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는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의 의뢰로 2007년부터 3년에 걸쳐 《현대자동차지부 판매, 남양 조합원 직무 스트레스 실태조사와 대안마련을 위한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이 가운데 2007년 제1차 사업 주요 결과는 2008년 4월호 《연구소 리포트》를 통해 소개했고, 이번에는 제2, 3차 사업의 핵심 내용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글 싣는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직무스트레스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 영업 분야
(2) 직무스트레스 예방을 위한 제언 - 영업 분야
(3) 직무스트레스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 연구 분야
(4) 직무스트레스 예방을 위한 제언 - 연구 분야
현대자동차 영업, 연구 분야 노동자들의 직무스트레스(1)
- 영업 분야 노동자들의 직무스트레스
한노보연 상임활동가 콩
1. 들어가며
2007년 1차 사업 당시 설문조사에서 현대자동차 영업 분야 노동자들의 주요 직무스트레스 요인은 ‘조직체계’, ‘직무 불안정’, ‘관계갈등’ 영역으로 나타났다. 여성 노동자들은 이에 더하여 ‘직장문화’ 영역의 직무스트레스 위험도 높았다.이 결과는 현장의 역사와 경험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조직체계’ 영역의 직무스트레스가 높다는 사실은 현대자동차의 비합리적인 운영 구조와 관행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회사는 날마다 실적과 고객만족을 강조하지만, 정작 이에 따른 부담은 노동자에게 전가하고 있었으니까. ‘직무 불안정’ 영역의 문제는 1998년 대규모 정리해고의 경험과 그 이후 회사가 일상적으로 업무 통합과 ‘거점(영업 노동자들의 활동 거점, 즉 현대자동차 지점)’ 통폐합 등의 구조조정을 추진해온 경험을 반영하고 있었다. 노동자 사이의 갈등과 고립을 뜻하는 ‘관계갈등’ 영역의 문제는 지점 대 대리점, 지점 대 지점, 노동자 대 노동자로 분할 경쟁시켜온 현대자동차 영업 부문의 구조가 반영된 결과였다.
다만 《한국형 직무스트레스 요인 평가 도구》는 다양한 업종의 노동자들을 포괄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이므로, 이것만을 가지고 영업 부문 노동자들 고유의 업무 특성을 제대로 분석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가령 《한국형 직무스트레스 요인 평가 도구》에서는 ‘직무요구’ 영역의 직무스트레스 위험이 낮은 것처럼 보였지만, 육체적인 노동강도를 평가하는 ‘보그 지수’나 노동강도에 대한 주관적 평가, 업무 후 피로도 등 다른 지표들에서 확인한 이들의 업무 부담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또한 ‘직무자율’ 영역의 위험은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이는 재량권이 비교적 큰 영업 업무의 특성에 불과할 뿐, 노동자가 노동과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율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유하자면 이들의 노동은 사각의 링에 갇힌 채 공이 울리면 정해진 상대와 싸우고 공이 또 울리면 쉬는 권투 경기가 아니라, 언제 어디로 갈 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만인이 적이고 언제 어디에서 적을 마주칠 지 예상할 수 없는 정글에 가깝다.
심지어 이미 영업 분야 노동자들 상당수는 이런 질서에 순응해가고 있었다. 높은 재량권이 ‘자발적인’ 노동강도 강화를 낳는 상황, 혹은 노동자 스스로 노동강도를 강화시키는 범위 안에서만 허용되는 자율성. 이런 자율성을 과연 긍정적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이런 표준화 도구의 한계를 감안해서, 2008년부터 2009년에 이어진 후속 연구에서는 현장의 상황과 과거 경험을 좀더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개별 혹은 집단 면접 토론을 진행했다. 자, 이제 설문, 면접, 그리고 현장 자료들을 종합해서 분석한 현대자동차 영업 분야 노동자들의 직무스트레스 탄생의 과정을 살펴보자.
2. 직무스트레스 탄생의 토대
: 이윤 극대화를 위한 구조조정
현대자동차 자본은 1998년 구조조정을 통해 직영 영업 노동자 규모를 절반으로 축소하고 그만큼의 규모로 대리점을 양성했다. 이를 통해 차량 판매를 위해 필요한 인력 규모는 그대로 유지한 채 절반 가량의 노동력을 외주화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했을 뿐 아니라, 영업 노동자들 간의 경쟁을 개인-개인, 지점-지점, 지점-대리점 등으로 중층 강화함으로써 높은 시장점유율을 달성해왔다.
