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08/11월/칼럼] 변혁운동과 촛불

‘ 변혁운동과 촛불 ’

자유기고가 서른 즈음에


이 주제를 얘기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촛불은 무엇인지 그리고 기왕의 소위 운동권이 느끼는 거리감의 실체가 무엇인지 살펴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이 시기의 사회적 과제에 대한 저항과 투쟁에 있어서 어떻게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1. 촛불은 무엇인가

촛불은 무엇보다도 저항이다. 촛불은 부당함에 대한 분노와 정의에 기초한 순수한 열정의 자발적이고 집단적인 저항으로 규정할 수 있다.
무도한 공권력에 대한 도덕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우월성을 확신한 개미떼들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고, 자기 정의를 확신하고, 옳다고 믿는 자신부터 먼저 실천하는 순수한 헌신이고 열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촛불은 집단지성이고 그 자체에 기존의 허구적 권위를 용인하지 않는 광장의 민주주의 즉 혁명적(평의회) 민주주의의 성격을 내재화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2. 아날로그 운동권이 느끼는 당혹감의 실체

변혁을 꿈꾸어 왔던 기왕의 운동권들이 거대한 촛불과 맞부딪쳤을 때 느껴지는 당혹감의 실체는 무엇인가?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동원된 것이고, 이처럼 훌륭한 실천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정치적 훈련이나 정치의식은 낮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해서 그들은 정확하게 자기의 방향을 잃지 않고 세련되게 싸우는 것인가?


◈ 몇가지 사례.

투쟁의 전반기 5-7월까지

5월의 어느날 시청광장에는 미친소 복장을 입은 여성이 있었고, 독도문제가 나온 이후 몇 달 동안이나 계속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는 여성도 있었고, 조중동의 왜곡보도가 노골화되자 광고주에 전화를 걸자라는 선동이 아고라에 떴었고, 이를 실천하는 개미떼들이 있었고, 이 운동은 지난 8/30 언소주(언론소비자주권행동)로 발전되었다. 또한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고주 명단을 정리한 글이 매일 베스트에 올라가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청와대에 가려는 노력이 번번히 차벽에 막히자 어디선가 밧줄을 준비해온 사람들이 있었고, 광화문에서 밤을 새면 어디선가 음료수와 먹을 것을 준비해 온 사람들이 있었다. 촛불다방이 생겨났고, 유모차 부대가 나왔고, 촛불자동차가 나왔고, 예비군과 의료진이 나왔다.

투쟁의 후반기 7-9월까지
주말마다 가투를 공지하는 권태로운 창이 있었고, 대통령과 대화하자며 아무리 연행해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겠다고 결의한 8.15 평화행동단(연행자원 연좌조직)이 있었다.
또한 가투나 집회를 책임지고 선동하고 이끄는 전대협, 386, 촛불승리 시민연대가 있었고, 마포, 강남, 관악, 은평, 경기, 성남 등에 지역촛불이 생겨났고, 날마다 명동에서 뉴라이트 홍보물을 돌리는 사람들(안티 2MB와 민처협), 부산이나 의정부에서 경향과 한겨레 신문을 돌리는 사람들(진실을 알리는 시민들-진알시), KBS, YTN, 조계사, 서울대병원에서 몇 달째 노숙을 하면서 촛불을 드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들을 관통하는 것은,
자기가 옳다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지성이라는 점과, 이것은 기존 운동권의 조직적 사업과 같은 관성이 아니라, 인터넷상의 이용과 소통의 행위가 그 자체에서 주어지는 평등함과 자발적인 개인의 의지라는 특성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네티즌은 기존 운동처럼 조직적인 틀을 통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확신만으로 집단지성에 합류한다는 것이다.

또한 네티즌 중에는 눈팅족도 있고, 키보드 워리어도 있지만, 다중 가운데는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즉 설득력 있는 행동 방안을 냈을 때, 이를 공감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 동일한 실천의지를 갖는 사람들이 카페를 결성했을 땐 토론을 통해서 더 나은 방법론을 찾아 실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기존의 운동권들처럼 전략전술 혹은 기획목표와 실천방안을 먼저 고민하는 방식으로는 나올 수 없는, 혹은 그러한 사고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무모하다고 할만한 실천이 있다.
몇 달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저녁이면 KBS에 출근하여 날을 새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횟칼 테러가 났다고 했을 때 함께 해야 된다면서 서울대 병원의 주차장과 조계사에서 몇날 며칠 밤을 지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즉, 성과 혹은 승리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그냥 분노와 공감 혹은 동참으로 족하고 그 이상 바라지 않는 사고방식이 있는 것이다.

