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 11월호 / 특집] 산재피해자 권리를 위한 아시아 네트워크 회의 참가 후기(1)
산재피해자 권리를 위한
아시아 네트워크 회의 참가 후기(1)
한노보연 상임활동가 콩!!!
지난 9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산재피해자 권리를 위한 아시아 네트워크 2009년 연례 회의”에 다녀왔어요(회의 이름이 너무 기니까 영어 이름을 줄여서 ANROAV라 쓰고 “안로브”라고 읽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냥 안로브라고 부를께요).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노동자들의 투쟁을 알리기 위해 간 거죠.
이 글을 쓰는 까닭은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얘기들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기 때문이예요. 이 기회에 저도 프놈펜에 머무는 3일 동안 수첩에 적어둔 메모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그 짧은 시간동안 배운 것과 고민했던 것들을 다시 정리해볼 수도 있으니 좋지요. 안로브 회의는 전체 모임으로 시작해서 주제별 워크샵으로 나뉘었다가 마지막에 다시 전체 모임을 하는 걸로 끝났어요. 저도 그 일정에 따라 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바보야, 문제는 자본주의야
첫날 아침 전체 모임에서는 주최국인 캄보디아의 노동보건 현황을 들었어요. 캄보디아 노총은 주로 의류, 건설 분야 중심이래요. 노동안전보건 분야의 주요 문제는 비정규직과 건설업 산재사고 문제구요. 최근 경제 위기로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더군요.
다들 경제위기가 노동자 건강권에 해롭다고 얘기하는데,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경제 호황 때는 어떤가? 경제위기가 진짜 문제일까? 이 경제 자체가 문제인 거 아닌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경제위기가 노동자 건강을 해친다고 폭로하고 있는 거지? 우리의 구호는 뭔가 달라야 하지 않나? 1991년 미국 대선에서 클린턴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구호를 내걸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바보야, 문제는 자본주의야”라고 얘기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얘기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는 무얼까?
침묵하던 이들이 말하는 운동
고민은 뭉게뭉게 피어올랐지만, 그리 깊어지진 못했어요. 모국어로 생각해도 골치가 아플 판에, 영어로 좔좔 얘기하는 내용을 따라가기도 버거웠으니까요. 어영부영하다보니 그 다음 순서, 안로브를 소개하는 시간이 왔네요. 안로브의 간단한 구성과 역사, 최근 활동들을 소개했는데, 발표를 맡은 오마나(Omana)씨의 말이 좀 빨라서 거의 못알아들었어요. 그 다음 산지브 판디타(Sanjiv Pandita)씨가 몇 가지 얘기를 덧붙였는데, 일단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어서 좋았고 그 내용도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경제 통계는 하루가 멀다고 내놓지만, 산재 통계는 찾아보기도 어렵다. 우리는 기술이나 통계 자료를 배격하진 않는다. 하지만 거기에 노동자는 없다. 안로브가 해온 일은 통계 뒤에 숨겨져 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보이게 한 것이다. 안로브의 힘은 풀뿌리 조직화에 있다.”
이 말들을 받아적으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보이지 않던 존재들을 보이게 하는, 나타나게 하는 운동, 참 좋다... 침묵하던 이들이 말하는 운동, 꿈쩍하지 않는 세상을 기어이 바꾸는 운동, 그런 운동을 하고 싶다고.
날마다 노동재해 현황이 보도된다면?
다음은 아시아 노동보건 현황을 들었습니다. 정확한 통계가 없어 국제노동기구의 핀란드 통계 모형을 빌어 추정해보았더니, 아시아에서 매년 산재로 사망하는 노동자의 수는 220만 명이나 될 거래요. 회의 자료를 보니 인도에서만 해마다 40만 3천명이 죽어간다고 하네요. 하루에 1천명 이상이, 한 시간에 46명이 사고와 직업병으로 죽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아시아에 있는 많은 나라들이 안전보건에 대한 규제가 아예 없거나 대단히 취약하고, 직업병에 대한 의사들의 인식이 매우 낮아서 진단도 받기 어렵고, 문제 해결과 예방 과정에서 피해 당사자가 배제되고 있고, 비정규직과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의 문제가 심각하고, 여성과 아동 노동의 문제, 산재로 인해 심화되는 빈곤의 문제가 심각하고, 세계 유해산업이 집중되고 있는 '지구촌의 쓰레기장'과도 같다... 등등의 진단을 내렸습니다.
무서웠어요. 싫었어요. '신종 플루'에 대한 정부와 언론의 호들갑을 생각해봤어요. 만약 날마다 신문과 방송에서 전날 일어난 노동재해와 피해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원인은 무엇인지를 보도한다면, 기업과 정부의 대책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비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아시아 지역의 노동보건 문제는 결코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구요. 근본을 풀지 않으면, 결국 이 모든 문제들은 그 다음 장소로 옮겨지기만 할 뿐이겠지요. 아프리카 말입니다.
