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 사회의 무지와 편견, 그리고 배제
한미 FTA 3차 협상이 진행되고 있던 9월 9일, 탑골공원 앞에서 의료인, 보건의료노동자, 환자들은 건강은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한미 FTA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참가자들에게 ‘No FTA’라고 적힌 스티커를 나눠주었는데, 실수로 에이즈예방법을 비판하는 스티커를 나눠줬다. ‘No FTA’스티커로 바꿔드렸더니, 무심결에 그 노동자는 “나는 더러운 사람이 아닌데 왜 이걸 주나 의아했다”는 말을 했다. “더러운 사람들이 에이즈에 걸리나요?”라고 반문하자 그 노동자는 바로 “아 미안합니다.”라고 했다.
민주노동당에서 배포한 광우병쇠고기 수입반대를 선전하는 웹자보의 제목은 ‘제2의 에이즈, 광우병’이었다. 또한 11월 22일 민중총궐기가 있던 날 촛불집회에서 한 연사는 한미FTA의 폐해를 비유하는 발언에서 ‘에이즈보다 더 무서운 한미FTA가 몰려온다’라고 표현했다.
에이즈는 의학적으로 수혈과 성 행위를 통해서, 그리고 에이즈에 걸린 산모에서 태아에게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가 감염되어 면역력이 약해지는 질병이다. 일상생활을 통해서는 감염되지 않고, 의학과 치료기술이 발달하여 에이즈치료제를 복용하면 고혈압이나 당뇨병처럼 관리할 수 있는 만성질병이 되었다. 하지만 에이즈는 여전히도 무서운 질병, 뽀뽀만 해도 감염되는 질병으로 남아있다.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은 더러운 사람이고, 에이즈를 퍼트리는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으로 여긴다. 에이즈는 이 사회에서 ‘공포’, ‘물리쳐야할 것’의 대명사다.
이러한 잘못된 정보와 편견으로 인해 에이즈감염인은 직장에서, 병원에서,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정부의 정책에서 차별과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다.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병원에서 진료거부를 당하고, 민간보험은 가입조차 안된다. 감염인의 주민등록번호, 성정체성, 성 행태 등에 관한 정보까지 질병관리본부에 차곡차곡 쌓이고, 이 정보들을 질병관리라는 명목하에 함부로 사용한다. 직장검진에 에이즈가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있어서 그 결과가 노동자가 아닌 사업주에게 전달되어 해고로 이어진다. 에이즈에 감염된 외국인은 한국에 들어올 수 없고, 감염이 확인되면 강제출국 당한다. 심지어 감염인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성행위를 했을 경우 처벌하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다. 공무원이 여러분들의 성행위를 감시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것은 엄청난 인권침해이고, 불가능한 규제이다. 실제 가능하지 않은 이 규정은 감염인을 악의적,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는다.
감염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본질로 하고 있는 ‘에이즈예방법’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는 에이즈에 대한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왜곡된 정보와 오해를 확산시켜왔으며, 에이즈확산의 사회구조적 원인을 은폐한 채 그 책임을 감염인에게 묻고 감염인에 대한 차별과 인권침해를 확산하는 정책으로 일관해왔다. 이 사회와 정부가 에이즈와 감염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틀이 ‘에이즈예방법’이다.
1987년에 제정된 ‘에이즈예방법’은 감염인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성행위를 했을 경우 처벌하게 하는 조항, 감염인을 관리∙감시하게 하는 신고·보고 조항, 외국인과 성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제검진조항 등 감시와 통제를 본질로 하고 있다.
‘에이즈에 걸리면 신세 망친다’, ‘에이즈는 무서운 것’, ‘문란하고 부도덕해서 에이즈에 걸린다’고 겁을 줌으로써, 에이즈에 감염되기 쉬운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는 이들-마약사용자, 성노동자, 동성애자, 흑인, 가난한 이들-에게 돌팔매질함으로써 에이즈를 예방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정부가 이러한 정책을 펼치는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 보건복지부는 에이즈감염인에 대한 일반인의 편견과 차별은 법제도나 정부정책에 기인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 모두가 가지고 있는 ‘자신은 다르다는 차별의식 때문’이라고 여긴다. 에이즈에 걸린 것도 감염인의 잘못이고, 감염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차별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 때문이라는 것이다(에이즈예방법 개정방향 모색토론회. 11,27).
이런 정부의 입장은 에이즈뿐 아니라 질병의 사회적 원인에 대한 고민이 없음을 보여준다.두 번째는 감염인의 인권과 국민의 이익이 반한다고 여긴다. 그들이 말하는 국민의 이익은 일부일처제를 따르는 순결한(문란하지 않은) 대한민국 국민의 성생활이고, 제약회사의 이윤이다. 따라서 한국정부의 화살은 1차적으로 감염인에게 향해있고, 2차적으로는 성노동자,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여성에게 향해있다.
