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총선이 지나면
‘정치’는 어떻게 하려나?!
김재광
최근민주노동당의 분열로 지난 8년간 민주노동당으로 강요되었던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노동자 계급의 정치’가 아니라 민주노총 조합원의 선거 시기에 국한된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이전부터 조합원으로부터 기각되었다. 민주노동당을 제외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는 둘째 치고, 조합원은 민주노총의 대의원 결의와 무관하게 현장에서, 지역에서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에 투표를 하는 것 뿐 아니라 선거운동도 하고 있었다. 이들에 대한 제재(制裁)나 징계는 존재한 적이 없다. 오히려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으로의 탈당은 충격적인 일이 아니다. 아무튼 배타적 지지의 정치적 폭력은 현실에서 무력해졌고, 대동단결, 일치단결의 허상은 현실에서 확인되고 있다(재미있는 것은 ‘배타적 지지’를 신주 모시듯 하던 중앙파를 비롯한 진보신당의 주요세력이 오히려 지금은 그것을 통렬히 비판한다).
문제는 민주노동당의 분열이 아니다.
밝힌 바와 같이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아니라 후하게 쳐주어도 노동조합의 정치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무엇인지 민주노동당이건, 진보신당이건, 아니면 사회주의정당이건 깊이 고민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선거투표 시기만 되면 민주노총은 ‘계급투표’를 운운하였다. 즉 노동자 정당에 노동자계급이 투표하는 것이 ‘계급 투표’라는 것이다. 그간의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정당인지는 차치하더라도 평상시에 노동자계급이라는 표현을 극히 자제하던 총연맹 이하 각급의 노동조합이 선거 시기만 되면 ‘계급투표’를 운운하니 당황스러운 것은 오히려 조합원이다.
‘계급’이라는 낱말을 써야만 노동자계급 정치는 아닐 것이다(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계급이라는 낱말을 자제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일상에서 ‘정치’와 분리시켜 놓고, 선거시기에만 운운하는 것은 자본이 봐도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계급의식을 왜곡하니 좋아할 일이다.
그간의민주노동당의 모습을 따져보자.
노동자들은 실상 일상에서 정치를 하고 있다. 임금/단체협약을 맺고, 파업을 하고, 반노동자 정책을 반대하고, 시위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이것을 ‘정치’라고 하지 않는다. 나아가 “현장의 일은 여기까지.”라고 규정해 버린다. 정치는 국회에서 하는 것이라 세뇌시킨다. 현장투쟁을 확대하고, 지역연대로 자리 잡고, 일상에 저항하는 것은 국회 입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나, ‘정치’는 아니라고 한다. 소위 ‘정치’ 활동의 궁극은 솔직히 선거이고 입법 활동인 것이다. 도대체 ‘정치’라는 것은 무엇이며, 더구나 계급 정치라는 것은 무엇인가? 민주노동당이 쪼개지는 것이 ‘당내 패권주의’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지난 대선에서 유의미한 득표를 얻었다면 과연 오늘의 분당사태가 있었을까? 그랬다면 ‘배타적 지지’의 철회를 주장할 수 있었을까? 진보신당의 아전인수는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인가? 민주노동당의 잔류파건 탈당파건 어차피 기준은 유효한 득표 아니었는가!
4월이되면 누구를 찍을 것인가에 대해 현장의 노동자들은 설왕설래 할 것이다. 아마도 민주노동당과 별도로 진보신당이 섰으니, 많은 활동가들이 조합원을 선동하는 일은 녹록치는 않겠다 싶다.
그런데 4월이 지나면 ‘정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총선 결과에 따른 합종연횡과 이합집산은 그렇다 치고, 노동자계급의 ‘정치’는 어찌 할 것인가 말이다. 다음 선거를 기다릴 것인가?
활동가는 이 점을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해야 하고, 대중에게 답하려 적어도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손쉬운 투표 선동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정치’를 희망한다고 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