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06/6월/특집2] 작업중지권과 노동자장을 복원하자

- 작업중지권과 노동자장을 복원하자-





사다리와 문지방의 경고


‘사다리 밑을 지나가면 재수가 없다’, ‘문지방에 서면 복이 나간다’ 는 옛말이 있다. ‘문지방’은 어린 시절 어머니로 부터 들었고, ‘사다리’는 중학교 영어 시간에 들은 듯하다. 왠 문지방, 사다리 타령이냐고? 오래전 어느 날 문득 두 격언(?)이 재수와 복을 핑계로 위험에 대한 경고를 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다리가 무너지거나, 사다리 위에서 뭐가 떨어질지 모르고, 문지방에(예전 한옥은 문지방이 어린 아이에게는 상당히 높았다) 걸려 넘어지거나, 문지방에 서 놀다가 발목을 삘 수도 있 수 도 있느니, 이를 아예 예방하는 차원에서 그런 행위를 차단하려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라.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이런 상식, ‘위험하면 미리 피하고, 미리 필할 수 없으면 위험을 중지시키거나, 소멸시켜야 하는 것’, 표면적으로나마 사회적으로 지지되고, 권장되는 이런 행위가 유독 작업현장에서는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설혹 작업현장에서 ‘사다리와 문지방’의 경고가 있더라도 이 것 역시 자본이 정한 것 외에 다른 ‘사다리와 문지방’에 대해서는 노동자가 선택할 수 없다. 대부분에 작업장에서는 ‘사다리와 문지방’에 대한서 회피하고, 중지할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이 사실상 없다.



잠자는 작업중지권


작업중지는 산업안전법에 규정되어있다. 90년 개정시 도입된 규정되었고, 이후 95년, 96년 개정으로 현재의 제26조의 내용이 되었다. 요약하면 ‘급박한 위험이 있을 경우 즉각 대피하고 이를 보고하고, 이에 상급자는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하고, 이로 인해 해당노동자를 불이익을 받지 않고, 중대재해일 경우 노동부는 원인 분석 및 안전조치 감독을 해야 한다’ 현행 26조의 규정은 무엇이 급박한 위험인지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작업의 특수성과 개별 노동자의 주객관적 판단이 급박한 위험의 기준이 되어야지 그것을 명문으로 규정하는 것은 오히려 규정을 사문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규정은 엄밀하게 말하면 올곧게 작업중지‘권’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엄밀하게 말하면 해당노동자는 대피하고 보고할 뿐, 적절한 조치에 대한 즉각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적절한 조치는 자본의 몫이고 적절한 조치가 있다면 다시 작업에 복귀해야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울해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애초에 산업안전보건법이 사용자 의무 법이지, 노동자 권리법은 아니니 말이다. 문제는 이러 것을 어떻게 활용하고 확장할 것에 달려 있으니 말이다.

어찌되었든 기간의 노동(노조)운동의 노력으로 작업중지의 조항은 지금의 꼴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법 도입 및 개정 당시 사용자단체는 ‘일상적 파업권’을 주는 것이라 엄살을 부렸건만 정작 일상적 파업은 흔치 않았으며, 더구나 98년 이후 신자유주의 철학과 논리가 현장에 만연한 이후 98년부터 2002년까지 충격적 구조조정(대량해고를 중심으로 하는)을 거치고 2003년 일상적 구조조정(비정규직의 일반화, 생산양식의 경쟁체계 도입, 외주, 하청의 일반화)시기에 접어들면서 몇몇 금속사업장을 제외하고는 그 에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불안정한 고용, 경쟁적 고용 시스템은 위험을 감수하게하고, 불 건강을 숙명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고 있고, 자본의 철학을 통해 노동자 스스로 이것을 합리화하고 있다. 최근에 더욱 더 일상적 노동(노조)운동을 누구나 누누이 강조하면서도 작업장의 일상이 생산과 생산 환경, 이것의 작용과 반작용일진데 이것에 대한 전술이 없다. 애써 외면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모르는 것인지...



위험은 무엇인가


노동자에게 ‘급박한 위험’은 무엇인가? 당장 가스에 질식하고, 추락하고, 폭발을 목전에 두어야 하는 것인가. 작업현장에서 자본이 지정한 ‘사다리와 문지방’은 여하 간에 이윤과 맞닿아있다. 위험이 이윤에 영향을 미치는 한에서 대피하고, 중지하고, 조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인간적이지만 당연한 것으로 자본의 목적이 이윤인바 이를 저버린다면 이것은 자본이 이미 아니다. 노동자에게 위험은 오늘과 같은 노동력을 내일도 보존할 수 없을 때이다. 이것도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노동자의 유일한 밥벌이 수단은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것인데 노동력의 양이나 질을 유지하지 않으면 노동시장에서 밀려나게 마련이고, 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유지증진 시키지 못하는 것, 또는 노동력 퇴화를 정상 이상으로 촉진시키는 것이 위험 요소인 것이다. 따라서 위험은 애초에 자본과 노동의 입장에서는 다른 수밖에 없고, 자본이 정해둔 ‘위험’은 노동자의 ‘위험’과 한편 교차할 수 있으나 전부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나 보이는 위험 즉 폭발, 추락, 질식, 협착 등 아니라 일상적으로 노동자 삶과 생명을 갉아먹는 잘 보이지 않은 위험 즉 강화되는 노동강도에 대해서 그 이해가 첨예할 수밖에 없다. 이는 자본에게 있어서는 불가피한 것이겠지만 노동자에게는 피해야하는 위험인 것이다.