이제는 적극적인 인원 감축과 외주화가 완성되어 중단된 상태지만, 회사는 또 다른 형태의 구조조정을 쉬지 않고 밀어붙이고 있다. 현대캐피탈, 현대카드 등 계열사 확장, 자동차 판매와 관련된 금융, 보험, 중고차 유통 등으로의 사업 다각화, 자동차 판매․금융․보험․정비 업무의 통합, 통합 업무의 실시간 관리를 위한 ‘전자금융시스템’ 도입, 그리고 이들 사업의 거점을 통합하여 대형화하려는 시도가 몇 년째 계속되고 있다.
특히 지점 통폐합은 단순히 판매 거점들을 통폐합하여 전시장을 거대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신규 및 중고 차량 판매와 정비, 차량 용품 판매, 자동차 관련 금융과 보험 등 현대자동차의 모든 상품을 한 자리에서 판매하는 복합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뜻한다. 현대자동차는 이미 자동차 판매와 신용카드 사업을 잇는 ‘현대M카드’를 비롯, 지난 2006년 모 지역을 시발로 하여 ‘One-Stop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2007년 4월부터는 판매와 정비, 금융을 포괄하는 ‘블루서비스’를 개시했다. 조만간 이런 복합 거점과 사업 통합의 효율성이 확인된다면 현대자동차 자본은 이를 늘리는데 박차를 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 사업 다각화와 업무 통합에 따라 늘어나는 일은 기존 노동자들에게 전가되어왔다. 영업직 노동자들은 차만 파는 것이 아니라 카드도 모집해야 하고, 대출 안내도 해야 하고, 중고차도 사들여야 한다.
3. 직무스트레스 강화 요인 : 노동자 통제와 포섭 전략
인력감축과 외주화를 통해 형성된 지금의 판매 체계는 직영, 대리점, 그리고 대리점을 통해 형성된 비공식 판매망으로 다원화되어 있다. 회사는 이런 구조를 만듦으로써 판매에 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격화시켜 더 높은 실적을 달성할 수 있는 여건을 확보했다.
또한 자동차 판매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여러 부문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그 업무를 영업 노동자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 더 많은 이윤을 더 적은 비용으로 달성하는, 다시 말해서 노동자에게 별다른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더 많은 일을 시키는 구조를 만들어왔다.
이런 변화는 노동자들에게 고용불안과 업무하중을 증가시키고 노동자 상호경쟁을 격화시켜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현대자동차 자본은 노동자들의 반발과 저항이 집단적으로 조직되지 못하거나, 아예 인식이나 저항의 초점이 문제의 본질에 정확히 맞춰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현장 통제와 포섭 전략을 마련해 두고 있다.
이런 장치들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폭력적인 구조조정의 직∙간접 경험을 바탕으로 만성적인 불안감 조장, 둘째는 임금체계와 포상구조를 통해 실적과 돈을 이용한 포섭, 셋째는 고객만족을 명분으로 한 현장통제이다.
1) 폭력적인 구조조정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성적인 불안감 조장
1998년 경제위기를 명분으로 자행된 대규모 정리해고와 폭력적인 구조조정의 기억은 한국 사회 노동자들에게 보편적인 상처로 남아있다. 특히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에게는 이 때의 상처를 바탕으로 한 만성적인 고용불안감이 집단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회사는 고용불안감을 고착화, 만성화시켜 98년 뒤 십 년이 넘도록 현장 통제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조합원에 대한 부분적인 고용보장을 대가로 내거는 대신 다양한 구조조정 공세들을 관철시켜온 것이다. 여기에 교육과 언론을 통해 시시때때로 위기설을 유포하고, 적기 생산 방식에서는 너무도 당연히 초래되는 생산량의 변동조차 위기의 징조인 것처럼 선전하며, 관리자의 평가와 인간적 친밀함을 통해 개별 노동자들을 포섭, 통제해갔다.
이에 따라 현대자동차 자본의 전체 이윤은 결코 줄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시기, 특히 임단협 등을 앞에 둔 시기마다 노동자들은 항상 ‘회사가 지금 얼마나 심각한 위기상황인데 투쟁이 왠말이냐’라는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왔다.
현대자동차 생산공장의 경우, 이런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이 개별화되고 생활 임금을 회사에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잔업·특근을 통해 얻는 것이 당연하게 정착되어 왔다. 물량 감소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응은 ‘일이 줄어서 편해졌다’가 아니라 ‘임금이 줄고 고용이 위험해져서 안된다’는 방향으로 굳어졌다. 나아가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더 많이 일하기를 원하면서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다투고 갈등하기까지 한다.
노동조합과 활동가들은 이데올로기적 우위와 현장통제를 자본이 쥐고 있는 상황 속에서 조합원들이 원하는 방향에 따라 운동을 재구성해오는 우를 범해왔다. 정규직 조합원들의 고용 문제를 최우선에 두고 다른 사안들은 부차화시킴으로써 회사의 구조조정 문제를 막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 회사는 손쉽게 노동 유연화와 현장통제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생산 현장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순식간에 들어찼고, 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강도와 고용불안감은 오히려 증폭되는 악순환을 거쳐왔다.