운동권은 하나의 전투에서 동력과 전술을 고민하는데 익숙하지만, 네티즌은 처음부터 집단에 소속된 개인이 아니라 그냥 다중 속의 일인으로서 자기의지만으로 자기행위를 결정해온 관성 때문에, 자기가 참여한 거대한 물결을 지도하는 그룹이 있다거나 누군가의 지휘 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병사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생각과 참여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얼마나 될른지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단지 옳고 정당하다는 자각만 있으면 실천에 옮기는데 익숙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사고방식이다.

아무튼 누군가가 조계사나 KBS에 가서, 그저 아무 말없이 촛불을 켜고 앉아 있는 사람을 봤을 때, 전망과 성과에 집착하는 운동권은 한 두시간 같이 할 수 있겠지만, 날을 새야겠다든지 오늘만이 아니라 낼이고 모레고 날을 새야겠다는 사고는 결코 나올 수가 없고, 바로 이것이 촛불 혹은 촛불폐인과 운동권과의 사고방식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모하다고 보여지는 실천이 거대한 물결을 이룰 때 개미떼는 태산을 움직이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이고, 수많은 개미 중엔 참으로 발랄하고 창조적이고 실천적인 지성이 있게 마련이고 그 실천이 보편성을 갖을 때엔 즉 모범이 되었을 땐 즉각 따라하고 함께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변혁을 꿈꾸는 운동가들은 완벽한 계획에 집착하지만. 역사의 전진은 결국 대중의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참여로만 가능하다고 할 때, (즉 태산은 소수의 정예화된 계획이 아니라, 무수한 이름모를 개미떼들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솟아 오를 때만 가능하다고 하면) 즉 중앙집권적이 아니라 혹은 민주집중제가 아니라 직접민주주의가 관철된 혁명적 민주주의 혹은 평의회 민주주의가 광범위하게 확산 성장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고, 이것은 누군가가 권위와 우월성을 가지고 개입하고 지도하고 리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면서 공감을 이끌어 내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변혁운동의 승리에 있어서 다중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참여가 필수불가결하다면, 주로 조직대중의 동원전략에 의존해온 기존의 모델은 바뀔 필요가 있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21세기형 변혁모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3. 아날로그 운동과 버전 2.0의 운동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기왕의 소위 운동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상층 연대체로서 국민운동의 지도부를 자임하면서 민생민주국민회의를 구성하여 촛불을 줄 세우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퇴행적인 시도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촛불은 시작부터 저항이었고 투쟁이었는데, 즉 촛불을 든 첫날부터 명박퇴진을 외치고, 이명박, 한나라당, 조중동, 뉴라이트를 그 주된 적으로 선언하고 퇴진과 해체를 주장하고 있는 데에도, 저항단체나 투쟁단체가 아닌 체제내의 개선과 개량운동을 목표로 하는 이러저러한 시민단체들이 주를 이룬 대책회의가 단 한번도 공식적으로 명박퇴진을 외지치 못하고 기껏해야 명박심판에 머물고, 대중이 투쟁으로 나아가고 확산될 때 발목을 잡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던 그 한계에 대한 단 일말의 고민도 없이, 심지어 신자유주의 세력인 민주당까지 끌어들여 그 구성원을 더욱 넓게 포괄한 것은 그들의 선언과는 정반대로 그들의 실천이 어떠할 지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투쟁을 할려면 투쟁을 하려는 세력과 연대를 해야지, 투쟁은 커녕 저항도 할 수 없는 세력을 광범위한 연대의 통큰 단결이라는 미명하에 꾸리는 사업방식의 허구성은 더 언급할 가치가 없을 것이다. 애국촛불전국연대를 비롯한 수많은 촛불들이 이미 민생민주국민회의를 대책회의가 옷만 바꿔 입은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처럼 그 구성원의 한계만이 아니라, 사업방식과 의사형성과 결정 그리고 동원의 방식에서, 조직의 틀에 입각한 하향식 사업방식과 동원방식, 광범위한 후원조직이 전제된 전업활동가들의 권위적 대리행동주의, 그리고 대중을 수동적인 관객의 입장에 머무르게 하는 엘리트주의 이 모든 것이 기왕의 특정한 권위를 부정하는 광장의 민주주의로 표상되는 촛불과는 도저히 함께 할 수가 없는 사업방식인 것이다. ‘다함께’의 권위적인 리딩방식이 촛불들에게 초반부터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때문에 진보세력과 촛불이 함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촛불과 촛불의 행동양식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함께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촛불을 지도하고 이끌고 가려는 자세를 버리고 촛불의 사고방식과 언어로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아고라에서 출발한 촛불은 과거에 아날로그적으로 단절된 무기력한 개인들이 여론과 정보를 독점했던 구래의 통치자들에 대하여, 21세기의 쌍방향 인터넷 소통인 웹2.0이란 공간을 통해서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무너뜨리고, 집단적이고 자발적으로 학습을 시작하고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집단지성과 자유로운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넷’상에서의 자유로운 참여는 억제되지 않은 실천욕구의 배경으로 작용하여, 교육과 조직을 아날로그적 현장보다도 훨씬 능률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과정에의 참여가 순수히 개인의 자발적 의사에 기초하고 아무런 기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촛불은 6/25. 국민토성의 토론에서 보는 것처럼 광장의 민주주의 나아가 혁명적 직접민주주의의 즉 평의회의 정신을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아고리언이라고 불리우는 촛불들의 광장민주주의와 집단지성은 ‘대의제’라는 미명하에 국민을 주권자가 아닌 유권자, 그것도 4년에 한 순간만 유권자로 대우할 뿐, 평소에는 억압과 통치의 대상이 되는 허구적 민주주의체제와는 친하기 어렵다는 것과 본질적으로는 다가올 평등세상의 직접적(평의회) 민주주의에 연결되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러한 광장민주주의 혹은 직접민주주의의 정신과 실험을 ‘카페’의 외관을 갖는 촛불의 자주적 조직에서 확장시키고 관철시켜 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4. 촛불 승리와 변혁운동의 과제

