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 11월 / 이러쿵저러쿵] 나를 슬프게 하는 것
나를 슬프게 하는 것
한노보연 선전위원 김재광
얼마 전에 3년 가까이 ‘해고 투쟁’을 했던 동지가 복직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기쁜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울화가 치민다. 몇 가지 법률적 쟁점은 있었으나, 해고 이유가 기실 사용자의 단체협약 무시와 적극적인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보복이었기 때문이다. 사용자의 오기가 아니었다면 적어도 1년 전에는 복직이 돼야 했는데, 동지는 이제야 복직하게 됐다. 사용자는 지루한 소송에서 불리할 것이 없다. 업무방해를 이유로 벌금 50만 원 때문에 해고된 노동자는 있지만, 부당노동행위로 200만원의 벌금을 받은 사용자는 멀쩡하기만 한 현실. 이게 뭐냔 말이지….
사용자는 회사의 돈으로 법률비용을 충당하고, 설사 벌금이 부과된다 해도 개인사업자가 아닌 한, 개인의 돈으로 지급하지 않는다. 전과는 힘없는 자나 무서워하지, 힘 있는 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빵에 가면 모를까. 자본은 노동자보다 진저리쳐지도록 시간과 돈이 충분하다. 노동자는 그 기간에 노심초사하고, 생계를 걱정하고, 건강을 해치고, 자존심을 짓밟힌다. 그래서 노동자가 법률적 판단에만 목을 매고 있으면, 별반 답이 없다. 자본에 똥칠을 해야 그제서야 움찔한다.
“법 앞에 평등”이란 말을 믿는 자는 없다. 믿는다면 세상을 모르는 바보다. 법은 항상 불공평했다. 법은 힘없는 자의 현실을 반영하기에 너무도 둔감하고, 힘 있는 자들에게 아부하는 데는 너무도 민첩하다. 사실 ‘법’ 자체가 무슨 잘못인가? 만들고 부수고 제 마음대로 주무르는 인간이 문제지. 그렇지 인간이 문제지. 아니, 정확히 하면 착취자와 지주의 마름처럼 기생하는 인간들이 문제지……. 난 물론 ‘법 앞에 평등’이란 말을 믿지는 않지만, 법과 관련된 일을 하며 호구를 해결하고 있다. 참 거지같은 일이다. 요즈음 난, 왜 이 직업을 선택해서 이 지랄을 하고 있을까를 생각한다. 슬프다. 합리화인지, 살아 보려고 하는지, 그래도 “넌 법률적으로 노동자를 도와주고 있잖아”라며 스스로 위로한다. 뭐 일면 틀린 말은 아니다. 사용자 사건을 하지 않는 나와 동료의 행색은 남루(?)해도 왠지 모를 당당함이 있다. 특히 관료나 상대방의 눈치를 보지 않으니, 사회적인 보답이다. 바로 자존심, 난 너희처럼 살지 않아!
그런데 나를 더욱더 슬프게 하는 일이 있다. 이 알량한 자존심도 못 지키는 일이 생길 때가 있다. 막상 맡은 사건의 노동자가, 내가 생각해도, 부도덕하거나 비상식적일 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맡은 사건을 되돌릴 수도 없다. 사건 진행 내내 “저 자의 말이 사실일까? 더 한 것은 없겠지?” 조마조마하고, 사용자의 비웃음을, 심지어 조롱을 감수해야 한다. 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 집에 돌아와 혼자 무의미한 괴성을 질러대고, 눈물까지 찔찔 흘려본다. 참 내가 뭐 찾아 먹겠다고 이 지랄인가 싶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는 참 어리석다. 노동자는 언제나 선하고 양심적인 존재가 아니다. 각성한 존재로 거듭날 때 비로소 희망이 보이는 존재이다. 각성한 존재로 서는 것도 수많은 시행착오와 번민을 지날 때이고, 때로는 이 과정을 겪었다 해도 변화하지 않을 수 있다. 기실 내가 하는 일과 만남은 그 과정에 있고, 각성한 결과로 만나는 것이 아니기에 슬퍼할 것이 없다. 솔직히 내가 슬펐던 것은 알량한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때로 내가 만나는 부도덕하고, 비상식적인 노동자의 모습은 자본이 요구하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에 매우 잘 적응했거나, 잘 적응하지 못해서 나오는 모습이기에 나의 궁극적 상처가 될 수 없다. 알량한 자존심보다는 나를 지키는 자의식이 여전하지 않은가.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자. 재광아!!
P.S 그래도 걸쩍지근한 의뢰인은 나를 피해갔으면 해…….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