결국 노동자에게 있어서의 위험이란 당장 눈에 보이는 위험 뿐 아니라 노동력을 필요이상으로 소진하여 내일을 위협하는 모든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와 생존권과 긴밀하게 맞닿아있다. 그러니까 작업을 중지해야 하는 급박한 위험은 노동자의 위치에서 보자면 광범위한 것이고, 실제 광범위해져야만 안전하고 건강한 작업환경, 노동환경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적절한 조치 역시 이것을 기준으로 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입장에서의 위험과 안전은 고사하고 여하간의 작업중지가 모두 어려운 것인가? 권리라고 하기에는 왜 현실은 왜 이리 초라한 것인가?



왜 복원인가!!


현장의 노동안전보건의 문제는 전체 운동의 방향과 힘에서 한 치도 떨어져 있지 않다. 현장에서의 일상적인 권리 실현이 여의치 않다는 것은 그만큼 전체적인 전선이 자본에게 밀려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전선은 밀려있는 것일까. 두말하면 잔소리겠지만 자본은 고용을 무기로 일상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장 이전의 협박, 노동불안정을 통한 비정규직의 양산, 핵심 부분을 제외한 외주, 용역화, 자본의 잦은 이합집산 등은 노동자의 일상을 불안하게 하고, 몰두할 수 없게 만든다. 그렇다면 전선의 진일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도 당연히 빼앗긴 일상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전국전선의 씨앗이 없는데 무엇으로 투쟁의 성과를 수확할 것인가 말이다. 작업중지권을 복원하자는 것은 작업중지 규정을 신설하고 복원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장으로부터 시작하는 운동의 방식과 노선을 복원하자는 것이다. 이미 일상화된 불안정된 노동환경을 극복하는 것은 비정규직을 철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불안정화된 작업장 내에서 노자의 분란과 자기실현이 일상화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특히 집단적 작업 환경의 변화(생산량, 생산방식, 생산조직 등)에 따른 노동자의 고통을 드러내고 이것을 토대로 재 조직화 하는 작업중지권을 요구하고 주장했던 그 전략과 전술이 복원되어야 한다. 즉 작업중지권의 법규정을 학습하는 것은 교양 수준일 뿐 진정 작업중지권에 이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현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노동(노조)운동의 전략, 전술의 복구/복원인 것이다.



분명 대피하고 중지만 할 일만은 아니다


대피하고 중지만 한다고 해서 물론 정담은 아니다. 결국 위험을 작업의 환경으로 제거하고 환경자체를 재조정해야 한다. 현재의 작업환경은 대피하고 중지한들 다시 그것이 반복될 경우는 대단히 높다. 특히 노동강도와 관련된 작업조직과 방식은 각종 관련된 질병을 계속 양산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이윤 욕구가 엄존하는 한 좀처럼 개선될 수 없다. 현장에서의 노동자 스스로의 자기 통제력을 확장시키는 것 외는 방법이 없다. 그런데 축소된 현장통제력이 순식간에 확장될 리가 만무하다. 그렇다면 자본의 전술을 채택해보자. 자본은 조금씩 갉아먹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삼켜버린다. 조금의 양보, 조금의 이해, 조금의 후퇴를 호소하고, 애원하고, 협박하면서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종국에는 모든 것을 내어 놓으라 한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 현장에는 급박한 위험이 수없이 많다. 금속현장 뿐 아니라 모든 사업장에 급박한 위험은 산재해 있다. 당장 현장의 힘과 정서에 따라 위험에 대한 불만과 불안을 모아 아주 작은 부분부터 작업을 중지하고 거부해 보자. 정말 눈치도 채기 어려울 정도의 자본의 양보와 이해 그리고 후퇴를 호소하고, 협박해보자. 경험을 현장에서 쌓아 나가보자, 우리의 것을 한꺼번에 되찾기 위해 조금씩이라도 갉아먹어보자. 분명 대피하고 중지할 일만은 아니기에 노동자의 현장 통제력을 확보해나가는 방향을 설정하고 복구하고 복원해보자.
덧붙이는 말

김재광 / 한노보연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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