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한미FTA 저지 싸움을 본격적으로 제안하고 나선 곳은 문화연대였다. 다른 운동단체들도 관심을 안 갖고 있었던 건 아니다. 한칠레FTA, 한일FTA 등 자유무역협정 추진 소식이 들리면 누구 할 것 없이 긴장했고 저항에 나섰던 터였다.
그렇지만 문화연대가 2월 17일 가진 총회에서 '21세기 한미경제안보합방 한미FTA 저지 투쟁결의문'을 총회 참가자 특별 결의로 채택한 건 다소 뜻밖의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태가 엄중하다는 인식이 본격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한편 한국 정부는 한미FTA 협상에서 무슨 내용을 다루는 지, 어떻게 다루는 지 일체 노코멘트 했다. 한미FTA 협상 추진에 대해 활동가들이 실눈을 뜨고 살폈지만 국내에서 한미FTA와 관련한 정보를 얻을 방법은 없었다. 결국 미 무역대표부(USTR)가 미 의회에 보고한 내용과 미의회조사국(CRS)이 제출한 보고서 등을 입수하면서 한미FTA 협상 내용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2월 20일 제출된 USTR의 보고서 '한미FTA 자유무역협정 : 미국과 한국, 경제적 그리고 전략적인 이익'은 미국이 한국과 FTA를 체결할 경우 한국은 15년 이내 미국의 가장 큰 자유무역협정의 파트너가 될 것이라는 결론을 담고 있다. USTR이 3월 31일 발표한 '2006년도 국별 무역장벽 보고서(NTE : National Trade Estimate Report on Foreign Trade Barriers)'를 통해 한미FTA 협상에서 다루어질 내용을 확인했다.
엄청난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 땅의 인민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걸 다 다룬다고 보면 된다. 정신과 영혼까지 내다판다고 표현한 사람도 있는데 틀린 말이 아니다.
이 때까지도 정부와 협상단, 자본, 언론은 굳게 함구했다. 한미FTA 문제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 4월 들어서니까 불과 한 달밖에 안 되었다. 2월 2일 공청회가 무산되고, 2월 3일 한미FTA 협상 개시 공식발표가 있을 때조차, USTR의 보고서 내용이 인터넷언론에 의해 알려졌을 때조차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더욱이 교수학술단체, 시청각미디어, 문화예술, 보건의료, 농축산, 지적재산권, 금융, 학생 등 10여 개 부문분야별 공대위가 구성되고, 3월 28일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가 구성되기에 이르렀지만 이때까지도 한미FTA는 찻잔 속에 태풍이었다. 언론이 안 다루니까 당췌 알려지지가 않았다. 소량을 다루긴 했지만 그조차 앵무새, 붕어빵 마냥 누군가 던져주는 대로 상투적으로 보도한 게 전부였다.
3월 30일 이런 사태에 화가 난 시청각미디어공대위는 성명을 내고 방송3사를 향해 △지금의 이러한 반민중적, 친미-친정부-친자본적 방송사들을 누가 만들고 있는가? △소위 말하는 개혁적인 인사들이 KBS와 MBC의 사장직을 차지하고 앉아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자문해 본적은 있는가? △'지금-한국이라는 이땅에서' 왜 FTA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운가? 도대체 무엇이 은폐되고 있으며, 그 은폐의 배경은 무엇인가? 라고 묻기까지 하였다.
4월 초, 정태인 전 비서관이 '졸속협상'등을 들어 한미FTA 반대 발언에 나서고, 조선일보가 이를 특필하면서 파장이 커지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4월 15일 여러 부문분야에서 제1차 범국민대회를 준비하면서 한미FTA 이야기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정부도 미디어도 더 이상 나몰라라 생까는 태도로 버티긴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공세를 취한답시고 몇 가지 논리를 들고 나왔다.
첫째가 쇄국 비판 논리이다. 쇄국으로 흥한 사례가 하나도 없다고 떠들었다. 저지 측이 주장하는 것이 쇄국논리라고 덮어씌우고, 쇄국하면 망한다는 억지 주장을 폈다. 둘째는 저지 주장을 교란하는 논리이다. 쌀은 제외하겠다, 의료와 교육은 협상 대상이 안되도록 하겠다며 물타기에 나섰다. 셋째는 종속논리 비판이다. 개방이 경제종속을 가져온다는 것은 과거 운동권이나 하는 주장이며, 종속이론으로 한미FTA를 바라보면 안 된다고 역공을 폈다. 넷째는 교섭 전략론이다. 한국 측은 교섭 전략을 충분히 연구해왔고, 교섭 과정에서 마지노선이 무너지면 철수할 것이고, 또 시한에 쫓겨 무리한 타결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발언들은 4월 15일 제1차 범국민대회를 전후한 시기 한덕수, 이백만, 김종훈, 김현종, 한명숙, 노무현 등 한미FTA 협상과 관련된 최고위급의 입을 빌어 터져나왔다.
