투쟁에 힘이 모아지지 않고 마치 이것이 비정규직들만의 법인 양 왜곡되었다. 그래서 국회 앞에는 몇 개의 천막이 세워져 있지만 이것이 투쟁의 구심으로 자리잡지는 못했다. 여전히 대중들은 침묵했다.
프랑스에서는 ‘최초고용계약’이 입법화되자 수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지만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아직 목소리를 높이지 못한다. 그것은 투쟁의 전망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파묻혀서 열심히 공부해서 바늘구멍과 같은 정규직 취업자리를 얻어보고자 노력한다. 대다수는 희망을 잃은 채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한다.
그래서 민주노조운동 진영의 어떤 이들은, 우리가 양보안을 내고 교섭에서 조금이라도 더 따내는 것이 유리하지 않겠냐고도 했다. 하지만 어떤 것을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한 부류의 노동자들에게 별로 필요하지도 않고 실효도 없는 몇 가지 보호조치들을 따내는 대신, 특정한 부류의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의 나락으로 내모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그 누구도 자신이 실제로 책임지지 못하는 다른 이들의 삶을 놓고 흥정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 노동자들의 요구를 나의 요구로 간주하며 투쟁하는 것뿐이다. 그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현실성’이다.
그래서 설령 노동법 개악이 통과되더라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폐기투쟁을 할 것이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국회 앞으로 달려가지 않았지만 그런 모습을 반성하고, 다시 현실로부터, 이런 비정규직 동지들의 고통과 투쟁으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투쟁의 전망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을 만드는 것은 우리이다. 지금도 창원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GM대우 창원공장 비정규 지회간부가 바로 전망이다. 지금 당장 이길 수 없다고 하더라도 굴복하지 않는 정신, 비록 깨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또 새롭게 투쟁을 만드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현실, 이것은 너무나 더디고 무모해보이고 고집불통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유연한 타협도 모르는 바보 같은 이들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노동운동의 역사는 바로 그런 이들이 발전시켜왔고, 그렇게 지켜왔다. 그리고 투쟁의 전망을 만들고 투쟁의 폭발력을 만든 것도 다 그런 이들이었다. 그래서 그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이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길에 바로 희망이 있음을 역사가 가르쳐 주기에.
덧붙이는 말

김혜진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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