이제 촛불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고양기를 준비해야 하는 ‘시즌2’를 고민할 시점이지만, 변혁운동의 입장에서는 의제를 심화시키고 확장시키면서 기왕의 촛불과 하나되어 촛불을 고양시켜 새로운 결전을 준비해야 할 고민의 시점이기도 하다.

현단계 촛불들은 단지 온라인 카페만이 아니라 오프라인상의 직접 실천을 통해서 스스로 단련시키고 있는 바, 즉 아고라와 카페를 소통과 전달, 선전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넷’상의 연결이 실천으로 혹은 직접 행동으로 전화하면서 인터넷을 활용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므로, 촛불과 필드에서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최근의 몇가지 예를 보면,
수원촛불은 매일 수원역 앞에서 100여명이 촛불을 들고 있는 바, 서울처럼 단지 뉴라이트 반대나 횟칼 테러 반대의 홍보전만 하는 게 아니라, 매주 주제를 바꿔가면서 홍보전을 하고 있고, 여기에 비정규 노조나 공무원노조, 전교조, 인권단체 등이 함께 참여하여 노동과 촛불이 교류하면서 하나되는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기륭투쟁은 네티즌 연대를 통하여 많은 공감을 일으켜 낸 바 있고, 비정규 없는 세상 10,000인 선언에서도 대략 80%는 노동자가 아닌 촛불이었다고 생각해 보면, 촛불이 사회정의와 약자에 대하여 공감하고 반응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분노의 돌파구를 찾지 못한 촛불들의 표출의 장이라는 측면도 있다는 점에서, 이는 한편으로 촛불이 외롭다는 것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반드시 그 의제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이 사회에 저항하는 모든 행동에 대한 무조건적인 연대와 동참의 측면도 있다는 점에서 장단점의 양 측면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단계 촛불은 더디지만 자주적이고 창조적으로 변화하고 진화하고 있는 바, 강남에서는 강남역 출구에 매일 판넬을 전시하고 때로는 강남의 젊은 직장인들의 감수성에 맞는 퍼포먼스나 프리허그 등의 행사가 시도되기도 하고, 의료민영화와 같은 주제로 강연회를 갖기도 하고 자체적으로 학습 소모임을 운영하기도 한다. 광진, 관악, 은평 등의 지역 촛불은 최근에 등산로 입구에 판넬을 펼치고, 솜사탕을 나눠주고, 어린이들의 손톱이나 얼굴에 메이크업을 해주면서 조중동 반대나 뉴라이트 반대의 홍보물을 나눠주고 서명을 받는 행사가 등산객들에게 큰 호감을 불러 일으켰고, 이러한 행사는 확산되고 있다. 기왕의 운동권은 이처럼 발랄하고 흥미있는 홍보전을 펼친 적이 없다.

