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매섭게 부는 겨울날이면 생각나는 게 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갓 쪄낸 호빵? 물론 호빵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는 하지만, 호빵과 함께 먹을 따뜻한 물에 중탕된 유리병에 담긴 베지밀이 같이 떠오른다. 필자 개인의 취향일 뿐이라구? 쳇, 그럼 어쩔 수 없고...
하여간 필자가 편애하는 베지밀이 만들어지는 공장에 간다는 사실에 은근히 마음이 설레었다. 좋아하는 베지밀의 제조 과정을 볼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고, 화학섬유연맹산하 사업장 중에서 그리고 충북지역에서도 몇 안 되는 근골격계 사업의 경험이 있는 사업장이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또 한번 대규모의 비가 예고되던 저녁, 청주의 정식품 공장을 찾았다. 빨간 벽돌담 옆에 택시가 나를 내려줄 때 깨끗하게 정리 잘된 정원에 화들짝 놀랐다. ‘먼지 날리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금속사업장들과는 사뭇 입구 분위기부터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조용한 공장 앞 정원을 타박타박 걸어 조합사무실에 도착해 김준연 사무국장 동지를 만났다. 담당자인 산안부장 동지가 산재로 병원에 있기 때문이었다. 담당자가 아니라 이야기하기가 어려웠지만 동지들의 고민을 읽으려고 애를 써 보았다.
고용안정이 최우선이죠.
얼마전에 끝났다는 임단협 얘기부터 시작했다. ‘올해 최고의 쟁점이 무엇이냐?’는 내 질문에 ‘고용안정’이라고 짧게 대답하신다. 매출이 안 좋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고용안정에 대한 문제가 핵심이었다고 한다. 고용안정을 최선으로 하고 향후 해고시에는 조합과 합의하는 것을 이번 단협에서 땄다고 한다. ‘협의’로 되어 있는 것을 ‘합의’로 바꾼 것이다.
정식품 노동조합은 민주노조로 전환된 지 이제 10년차다. 전부 다해서 255명인 조합원 외에 약 30명의 비정규직 용역직이 들어와 있다고 한다. 다른 사업장에서는 보통 외주로 되어 있고, 그래서 최근 CJ 급식사태와 같은 것이 생기는데 반해, 여기는 식당에 계신 아주머니들도 모두 조합원이라고 한다. ‘먹는 건데 그러면 안 되지’라고 대답하신다. 역시 먹거리를 만드는 회사라서 인식들도 다른가 싶다.
현재 산안부장님은 산재로 나가 계신다. 7년째 산안부장을 하셨던 산안부장님은 어깨 수술을 받고 현재 산재치료 중이라고 한다. 지역에서는 활동 잘하고 여기저기 교육에 불려 다니기까지 하는 능력 있는 동지로 정평이 나 있다. 이러던 산안부장 동지가 입원을 하면서 부위원장님이 지금 업무를 대행을 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올해 조합 내 산안활동은 일상 업무 외에는 사실 정지 상태에 있다고 얘기하신다. 사무국장님은 산안사업에 대해 자세히 모르신다며 난처한 표정을 지으신다. 조합 간부 세대교체를 하면서 부서별 사업계획도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한다.
산안부에서는 1시간 교육시간을 임단협 요구안에 넣어줄 것을 요청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합에서는 그 요구안을 받아주지 못했다. 그 정도가 지금의 현실이다. 사실 산업안전보건위원회의 운영과 같은 요구안도 올해 단협에 처음 넣은 상황이라니 ‘할 일이 엄청 많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단협을 살펴보니 산업안전보건위원회와 건강검진, 작업환경측정, 안전교육과 같은 법적 기본사항이 이제야 단협에 올라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조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갈 길이 참 멀다. 어디나 참으로 녹녹치 않은 상황이다. 금속만 살짝 벗어나면(물론, 금속도 제대로 하는데는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전국에 노안 사업을 제대로 체계적으로 더군다나 원칙적으로 하는데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연구소가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그리고 만나야할 동지들이 정말 많음을 다시 한번 새긴다.
부족한 인식 속에 지속되는 구조조정
그나마 정식품이 산안사업을 조합원들에게 인식시킨 것은 근골격계 사업부터이다. 하지만 2004년 말부터 시작된 근골격계 사업 이후에는 산안 사업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근골격계 사업은 원진녹색병원에서 검진을 받는 것을 중심으로 했다. 하지만 이 사업을 통해 요양을 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요양을 받는 것이 쉽지 않고 조합원들의 산재에 대한 인식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년 조합 사업 중 꽤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사업이었는데 그 내용이 잘 공유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업장에서 다치는 것을 포함해서 산재로 나간 사람이 3명밖에 없다고 한다.