미국에서 최초로 에이즈가 게이에게서 발견되었을 때 ‘게이돌림병’이라고 불렀다. 미국은 일부일처제를 옹호하면서 정상적인(?) 성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게이에게 ‘성적으로 문란하여’ 결국에는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에이즈 발병원인을 규정했다. 게다가 부시대통령은 초국적 제약회사에 이윤을 몰아주는데 에이즈를 악용하고 있고, 금욕과 순결을 에이즈예방이라고 떠들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에이즈 감염인은 예외 없이 사회적 낙인과 차별을 당하고 건강권을 비롯한 인권을 박탈당하고 있다.
에이즈확산의 또다른 주범, 세계화! 한미 FTA!
4000:3800=100:30 말이 안되는 이 등식은 전 세계 에이즈 감염인의 현실이다.
보고서(UNAIDS, 2006)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에이즈 감염인이 40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2600만 명으로 전 세계 에이즈 감염인의 2/3를 차지한다. 아시아에는 830만 명,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150만 명, 라틴아메리카에는 160만 명의 에이즈 감염인이 살고 있다.
그런데 미국이 전체 에이즈 치료제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에이즈 감염인 대다수가 살고 있는 아프리카, 아시아,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약 3800만 명에게 공급되는 에이즈 치료제는 전체 에이즈 치료제 시장의 30%도 안된다는 얘기다. 2005년 한 해 동안 410만 명이 새로 에이즈에 감염되었고, 280만 명이 에이즈로 숨졌다. 하루에 8천명이 에이즈로 사망하고 있는 것이다. 약이 있어도 약을 못 먹기 때문에 죽어가고, 에이즈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더 많은 권한을 제약회사에게 쥐어줄 한미FTA는 에이즈환자에게 생명포기각서나 다름없다.
에이즈는 사회적으로 성차별, 인종차별, 성소수자 차별, 빈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의해 확산되고 있는 전 세계적인 질병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 조건들에 의한 피해가 가장 심각한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서 에이즈 발병률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에이즈 감염율이 높다는 것은 ‘부도덕하고 더러운 이들’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성차별이 심하고 성소수자차별이 심하고, 인종차별이 심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폐해가 그만큼 심하다는 것이다. 에이즈는 단지 질병으로서만 이 사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얼마나 비민주적인지, 빈곤과 차별,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폐해가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감염인, 차별없는 ‘별’을 꿈꾸다
죄인처럼 살아왔던 에이즈감염인들이 감염인의 인권을 지지하는 활동가들과 함께 차별없는 ‘별’을 꿈꾸기 시작했다. 2006년 7월에 ‘에이즈감염인 인권증진을 위한 에이즈예방법 대응 공동행동’을 꾸리고, 에이즈가 확산되는 사회구조적 원인을 알려내기 위해 캠페인, 간담회, 국제에이즈회의 참가 등의 활동을 벌였다.
또한 감염인의 감시와 통제를 본질로 하는, 에이즈확산의 주범 ‘에이즈예방법’을 뜯어 고치기 위해 개정안을 발의했다.
구체적 내용으로 에이즈예방은 모두가 함께 할 일이라고 보고, 에이즈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학교, 직장, 병원에서 이뤄지도록 하고 감염인과 고위험집단들이 에이즈 정책의 수립,집행, 평가의 일 주체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에이즈검사의 익명성 보장, 강제검사의 금지, 감염인의 성행위를 감시하는 조항을 없애는 것이다. 실명, 성정체성, 성행태, 주소 등을 신고, 보고하는 것을 익명보고체계로 바꾸고, 감염인의 노동권과 치료받을 권리가 보장되도록 개정안에 명시하였다.
그리고 ‘세계에이즈의 날’을 ‘감염인 인권의 날’로 만들자는 기조를 가지고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에이즈감염인 인권주간 Positive Rights' 행사를 진행했다. 인권주간동안 ‘한미FTA저지’와 ‘에이즈예방법 전면개정’을 투쟁과제로 선언하였다. 에이즈확산의 주범은 사회적 차별과 한미FTA이며, 차별과 편견을 넘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은 ‘에이즈예방법’의 전면 개정과 한미FTA 중단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HIV/AIDS감염인은 소수가 맞다. 현재 4000명 남짓이다. 그러나 이들이 짊어지고 있는 사회적 문제는 이들 소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혜의 대상, 감시의 대상을 거부하고 차별없는 별을 꿈꾸는 주체로 나선 에이즈 감염인들과 함께 성차별, 인종차별, 성소수자차별, 빈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자.
성 평등과 여성에 초점을 맞춘 정책이 없이는 에이즈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성노동자에게 인권과 노동권을, 마약사용자에게는 깨끗한 주사기공급과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 당장에는 모든 이에게 의약품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해 값싼 복제의약품을 자체적으로 생산하여 무상 공급하도록 해야 한다.
감염인의 인권증진과 신자유주의 세계화반대, 한미FTA중단이 바로 에이즈예방의 길이며, 감염인이 잘 살 수 있는 사회라면 비감염인이야말로 정말 잘 사는 사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