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 07월 | 칼럼]87년 노동자대투쟁을 생각하며....
87년 노동자대투쟁을 생각하며....
사회주의노동자자당 건설 준비모임 대표 양규헌
6월 항쟁
87년 6월의 혁명적 열기가 한바탕 시절을 휩 쓸어버린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군부독재에 항거하며 민주화를 요구를 내 걸고 투쟁한 6월항쟁은 학생, 유명정치인, 명망성 있는 재야인사, 화이트 칼라계층이 주도했다. 여기에 노동자계급이 억눌린 분노를 안고 항쟁에 합류하면서 투쟁의 파고는 더욱 높아졌다. 전국적으로 가두를 점거하고 경찰서를 포함, 행정관청을 공격하면서 투쟁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역사의 진전을 이룰 것 같았던 6월의 뜨거운 투쟁은 군부독재정권의 기만적 6.29선언으로 눈 녹듯 사라지고 자유주의세력은 정치적 득실을 계산하며 계급적 자존심을 관리하는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이한열열사 국면이 혁명을 예고하는 정세로 발전하며 근본적 변화에 대한 요구들은 계급적 본질에 의해, 정치적 헤게모니에 의해 시청앞 100만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집회도 이한열 열사의 영혼과 함께 그렇게 묻히고 말았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선거혁명을 내세우며 선거를 통해 군부독재를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한 선거주의도 투쟁의 진전을 가로막은 장애물이었다.
7~9노동자대투쟁
6월 협약의 한계를 인식한 노동자계급은 7월~9월 노동자 대투쟁의 거대한 불꽃이 되어 타 올랐다. 전국을 뒤흔든 이 투쟁에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은 함께 하기보다는 놀라움을 애써 감추면서 수수방관하며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에 군부독재와 함께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6월항쟁의 거대한 함성이 정리되는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이 침묵할 수가 없었다.
역사적으로 지배권력이 정치적 위기에 처할 때, 자신들의 요구를 스스로 제기해 왔던 노동자계급은 7월에 들어서자 6월의 정치적 자유화 투쟁을 사회경제적 권리의 확장을 위한 투쟁으로 전화시키고자 하였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가와 자본의 통제를 받았던 노동자계급이 이 공간을 이용, 자신의 권리를 확장시키기 위한 요구를 제출하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87‘노동자대투쟁’은 이전의 노동조합운동과는 질적으로 상이한 환경과 상태로 전개되었다. 이 투쟁에 자본은 과거와 유사한 방식으로, 구사대 동원, 노동자 내부갈등 조장, 직장폐쇄 등으로 노동쟁의에 대응하였으나 이 방식은 노동자들의 감성을 더 자극하여 격렬한 투쟁을 부추긴 꼴이 되었다.
7~9월 노동자대투쟁의 특징은 대부분의 투쟁이 악법을 무시했다는 사실이다.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어 행정관청에 신고하는 방식이 아니라 ‘선 파업 후 노조결성’ 등의 방식으로 대투쟁의 공간에서 법을 지킨 경우는 5%가 넘지 않는다는 게 당시의 통계였다. 법을 무시한 ‘비타협적 투쟁정신’이야말로 노동자 대투쟁의 정신이었으며 이 정신은 그 후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으로 자리매김한다.