고용불안감 때문에 노동자들이 더 큰 희생을 자발적으로 감수하고도 고용불안감을 덜지 못하고 자본의 이해만이 관철되는 현상, 2005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진행한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와 대안 마련을 위한 연구》에서는 이런 현상을 ‘고용이데올로기’라고 일컬었다.
폭력적 구조조정의 기억, 불안감의 만성화, 이를 바탕으로 회사의 구조조정에 저항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자발적으로 노동강도를 강화시키기까지 하는 노동자와 노동조합,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떨쳐지지 않는 불안감, 그래서 더욱 열심히 일하고 저항을 포기하는 노동자. 이것은 고용이데올로기 조장을 통해 현장을 통제하고 일상적인 구조조정을 관철해온 현대자동차 자본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영업 현장에서도 회사는 항상적인 위기설을 유포하는 동시에, 회사가 살아남으려면 지속적인 시장점유율 향상을 달성해야만 한다는 생각, 회사가 살아야 나도 살 가능성이 커지리라는 생각을 노동자들에게 심어왔다. 동시에 지점 통폐합이나 업무 자동화 등 일상적인 구조조정을 산발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현장에 뿌리내린 불안감은 ‘언제든지 짤릴 수 있으니 지금 한 대라도 더 팔아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자발적인 노동강도 강화를 조장하고 있다. 그리고 차량 판매를 방해하는 모든 요인들에 대해, 예를 들면 ‘생산직 동료들이나 산별 노조의 파업은 내 이익과 배치된다’, ‘대리점과의 경쟁은 부당하지만 어쩔 수 없다’라는 생각이 판매 현장의 노동자들 일상 속에 깊고 넓게 뿌리를 뻗어가면서 그 근본원인을 해결해갈 수 있는 조직적 경험과 단결력, 자신감을 저해하고 있다.
2) 실적 중심의 임금과 포상 구조 확립
아무리 만성적인 불안감을 조장하고 일상적인 구조조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이를 재생산한다고 해도, 회사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구조조정과 사업 다각화의 부담을 전적으로 노동자에게 떠넘기기만 해서는 업무 하중과 스트레스 가중으로 노동자들의 반발과 저항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필요나 판매 현장의 실제 조건을 기준으로 보면 지금 현대자동차 판매 현장의 임금이나 포상의 기준은 매우 비합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현재 체계를 고수하는 이유는, 실적 중심의 임금체계와 포상구조야말로 만성적인 불안감이 저항으로 이어지지 않고 노동자의 자발적인 노동강도 강화와 경쟁 몰입으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중요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영업직 노동자의 판매 수당은 판매 차량의 종류에 따라 정액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어떤 차량을 몇 대 팔았는지에 따라 급여의 규모가 크게 달라진다. 또한 개인이나 지점의 판매 실적에 따라 각종 수당이나 보조금의 규모도 달라지기 때문에 판매량은 임금의 거의 절대적인 결정 요인이라 할 수 있다. 2004년 현대자동차노동조합 근무형태개선을 위한 프로젝트 연구팀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주야맞교대 근무로 인한 건강장해 실태와 주간연속2교대제 도입방안≫ 보고서에서 단협근거자료집을 근거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영업직 노동자들의 기본급은 현대자동차 전 직군 평균에 비해 크게 낮고, 판매수당을 포함한 기타 변동수당이 기본급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영업직 노동자들의 총임금 중 통상급이 43%이고, 변동급이 34%이며 상여금이 23%로, 임금 총액이 판매수당을 포함한 변동급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기형적인 임금 구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판매는 자본의 지상 목표인 이윤을 달성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이며, 절대적인 판매량과 상대적인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판매 분야에서 자본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다. 따라서 현대자동차 자본은 판매 분야의 모든 것을 실적 중심으로 구성하고 있다. 기본급보다는 실적에 따라 임금이 크게 좌우되는 임금 구조, 실적을 바탕으로 한 개인 포상과 승진, 실적이 높아야 받을 수 있는 각종 업무 지원 뿐만 아니다. 개별 노동자가 이탈하거나 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점 단위로 집단적인 실적을 평가하여 우수 지점에게는 집단적 지원과 포상을 준다. 반대로 실적이 낮은 노동자는 임금이나 업무 지원상의 상대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뿐 아니라 동료들로부터의 고립과 장차 구조조정 대상의 될 수도 있다는 불안까지 떠안게 된다.
실적을 중심으로 짜여진 구조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노동자들이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보람과 긍지는 돈이다. 사람들의 구매욕을 제대로 읽어내고 차량 구입을 조언하고 지도하는 과정에서 느끼던 영업직 노동자들의 보람과 긍지는, 어느덧 구매자들로부터 ‘장사꾼’이나 ‘사기꾼’ 취급을 받곤 하는 비애로 대체되었다.