인도와 중국의 규폐증
잠시 간식 시간을 갖고나서 본격적으로 안로브가 주목하고 있는 투쟁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돌아왔어요. 제일 먼저 인도와 중국에서 규폐증 문제에 대해 발표했어요. 규폐증은 폐에 규소 성분의 작은 먼지가 쌓여서 폐기능이 망가지는 병이예요. 일종의 진폐증이죠. 규소 성분을 함유한 광물을 다루는 직업, 특히 보석 가공 노동자들의 얘기가 중심이었습니다.
보석을 만들기 위해 어두운 갱도에서 목숨을 걸고 거친 원석을 캐는 노동자들, 조그만 작업대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지나치게 환한 불빛에 눈을 혹사시키면서 돌을 깎아 보석으로 다듬는 노동자들, 빛나는 보석을 탄생시키기 위해 폐에 쌓여온 작은 돌먼지들 때문에 숨조차 쉬기 힘들어 바싹 여위어가는 규폐증 환자들. 제 결혼 반지에 박힌 작은 보석 하나에도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배어 있겠지요. 참 싫습니다. 물건들을 볼 때마다 그걸 만들다가 죽어간 노동자들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이 따위 세상 말이예요.
“No Choice But To Fight"
다음은 중국 ‘GP(Gold Peak)’라는 건전지 공장 노동자들의 카드뮴 중독과 투쟁에 대해 발표했어요. 건전지 속에는 니켈과 카드뮴이 각각 양극과 음극을 이루어 들어가는데, 건전지를 조립하는 여성노동자들 4백여 명이 지난 2003년에 카드뮴 중독을 진단받았다는 겁니다.
카드뮴은 6일본에서 ‘이타이이타이병’이라는 공해병을 일으킨 중금속으로 유명하지요. 카드뮴이 뼈에 쌓여 너무 아프게 만들기 때문에 일본말로 ‘아프다 아프다’라는 뜻의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렇게 무서운 병인데도 GP자본은 직업병이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네요. 최근에는 심지어 최저임금이 더 낮은 지역으로 공장을 아예 옮겨버렸다고 해요(중국은 법정 최저임금이 지역마다 다르다더군요). 대부분 젊은 여성들인 GP노동자들은 꾸준히 투쟁 중이구요.
나중에 홍콩에서 온 젊은 친구에게 이 투쟁에 대한 책을 선물받았습니다. 그 책 제목이 “No Choice But To Fight”예요. 투쟁 말고는 선택할 길이 없는 노동자의 처지, 몸벽보를 붙이고 1인 시위를 하는 노동자의 뒷모습, 전혀 낯설지 않은 얘기들이죠.
12월 3일 ‘그날 밤’을 기억하라
1984년 12월 3일, 인도의 보팔(bhopal)이라는 지역에 있는 유나이티드 카바이드 살충제 공장에서 독가스가 누출되어 며칠 만에 8천 명의 지역 주민들이 사망한 일이 있었어요. 하지만 유나이티드 카바이드 회사는 물론, 나중에 이 회사를 인수한 다우(DOW) 케미컬 회사조차 이 지역의 정화 작업을 책임지지 않고 있다는군요. 그 결과 공장 터는 여전히 방치되어 있고, 흙과 물은 25년동안 오염된 채 남아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였더군요. 공장 터 주변에는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슬럼가가 있습니다. 주민들은 다들 병들어 있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달리 갈 곳도 없고, 안전한 물을 마실 수도 없이 그저 오염된 물을 퍼다 마십니다. 그래서 지난 25년 동안 모두 2만 5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주민들의 2세들은 눈이 없이 태어나거나 뼈가 구부러진 채 태어나고 있더군요.
왜 이들이 살충제를 탄 물을 마시며 살아가야, 아니 죽어가야 하는 걸까요. 너무 가슴이 아프고 화가 났어요. 인도에서 온 여성활동가는 이 사건을 좀더 널리 알리고, 12월 3일을 맞아 추모와 항의의 촛불시위나 1인 시위 등의 국제 행동을 요청했습니다. 한국에도 서울의 삼성동을 비롯해서 몇몇 곳에 다우 케미컬 회사의 사무소가 있더군요. 한국에서도 작으나마 연대의 행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보팔의 정의를 위한 국제운동’이라는 단체의 홈페이지(http://www.bhopal.net)에 가시면 이 사건에 대해 더 많은 얘기를 읽을 수 있고, 각 사무소의 위치도 알 수 있어요. 저도 꼭 뭔가 작은 행동이라도 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봅니다. 12월 3일입니다.
2009년 안로브 첫날 오전, 제가 캄보디아의 프놈펜에서 들었던 얘기들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이밖에도 석면 얘기, 인도의 광업 노동자 얘기, 그리고 중국과 인도, 인도네시아 등의 노동안전보건운동 네트워크 얘기를 조금 더 듣긴 했는데, 꼼꼼히 집중해서 듣지는 못했네요. 왜냐면 제가 준비해 갔던 삼성반도체 백혈병 노동자들의 투쟁과 반올림 활동에 대한 동영상을 틀려다가 문제가 조금 생겨서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했거든요. 일단 이번 호에는 여기까지 정리하구요. 다음 호에 뒷 얘기들을 이어서 더 써볼께요. 그때까지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