87‘노동자 투쟁은 한국노총의 권위를 형식과 내용의 측면에서 무용지물로 만들었으나. 다른 한편 80년대 초반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급진노동운동의 권위 또한 무너뜨렸다. 급진적 노동운동활동가들은 지역적으로 서울, 경기지역의 공단을 중심으로 경공업을 중심으로, 반(비)합법적인 조직의 형태로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 핵심적 구성인자는 인텔리출신의 노동자들이었다. 당시 이들의 사회변혁을 위한 이념과 노선정립에 무게를 두고 활동하였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생산현장의 대중조직들과의 접촉면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 지도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노동자대투쟁의 과정에서 혁명적인 급진노동운동의 위상은 한마디로 노동자계급의 ‘자생성에 굴복’하였다
자유주의 세력들이 자신의 투쟁성과를 주장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대투쟁으로 쟁취한 것이다. 그리고 그 투쟁은 전혀 평화적이지 않은 피의 투쟁이요, 폭력투쟁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주장대로 준법의무나 평화적 저항이라는 의무를 필연적으로 부과하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오히려 알량한 권리를 얻는 대신에 그들의 체제를 인정할 의무가 준법의식과 비폭력, 평화적 방식의 저항이라는 굴종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 20년의 세월이 경과한 지금에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운동사에 선명한 역사적 의미를 남겼다. 민주노조운동의 정체성을 확보하며 변혁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임무를 설정하는 성과를 남겼음은 물론, ‘독자정치세력화’와 ‘노동운동 조직발전전망’과 함께 ‘노동해방’을 일반화시키는 계기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대투쟁을 계기로 지역별 민주노조운동의 구심들이 만들어지고 중앙으로 결집되면서 ‘전노협’이 건설되었다. 지역의 연대투쟁의 성과로 건설된 ‘전노협’은 숱한 비판과 공격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노동조합 조직의 ‘노동조합은 투쟁조직’의 상을 분명히 세워냈고 계급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 대해 지체 없이 총파업을 조직했으며 조직적 과제로서 ‘계급적 산별건설’쟁취를 전노협의 조직적 과제로 설정하고 투쟁했다. 이러한 투쟁에서 수 천 명이 해고되고 수배, 구속은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자본과 정권의 무력, 이데올로기 탄압도 극복하기 쉽지 않았으나 더욱 힘들게 한 건 운동 동지라고 자칭하는 쪽에서 불을 지핀 ‘노동운동위기 논쟁’이었다. ‘노동운동 위기논쟁’은 전노협건설에 대한 국가와 자본의 무차별적인 탄압을 매개로 증폭되면서 전체 노동운동에서 전투성을 거세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다. 이 논쟁을 거치면서 ‘변혁적 노동운동’의 함의는 대중이 참여하고 사회에 대해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사회발전적 노동운동’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되는 안타까움을 맞게 될 뿐만 아니라 이후 신자유주의의 무차별 공세에 무기력함을 보일 수밖에 없는 참담한 운동으로 전락하였다. ‘위기논쟁’은 급진노동운동이 현실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을 과잉 평가하는 것을 통해 노동운동 일반으로부터 ‘계급적 노동정치’를 제거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적 혐의가 강한 기획의 결과였다. 이들은 “변혁적 노동운동그룹의 급진성으로 인해 그 발전이 제약되었다.”고 주장하며, 더 나아가 이들 중 일부는 ‘전노협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조직’이라고 폄하하며 전노협을 압박하기도 했다. 이런 주장을 했던 자들은 87년 이전의 급진운동의 역사와 정세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으며 노동운동을 둘러싼 단순한 조건들에만 주목했던 게 틀림없다.
이런 기획의 성과로 시작된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과 ‘사회발전적 노동운동’은 한 정파의 노선이라는 의미를 뛰어넘어 계급의 범주를 새롭게 형성하려는 의도와 맞물린다. 진보적 조합주의에서 사용하는 계급의 범주는 노동자를 ‘국민’으로 대체하기에 실제로 계급의 잣대를 스스로 짓뭉개고 본질적으로는 자유주의정치세력의 헤게모니에 동거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들의 의도된 논쟁은 노동자대투쟁의 정신을 무력화시키는데 일조했음이 틀림없다고 봐야할 것이며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거대한 장애가 되었다고 판단한다.
잃어버린 10년, 절망의 10년
스스로 진보를 자임하며 등장한 자유주의세력들은 김대중정권을 시작으로 노무현정권까지 10년간 6월항쟁의 역사적 가치를 계승한 주체로, 정체성을 살리기 위한 몸부림으로 개혁을 부르짖었으나 그들이 추구했던 진보의 정책과 정치는 노동자계급에게 치욕과 절망의 10년이라면 과도한 표현일까?
97년 외환위기를 빌미로 금융세계화와 더불어 본격화된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의 깃발을 움켜잡았다.
경제위기에 책임을 노동자계급에게 물으면서 노동자계급을 포섭과 배제, 무한 경쟁, 다양한 차별의 구조를 만들며 기본권을 압살하며 노동자계급의 숨통을 조여왔다. 급기야는 소위 ‘비정규보호법’이라는 명분으로 비정규법안을 발의하여 통과시킴으로서 비정규직이 정상적 고용형태로 자리매김하는데 역사적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6월항쟁의 주역을 자임하는 그들의 노동정책은 십 수 명의 비정규노동자가 삶의 희망을 잃고 절망과 분노로 목숨을 거두었다.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본의 이윤창출에 기여하며 노동자계급을 절망의 나락으로 내 모는 역사적 법안(비정규직법)은 노동자계급의 기본권은 물론이고 생존자체에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는 그 법안은 비정규노동자를 길거리로 내몰고 생존을 위협하는 거대한 장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지금, 그들은 여전히 비정규직을 보호해야한다고 기간에 대한 유예시기를 놓고 국회에서 논쟁 아닌 논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이 만든 그 법안의 본질이 반노동자적 악법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고 영양가 없는 정치적 자존심 대결만 일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 전쟁에 합류하고, 한미 FTA를 체결로 농민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내 몬 세력 또한 자칭 6월 항쟁세력이며 그들 스스로 표현대로 386의 주역이다.
