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07/10월/칼럼] 현장 간부가 바라본 2007년 금속노조 중앙교섭

2007년 중앙교섭 잠정합의안에 대한 찬반투표가 80.19%로 가결되었다. 현장 간부들의 중앙교섭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하지만 잠정합의안은 80%라는 높은 찬성률로 가결되었다. 각종 의견그룹에서 나온 중앙교섭 평가 속에서 현장간부 활동을 하면서 느끼며 답답해했던 사실들이 ‘이런 것 때문이었구나’ 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높은 찬성률에 대한 의문은 정리되지 않았다.

올 3월, 15만 금속노조가 출범했다. 이제 막 산별로 전환한 사업장들은 산별노조운동을 통해서 지난 10년간 구조조정으로 정리해고로 내몰렸던 고통의 나날을 반전시킬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하며 금속노조를 움켜쥐었다. 그만큼 금속노조에 대한 기대와 15만이 함께 하는 투쟁에 대한 기대는 넘쳐났다. 어쩌면 97년 경제위기 이후 진행된 대대적인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산별노조운동을 통해 저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기대를 했다면 지나친 욕심이었을까...

하지만 이러한 산별운동에 대한 기대는 3월 말에 있었던 지회장 수련회를 진행하면서 깨어지기 시작했다. 2007년 투쟁은 15만이 금속노조로 전환하여 전개하는 첫 투쟁으로서 총자본으로 하여금 금속노조를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지회장 수련회를 통해 밝힌 5기 지도부는 이 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이미 상실하고 있다는 느낌을받았다. 물론 금속노조 첫 해에 완벽한 승리를 할 수 없을지라도 15만 조합원의 힘을 최대한 발동하도록 하는 투쟁을 해보는 것, 그래서 15만 조합원이 하나의 조합원임을 확인하고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5기 지도부의 사업계획 속에서는 어떻게 2007년을 무사히 넘길 것인가에 연연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회장 수련회를 통해서 밝힌 제5기 지도부의 사업계획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중앙교섭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5기 지도부는 2007년 중앙교섭을 15만 산별협약을 쟁취하는 투쟁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2만의 금속노조가 합의하고 있던 기본협약을 갱신하는 것으로 사업계획을 잡고 있었다. 이미 합의하고 있는 2만의 금속노조 조합원들의 2007년 중앙교섭 요구는 없어져 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13만 조합원들은 이미 사업장 단협을 통해서 기본협약 정도의 요구는 이미 거의 합의하고 있는 상태였다. 15만 조합원이 함께 요구하고 투쟁할 수 있는 중앙교섭 요구는 애초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둘째는 투쟁 일정이다. 5기 집행부는 7월말 휴가 전 타결이라는 목표로 사업계획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금속노조가 3월 초에 출범하고 현대자동차지부가 선거를 치러야 하는 상황 속에서 7월말 타결이라는 것을 목표로 15만이 함께 하는 투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애초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지회장들의 많은 질타와 토론이 이어졌다. 크게 현장 간부들의 요구는 2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하나는 15만이 함께 할 수 있는 중앙교섭 요구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 둘째는 9월 금속노조 선거를 연기한다 할지라도 7월말 타결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4월 25일 임시대의원대회를 통해서 중앙교섭 요구안이 확정되었다. △비정규직을 포함한 총 고용보장 △원하청 불공정거래 근절 △금속산업 최저임금 93만원 보장 △4년간의 중앙교섭 합의사항 인정과 산별협약 정비 등 15만 조합원들의 요구와 투쟁으로 산별 중앙교섭을 성사시키기로 최종 결정한 것이다. 대의원들의 15만이 함께 하는 투쟁에 대한 열정은 밤샘 토론을 만들어 내며 제 5기 집행부를 압박했고, 결국 지회장 수련회를 통해서 제기되었던 15만의 요구를 일정부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7월말 휴가 전 타결이라는 투쟁 일정은 수정되지 않았다.

2007년 투쟁의 첫 단추는 이미 잘못 끼워지고 있었다. 현대자동차 지부가 아무리 빨리 선거를 치르고 임단협을 준비해서 맞추어 간다 해도 7월말 타결 목표로 준비해 간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처음부터 15만이 함께 하는 투쟁은 준비되고 있지 않았다.

제 5기 집행부의 성격은 4월 26일 ‘하이닉스매그너칩지회 합의서 작성’과 5월 9일 ‘금속노조 첫 확대간부 결의대회’에서 정갑득위원장의 연설을 통해서 더욱 더 명확해졌다. 비정규투쟁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하이닉스지회의 투쟁을 돈으로 정리해 버린 것과 힘있는 투쟁을 통해서 장기투쟁사업장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달려온 15만 첫 금속노조 확대간부 결의대회에서 위원장은 “내년이면 금속노조 조합비가 300억이다. 이 돈으로 앞에서는 싸우고 뒤에서는 노동부와 협상해서 해결해 가겠다. 오늘 집회는 평화집회이다. 위원장의 말을 들어라. 어기면 징계하겠다” 라는 발언으로 전국에서 달려온 확대간부들의 투쟁 의지를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중앙교섭은 현장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조합원 또는 현장 간부 그 누구도 중앙교섭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중앙교섭은 그야말로 중앙에 있는 자들만의 교섭이 되어가고 있었다.

충분히 예견되었던 바대로 현대자동차 지부는 중앙교섭 일정과 지부교섭일정을 도저히 맞추지 못하고 중앙교섭 전선에서 이탈하였다. 또한 중앙 교섭은 전혀 진척이 없는 상황에서 7월말 타결 목표를 맞추기 위해 지부와 지회의 임금교섭을 열어 버렸다. 중앙교섭과 상관없이 지부와 지회의 교섭이 마무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중앙교섭을 중심으로 하는 투쟁전선은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정말 중앙교섭은 중앙에 있는 자들만의 교섭이 되어버린 것이다.

투쟁전선이 무너진 상태에서의 중앙교섭은 원칙과 기본마저 무너뜨리면서 양보와 구걸교섭으로 일관했다. 사용자들의 교섭 불참과 무성의한 교섭에도 불구하고 노조는 거듭 사측에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교섭을 계속해 나갔다. 결국, 15만 중앙교섭 성사 투쟁 등, 4월 임시 대의원 대회를 통해서 확정된 중요 요구안들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산별 최저임금 90만원이라는 합의만 가지고 중앙교섭은 마무리 되었다.

현장에는 중앙교섭이 없었다. 현장에는 15만 금속노조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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