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07/5월/현장의 목소리]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통신의 자유에 대한 위협

나는 간첩도 아니고, 범죄를 저지른 적도 없고, 불륜을 저지르고 있지도 않지만 그래서 거리낄 것이 없음에도, 내 허락을 받지 않은 누군가가 나의 핸드폰을 열어 내 휴대폰의 최근통화목록을 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통신비밀보호법(이하 통비법) 개정안은 이 모든 일을 나 모르게 벌어지게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자유롭게 통신을 할 수 있을까? 통신의 자유가 제약된다는 것은 곧 소통의 자유가 침해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비법은 대체 어떻게 개정되는 것일까?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인터넷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

3월말, 전기통신사업자에게 휴대폰 감청을 할 수 있는 장비를 국가가 지원해주고, 또한 전기통신사업자가 의무적으로 개인의 인터넷 로그기록을 1년간 보관해야한다는 통비법 개정안의 내용은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들을 초긴장 상태로 내몰았다. 로그기록을 보관하지 않은 전기통신사업자는 최대 3000만 원의 과태료를 물게 된다. 이것은 그간 단체들의 서버에 일체 IP기록을 남기지 않는 정책을 취해왔던 진보네트워크센터가,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강제적으로 IP기록을 남겨야 하며, 수사상 필요를 위해 단체의 동의 없이 비밀리에 개인의 인터넷 이용기록을 수사기관에 제공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진보네트워크센터 서버를 이용하는 모든 단체의 회원 또는 조합원의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으로, 노조 파업이나 정치적 의사 표현에 대하여 사측 또는 정부로부터 악용될 수 있는 여지를 높이는 결과를 낳을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진보네트워크센터의 존폐 자체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다.

핸드폰을 감청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 로그기록을 보관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시민들, 기자, 심지어는 이 법과 관련 있는 국회의원들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듯하다. 인터넷 로그기록은 통화 내용을 직접 듣는 것만큼의 많은 사생활을 추적할 수 있는 고유한 개인정보다. 인터넷 로그기록을 들여다보면, 한 사람이 어떤 곳에서, 어떤 컴퓨터로 접속을 해서, 어떤 게시판에 몇 시에 글을 썼고, 어떤 파일을 다운받았으며, 어떤 상대와 채팅을 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보들을 조합하면 더 많은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치명적이며 민감한 개인정보유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터넷 로그기록을 1년간이나 무조건 저장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인터넷상의 사생활이 모조리 저장된다는 얘기다.

2008년, 선거를 앞두고 인터넷에서는 선거 시기 실명제가 실시된다. 그때는 모든 정치적인 의사표시는 실명으로 해야 한다는 소리다. 그것이 통비법 개정안과 만나면, 결국 글을 올린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시간문제 그리고 돈 문제다. 이 상황에서 우린 자유롭게 우리의 의사를 표현할 수가 있을까? 실명과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지고 있던 인터넷마저 자본과 국가의 손에 통제권이 넘어가게 되면, 인터넷에서의 민주주의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게 될까? 아니, 과연 인터넷에 민주주의라는 것이 남아있게 될까?

이 개정안은 국회의원들에게도 위협적일 수 있다.

남들은 벚꽃놀이로 정신없는 봄날, 통비법 개정을 막아내기 위해서 기자회견과 의원실 방문을 위해 여의도에 있는 국회를 방문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통비법이 개정된다면, 누군가가 한 국회의원의 통화기록 혹은 로그기록을 입수해서 정치 생명을 위협할 수 있게 되지도 않을까 하는. “국회의원 K모씨, 포르노 사이트 중독!”이라든가 “P2P를 통한 음란물 다운로드를 즐겨”...뭐 저런 기사가 나오게 되지 않을까. 이 정도로 정치적 생명이 끝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것은 분명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통비법이 개정되는 걸 기필코 막아내야 하는 거 아닌가? 비록 국회의원을 직접 만난 것은 아니고, 보좌관들을 만나 자료를 전달해 주었지만.. 이런 얘기를 국회의원들을 만나서 직접 해주고 싶었다. “통비법 개정, 의원님들에게도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아시나요? 통비법 개정 말고, 2년째 국회에 계류 중인 개인정보 보호법안이나 얼른 통과시켜 주세요, 법사위 의원님들.”

통신비밀보호법이 아니라, 통신비밀‘보관’법이다.

수사를 위해 모든 통신기록을 1년간 보관해야한다고 주장한다면, 범죄에 사용되는 공중전화를 실명 인증 후에 쓰게 하거나, 아예 공중전화를 없애야 한다는 법안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PC방에서 컴퓨터를 쓸 때도,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그런 법안을 누군가가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 통신비밀‘보호’법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쓰고, 모든 국민의 통신기록을 1년이나 보관하게 하는 법이란, 사실 비밀을 노리는 사람들이 탐내는 통신비밀‘보관’법일 뿐이다. 진보네트워크센터를 비롯한 사회단체들이 통과시키려고 애를 써온 개인정보보호법은 제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이렇게 무시무시한 통비법 개정안이 갑자기 법사위를 통과하려고 하니, 한심할 뿐이다.

‘이건 비밀인데...’로 시작하는 얘기들은, 어느새 비밀이 아니듯, 통비법 개정안은 비밀을 위한 것이 아니라, 비밀을 알고 싶어 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며, 비밀을 만들지 못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통제해, 그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하는 자들의 것이다. 내 전화기에 도청장치를, 내 컴퓨터엔 바코드를 달고 싶어 하는 당신들 손에 나의 소통의 자유를 넘겨주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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