이 와중에 정식품은 약 3-4년 전부터 급격한 자동화가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성별 분포도 여성에서 남성으로 많이 바뀌어왔다. 자동화가 되면서 인력을 축소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파업으로 이를 막았고, 전환배치 등 노동조직 유연화 시도도 막았다. 지금은 자동화가 되었지만 인원 수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기본 근무형태는 3조 3교대라고 한다. 야간근무자는 저녁 6시에 출근해서 아침 6시에 퇴근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자동화가 되었는데 인력을 줄이는 것을 막았으니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측에서는 교대제를 2교대로 바꾸자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생활임금 보전에 대한 문제와 인력에 대한 문제가 있어 합의가 안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조합원의 평균 연령이 43세에 이르고 있다는 현실이다. 고용안정에 합의하기는 했지만 5-8년만 있으면 정년퇴임하는 조합원들이 절대 다수가 될 예정이다. 이후의 인원감소에 대한 대책이 없는 것이 지금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측은 절대로 인원 충원을 안 하려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몇년 후 정식품에 남아있는 조합원들은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고용안정에 합의했다고 하지만, 자본 입장에서는 어차피 자연감소가 있으니 무리할 필요가 없었던 건 아닐까? 이런 상황이 되면 결국 교대제 문제와 맞물려 노동강도 강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뒷풀이 자리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중요한 것은 예측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자본의 노동유연화와 이윤율을 위한 일상적 구조조정은 이미 꾸준히 진행되고 있고, 조합이 잠깐의 틈을 보이면 확실하게 현장을 잠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지금 한국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편한 사업장’이라고, ‘일단 싸우면 잘 싸운다’고 사무국장님은 이야기하시지만 지금의 상황은 사실 태풍 전의 고요가 아닐까 싶었다. 현장 상황과 조직력이 지역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좋다고는 하지만, 인원 자연감소에 대한 대안을 만들지 못하면 앞으로의 노동조건 악화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닐까? 일상적 구조조정이 쉬지 않고 진행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 및 평가, 그리고 앞으로의 투쟁에 대한 진지한 준비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보니 혼자였던 것 같아요.
사무국장님과의 간략한 인터뷰를 마치고 뒷풀이 자리로 향했다. 산재요양 중인 산안부장님을 모셔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만나서 이야기를 좀 들었으면 좋겠다고 전화통화를 하는데 ‘나와 보니 혼자였다’고 이야기를 하신다. 그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어 억지로 나오시라 떼를 썼다. 그렇게 뒷풀이는 이어졌다. 사무국장님의 아내와 아이들까지 동반한 뒷풀이에서는 많은 토론과 이야기가 오갔다.
산안부장님은 -많은 조합의 산안부장님들이 그러하듯- 조합의 다른 간부들이 많이 도와주지 않는 것이 섭섭하신 모양이었다. 본인이 산재를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그리고 (지역내에서 지명도를 얻다보니) 지역에서 발생한 다종다기한 문제들에 대한 상담을 여전히 하고 계신다고 한다. 혼자 7년여를 해오는 사이, 많이 지치고 외로우셨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이면 안 되지 않겠냐며 토론을 시작했다. 현장의 활동체계를 만드는 것과 간부들의 교육을 시작하는 것부터 시작해보자고 제안을 드렸다. 쉽게 동의를 못하신다. 그만큼... 어려운 시간이 길었던 건 아닐까 짐작해본다.
노안활동은 ‘계급’만 알면 된다.
뒷풀이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진행하는 사이 산안부장 동지가 꼭 인터뷰에 써 달라고 하신 말씀이다. 노안활동이 정파의 흐름에 묻혀가면서 그 본질이 흐려지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된다는 것이다. 지역에서 함께 할 수 있는 투쟁의 흐름을 만들기 어렵다는 문제인식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지역의 노안간부들의 활동은 이렇게 개별화되어있고 외롭다. 그래서 노안간부들이 수련회를 가면 밤새 이런저런 어려움과 조합간부들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하며 밤을 지새우고 서로의 어려움을 공유하는 사이에 끈끈함이 더해진다. 노안간부들이 농담삼아 하는 얘기 중에 ‘한번 시작하면 발을 빼기 어렵다’거나 ‘한번 보기 시작하면 못 봐도 10년은 본다’고 이야기가 있다. 그 만큼 노안간부는 쉽게 바꾸기도 쉽지 않고 알아야 하는 것도 많은 직책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정식품 산안부장님 말마따나 노안활동의 기본은 ‘계급’을 아는 것이 아닐까? 현장의 이야기를 듣고 노동자들의 인식과 판단으로 재해석하고 그것에 맞게 실천하는 것, 그것이 노안활동의 기본이 아닐까 싶다. ‘산안 간부들은 다 수직이야’라며 ‘타협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사무국장님의 말처럼, 노안활동가들이 수직일 수 있는 것은 ‘계급’이라는 명확한 기준이 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이런저런 내부 상황들과 아쉬움,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밤이 깊어갔다. 현장 조직력 강화와 새로운 활동가 재조직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사무국장 동지와 ‘계급’을 이야기하는 산안부장 동지를 바라보고 있으니 정식품의 앞날에 희망이 보였다. 이런 고민들을 가지고 일상활동 속에서 구조조정을 막아가다 보면, 언젠가 큰 싸움에서도 분명히 승리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처럼 고용불안에 떨거나 남들 다 자는 밤에 일해서 만든 베지밀이 아니라 언젠가는 노동자들이 건강하고 즐겁게 일하면서 만드는 베지밀을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