자유주의 세력이 권력을 잡든, 개발독재세력이 정권을 잡든 노동자, 민중의 삶은 나이 질 리 만무하다, 어떤 세력이 정권을 잡든, 그들의 정책은 그들의 계급을 위한 정책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대연합은 계속되고 있다
계급적 산별노조건설을 조직적 과제로 안고 출발한 민주노총은 80만의 조합원을 조직하여 민주노조운동의 구심체로 활동하고 있다. 조직의 전망이었던 산별로의 재편도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 ‘계급정치지향’이라는 위상으로 건설된 민주노동당은 분화되면서 ‘노동자정치세력화’의 화두는 의회에 한 구석진 곳에서 맴돌고 있다. 노동조합에 중앙조직 건설과 산별건설이 형식적으로 완성되고 있으나 산별에 계급성은 보이지 않는다. 자본에 전략에 의해 노동자계급에 균열의 골을 깊게 파고 있어도 계급적 저항은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계급적 산별은 실패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자주성과 민주성, 계급성과 투쟁성, 변혁지향에 대한 희망들이 잦아들고 제2, 제3.... 수 십 명의 전태일이 자본과 권력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목숨을 끊어도 공장은, 이 사회는 아무런 일도 없는 듯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비정규악법이 노동자를 억압하고 불안정노동으로 노동자계급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내 몰리고 있어도 그 흔했던 계급적 연대의 함성은 들려오지 않는다. 조직력의 열세와 대중적 결의가 부재할 때 결행했던 ‘선도투’의 기획은 실종된 지 오래다. 집회에서 힘 있게 펄럭이던 ‘노동해방’의 깃발도 내려진지 오래다. 붉게 타 올랐던 적색의 함성이 차츰 잿빛으로 변색되어 눈앞에 나풀거린다. 그러나 절망 속에 한탄하고 주저앉아 있기에는 불꽃같은 세월들이 자꾸 시야에서 꿈틀거린다. 그럼에도 진보정치를 자처하는 한쪽에서 ‘민주대연합’의 끈을 부여잡고 있다.
87 대투쟁정신은 민주대연합이 아니라 민중연대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 10년은 역사적 한 면으로 정리되어 조문국면으로 마무리되고 그들의 정권획득을 목표로 했던 6월항쟁은 끝났으나, 87년 6월의 군사독재정권은 다시 ‘파시즘’이란 옷으로 갈아입고 노동자, 민중을 압살하기 위한 공안통치의 괴물로 다가오고 있다.
용산철거민의 주거권 요구에 특공대를 투입하여 5명을 학살하고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구조적 위기의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몰고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경제위기를 빌미삼아 최저임금조차 깍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자들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비용조차 삭감하겠다는 것은 자본의 이윤을 위해서라면 노동자의 생존은 물론이고 짐짝으로 취급하겠다는 대표적 예가 될 것이다.
6월항쟁의 초라한 기념식이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의 잔치가 될지는 모르지만, 노동자권력을 목표로 한 노동자계급의 87년 노동자대투쟁은 거대한 불기둥으로 다시 타 올라야 한다.
민주노조운동의 정통성이 소멸되고 있고, 계급적 운동의 질이 진보라는 이름으로 퇴색되기 시작하면서 외치는 ‘위기’는 또 다시 자유주의 세력들의 정치적 부산물로 전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87년 6월 항쟁의 성과가 10년 집권을 통해 자유주의 세력의 계급적 본질을 대중적으로 확인시켰으나, 당시의 민주대연합은 다양한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거듭되는 구조적 모순에 대해 87 노동자대투쟁정신인 비타협적 투쟁정신이 복원되어야 하고 ‘민주대연합’이 아닌 ‘민중연대’ 정신으로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의 진로와 노선이 정리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계급적 노동운동이 거대한 세력으로 발전되어 ‘노동해방’깃발을 다시금 세워내기 위해 자연발생적 노동자대투쟁이 준비된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으로 조직하는 기획이야말로 87년 노동자대투쟁을 되돌아보는 진정한 의미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