촛불 혹은 시민은 사회와 정치와 문화 그리고 소비의 영역에서 추상되는 것이라면, 노동자는 생산과정에서 추상되는 것인 바, 시민과 노동자가 이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의식을 심화시킬 때 비로서 하나로 나갈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노동자가 기왕의 촛불들과 경험과 정서를 공유하면서 촛불을 확대 심화시킬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노동자 촛불 실천단이든, 혹은 단위노조의 결의에 의해서든 간에, 노동자가 한 개인으로 촛불과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촛불과 결합하는 것은 현단계 운동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위사업장의 조합주의적 사고가 아니라 아무리 미약하더라도 정치투쟁의 성격을 갖는 촛불에 합류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도 중요한 훈련의 장이 될 것이다.

최근에 결성된 자주적 촛불들의 연대인 애국촛불전국연대에서 보는 것처럼, 촛불은 의제에 있어서 아직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경향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KBS, YTN 지킴이들이나, 기륭릴레이단식과 비정규만인선언, 강남성모병원의 투쟁에 결합한 네티즌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처럼, 촛불들이 부당하고 불의한 권력에 대하여 정당하고 정의롭다는 확신만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촛불이 기왕의 정치경제학적인 용어로 어느 계층 어느 계급에15  해당하느냐고 규정지으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대운하만이 아니라 의료민영화 반대, 공공재의 사유화 반대, 종부세에 대한 비판은 반드시 개개인의 촛불이 자기가 처한 사회경제적 처지의 자각에 기초한다기 보다는, 불의에 대한 정의의 공감이 주를 이룬다고 할 것이고, 굳이 규정짓자면 그 내면에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보다 철저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포함하고 있는 급진적 소시민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현단계의 촛불을 사회과학적인 틀로 규정하자면, 10대부터 50대까지 참으로 다양한 세대와 생업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하여 장기간의 일관된 저항을 굽히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평범한 소시민이 사회진보를 꿈꾸는 급진적 소시민으로 단련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프랑스 혁명기의 자코방과 같은 급진적 민주주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현단계에서 민족주의 등 경계해야 할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의료민영화나 수도민영화에 날선 반응을 보인 것처럼, 촛불이 20대 80의 신자유주의적인 공세에 맞설 수 있는 저항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면, 향후의 한국의 변혁운동은 이들 촛불을 어떻게 단련시키고 고양시켜 나가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변혁운동은 촛불과 결합하여 촛불과 하나가 되어 진정한 변혁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자는 슬로건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 즉 촛불과 하나되어 촛불을 키워낼 때에만 변혁운동은 승리의 전망을 갖을 수 있다는 점에서 혁명적 다중 혹은 군중을 혁명적 대중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변혁운동의 책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촛불이 보여준 웹2.0 광장의 집단지성은 설득력있는 합리적인 주장에 대하여 친화성을 갖는다는 것과, 개개인의 내면적 확신만 있으면 지도와 동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옳다고 하는 자기확신만으로 곧바로 실천에 나선다는 특성을 염두에 두면 촛불의 의제를 심화시키는 방법론은 신자유주의, FTA, 비정규직 문제, 사회 공공재의 민영화와 사유화 이 모든 의제들을 촛불과 만나는 장에서 즉 아고라와 카페와 오프에서 촛불의 감수성과 촛불의 언어로 합리적이고 설득력있게 제시하는 작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촛불을 교육받고 단련된 조직대오가 아니라, 촛불을 들기 이전까지는 사회와 정치 문제에 대하여 단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 주를 이룰 만큼, 미성숙하고 중구난방인 참으로 다양한 소시민들이 대의제민주주의의 허구적 한계에 분노하여 나선 소시민 나아가 결코 자신을 운동가나 혁명가로 규정짓지 않는 정의감에 가득찬 소시민이라고 할 때,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대중이나, 사회운동체에서 활동하는 소시민적 활동가나, 혹은 정치조직의 직업적인 활동가와는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자신에 대한 규정을 결코 운동세력이라고 하지 않는 생업을 갖은 정의감 있는 소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운동으로 묶어내는 사업방식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 다중의 자발성을 존중하고 수렴하면서 혁명적 대중으로 나아가는 방법론은 이미 아고라와 다음 카페에서 그 단초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카페와 같은 자발적 조직에 모인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다중이 혁명적이고 직접적인 민주주의의 경험과 훈련을 통해 그리고 보다 정의롭고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사회에 대한 열망을 학습하고 체험하는 것을 통해 우리 역사는 발전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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