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07/6월/이러쿵저러쿵] 우화와 동화

어릴적 나는 참 열심스러운 독서가였습니다. 조그만 시골동네 초등학교를 다녔던지라(그 학교는 15년 전엔가 분교가 되었다가 10년 전에는 폐교가 되었다고 하더만요, 그리고 그자리에는 뭘 최종산물로 만들어내는지는 불명확한 바이오하이테크놀로지 농공복합 머시기 연구소가 자리를 잡았구요) 먼지 보얗게 쌓인 창고같은 도서관의 책들을 열심히 섭렵했었더랍니다. 어린 나이에 읽고 이해할 책들도 그다지 많지 않았었거니와 “기적의 도서관”은 먼 미래에 이루어진 일이라 시골 꼬마의 독서편력은 문고판 편력에 집중했었더랬지요.
백설이라는 이름을 가진 공주와 나무꾼이었던가 하던 이름도 없던 그냥 일곱 “난장이”도 그때 만났고, “음낭암”으로 고생했던 친구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올리버 트위스트도 그때 만났고, 미시시피강 주정뱅이의 아들이지만 아마도 일진이었을 백인 허클베리 핀과 “검둥이” 짐도 그때 만났지요. 아마도 쌍무지개 뜨는 언덕도 그때 즈음 보았던 듯, 하지만 기억이 가물하여 통과...
그런 동화책들과 나란히 나를 기다렸던 책들 중에 이솝 우화가 있었습니다. 물론 내가 섭렵했던 책 소개는 지금에 와서야 하는 방식의 표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화 이야기도 지금의 방식으로 이야기하려는 겁니다.
어려서는 동화나 우화나 다 똑같이 읽힙니다. 동화는 권선징악이요, 우화는 지혜롭게 살자라는 것이지요. 어린이에게는 다 좋은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이제와서 보니 동화와 우화는 조금 다른 이야기이더라는 것이지요. 동화는 나쁜 놈, 좋은 사람이 있지만 우화에는 그것이 없는 것이라는 거지요.
동화에서 독사과 왕비보다 백설공주에 훨 가깝고, 팥쥐보다는 콩쥐에 훨 가깝고, 놀부보다는 흥부에 훨 가까운게 우리 아닙니까? (물론 모던한 해석에 기반한 것은 아닙니다만)

근데 우화에서는 좀 다릅니다. 어느 우화의 주인공 여우는 두루미를 초대합니다. 맛있는 밥을 대접하겠다고... 둘이 왜 그리 살가운 초대가 필요했는지의 저간의 사정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스프였을 것 같은 맛난 식사를 준비합니다. 착한 여우는 송이버섯도 썰어 넣고 국산 한우도 다져넣고 성의껏 준비했습니다, 늘 쓰던 납작한 접시에... 초대받은 두루미는 난감합니다. 허기가 진거지요. 그래도 착한 두루미는 허기를 감수하고 고마움에 다음날 착한 여우를 초대합니다. 유기농 당근도 쓰고, 밤새 현미도 갈아 넣고 해서, 늘 자기가 쓰던 호리병에 담아서 참하게 내옵니다. 이번에는 여우가 허기가 질 차례인겁니다...사정은 그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허기진 착한 여우는 길을 나섭니다. 길가에 흐드러진 포도나무가 있습니다. 송글송글 포도송이를 달고 있습니다. 깡총깡총. 이미 허기진 여우의 도약력은 미진하여 닿질 않습니다. 여우는 허기진 채로 돌아서지만, 그래도 이유는 신포도이기 때문입니다...사정은 그러했을지도 모릅니다.

연구소랑 인연을 맺은 지, 그리고 소위 이곳저곳 활동공간으로 나온 지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몸도 마음도 덜 풀린 듯도 합니다. 과거의 운동의 경험과 인식은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 반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생각나는 것이 이런 우화들이었습니다. 나름대로 한다고, 열심히 한다고 내놓긴 했지만 나한테만 익숙한 방식으로 만이었다면, 언어의 성찬보다 나을 것이 어디에 있을까? 나 스스로에게 익숙한 방식으로만 생각하고 이해하고 일을 해버린 것은 아닐까? 막상 아쉬운 기회에 어떻게 좀 잘해볼라 싶었는데 결국 “쟤네들 원래 그래”로 생각해버리고 마는 것은 아닐까? 혼자서 하는 운동이라도 마찬가지이고, 조직이 움직이는 운동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아고, 참 운동 잘하기 힘듭니다. 그래도 접시도 깨고 호리병도 깨고 새살림을 장만할 마음가짐으로 풀쩍 뛰어 신포도도 삼키고 소화시키는 여우같은 운동을 해야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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