이윽고 4월 18일 워싱턴에서 열린 2차 실무협의에서 한미 협상대표단 양측은 17개 분야를 협상 대상 분과로 확정했다. 17개 협상분과는 상품교역과 농업, 섬유, 원산지 및 통관, 무역구제, SPS(위생 검역), TBT(기술장벽), 서비스, 금융서비스, 통신 및 전자상거래, 투자, 정부조달, 경쟁, 지적재산권, 노동, 환경, 분쟁해결·투명성·총칙 등이다. 예상대로 다 들어가 있다.
냅두면 2-3주 후인 5월 19일에는 각자의 요구를 담은 협정문 초안을 교환하고, 6월 5일부터 1차, 7월 10일부터 2차 본협상을 진행한다. 최종합의문은 협상이 타결되자마자 즉시 공개하지만 그 외의 모든 협상문서들은 3년 간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특별히 저지하지 않고 가만 냅두면 각 분과별로 주고받는 협상을 통해 이르면 올해 말, 늦어도 내년 초중반에 성공적인(!) 한미FTA 협상이 타결된다는 이야기다.
4월 24일 국회의원모임이 주최한 '한미FTA토론회'에는 김종훈 한미FTA협상 수석대표, 이경태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원장, 이해영 한신대 교수, 정태인 전 보좌관 등이 참여해서 찬반 경합을 벌였다. 이경태 원장은 반대 논리를 조목조목 짚어가며 한미FTA의 정당성을 설파했고, 김종훈 수석대표는 한미FTA 협상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다분히 공세적이었다. 밀어붙일 테니 할 테면 해보라는 태도였다. 물론 토론회 분위기가 일방적이지만은 않았다. 국책연구원인 KIEP가 발표한 보고서가 조작이라는 지적, 4대 선결과제(영화, 쌀, 쇠고기, 의약)를 정부가 자진 해제한 것인지 여부 등 여러 쟁점이 불거졌다. 찬반 논란이 전국민적인 수준으로 확대될 것을 예고하는 토론회였다. 아닌게 아니라 26일에는 국정홍보처가 한미FTA 대국민 홍보에 무려 38억 원의 돈을 쏟아 붓는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한미FTA에 대해 다양한 부문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밀어붙이는 이유는 뭘까. 간단하다. 한미FTA가 독점자본과 한미동맹세력에게 무한한 이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이게 핵심이다.
그러니까 노무현 대통령이나 김종훈 수석대표나 이런 사람들이 경우를 몰라서, 생각이 없어서 한미FTA를 강행하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독점자본의 요구와 한미동맹세력의 결집을 꾀하기 위해 주도면밀한 작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계급적으로 냉철하게 보고, 토론하고, 대중적으로 소통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
한미FTA는 협상이다. 한국과 미국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자본 이동을 놓고 벌이는 협상이다. 그래서 현장에서 이런 싸움을 벌이는 게 익숙한 건 아니다. 구조조정 저지투쟁이나 노동강도 강화 저지 투쟁처럼 공단이나 노동부 같은 정부 부처나 개별 자본을 직접 대상으로 하는 싸움과 결이 다른 게 사실이다.
이 싸움은 1차적으로는 국민적 힘을 결집해서 협상을 저지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독점자본과 한미동맹세력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력에게 정치적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동시에 자유무역협정이 아니라 동아시아 민중무역협정의 전망을 구체화하는 싸움이다. 말하자면 노동자 민중의 삶을 유린하는 요소를 제거하고, 우리 사회구성원의 평등과 평화의 전망을 그려내는 총체적인 싸움인 것이다.
저지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박빙이다. 정부와 자본이 워낙 우격다짐인 데다, 절차민주주의조차 파괴하며 치닫고 있어 곳곳에 약점 투성이라 해볼 만 하다. 그러나 상대는 막강한 자본력, 정보력, 미디어의 힘을 기반으로 국면을 요리하고 있어 결코 만만치 않다.
범국본 등 한미FTA를 저지하기 위해 결집한 주체들은 어떤가. 협상을 저지하자는 의지는 충만하지만 싸움의 구체적인 전략전술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니까 이 싸움은 올해 내내 가는 싸움이고, 현재로서는 누가 이길지 예단하기 어렵다. 이 싸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한미FTA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될 노동자가 나서야 하는데, 노동운동은 아직 한미FTA 저지 싸움에 올인할 준비가 미흡해보인다. 이 점이 관건이 아닌가 싶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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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주 / 민중언론 참세상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