“IMF 전까지만 해도 내가 더 많이 아니깐 고객한테 어드바이스를 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근데 요즘은 차를 팔아야 한다, 그거밖에 없어요, 절박하게…. 자존심까지도 다 버렸어요. 어떻게든 차를 팔아야 한다는 생각만 있어요. 이제는 영업 노동자라는게 회의가 들 정도로 힘들어요. 영업직이라는 꿈이 다 무너졌어요. 어떻게 하면 (고객을) 빼앗아올까, 어떻게 DC를 해줄까…. 고객한테는 그런 게 절대적으로 평가되는 거니깐, 그게 너무 힘들어요.”
“(이면DC를 안하고 정가 판매를 하면) 친인척한테 차를 팔면서도 죄짓는 거 같고 미안하다는거죠. 사기꾼 되는 거예요. 정상적인 방법으로 (차가) 나갔는데도.”
이런 비애와 고충의 직접적인 동기는 인터넷 정보의 범람, 대리점과 대리점을 경유하는 수많은 비공식 판매망에서 무질서하게 벌어지는 가격과 사은품 경쟁 등이지만, 그 근본 배경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차량을 판매하여 이윤을 남기려는 회사의 판매망 다각화 전략에 있다. 결국 영업 현장의 노동자들이 자기 노동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방법은, 그야말로 자본주의적인 돈 그 자체에 남겨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은 단지 불안한 미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참고 일하는 것뿐만 아니라, 노동과정에서 받는 신체적, 정신적인 부담을 돈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자발적으로 노동강도를 강화시킨다. 임금 수준은 불안정하고 일상은 고되지만, 가끔씩 썩 괜찮은 실적을 달성해서 받아드는 돈이 그 고통을 잊게 해주는 진통제 역할을 한다. 그 진통제를 노동자들은 불합리한 현실을 초래해온 회사에 맞서 저항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 속에서 자신의 유일한 보상을 침해하는 다른 노동자들과 경쟁한다.
의식있는 노동자들은 이런 경쟁에 자신을 내던지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개별화된 저항은 회사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회사가 유지하고 있는 실적 중심의 임금과 보상 체계는 노동자들이 자발적 과로와 경쟁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도록 안내하는 자동보도(무빙워크)와도 같다.
3) 고객 만족을 명분으로 현장 통제 강화
실적과 함께 판매 노동자에게 강조되는 것은 고객만족(CS, Customer Satisfaction)이다. 현대자동차는 1994년 CS기획팀을 신설하고 1996년에 이를 CS 사업부로 확대하면서 판매, 출고, 정비 등 각 부문에 대하여 정기적으로 CS 모니터링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CS 아카데미를 통해 전사적 교육을 실시하고 각 판매 지역본부마다 CS 컨닥터를 선정하여 특별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정기 CS 캠페인을 통하여 우수지점 ․ 대리점 ․ 직원을 포상하고 있으며, 판매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 해피콜 제도나 전시장을 직접 방문하여 평가하는 미스테리 쇼퍼(mistery shopper)를 통해 수시로 판매 노동자들의 친절도를 평가하고 있다.
최근 현대자동차 자본은 ‘고객을 위한 혁신’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고객 우선 경영’을 경영 비전으로 제출하고 있어 이와 같은 교육이나 평가는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 예상된다.
이런 고객만족은 생산 현장에서 고객만족은 생산성과 품질 향상을 앞세우고, 판매 현장에서는 친절과 서비스를 앞세워 노동자들로 하여금 노동강도 강화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거나 자발적으로 노동에 헌신하도록 조장하는 역할을 한다.
현대자동차 자본은 고객만족을 사업 다각화와 업무 통합의 명분으로 사용하는 동시에, ‘경제위기’, ‘회사위기’ 등의 위기론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시기의 현장 통제 수단으로 적극 활용해왔다. 판매 현장에서도 영업직과 사무직을 통틀어 설문과 면접 조사를 통해 확인된 최근 몇 년 사이의 가장 두드러진 노동조건의 변화가 ‘고객 만족, 친절운동 등 현장 관리 및 통제’ 부분일 정도로, 회사의 고객만족 공세는 적극적이었다.
4. 직무스트레스의 영향
1) 사회적, 집단적 건강으로서의 대응력과 기풍 훼손
실적 중심의 구조와 고객만족을 내세운 현장 통제는 현대자동차 자본이 이윤 극대화를 위한 구조조정(영업 현장의 경우는 유연화와 사업 다각화를 필두로 한)을 일상적으로, 그리고 별 저항 없이 관철해나가기 위한 전략이다. 일부 고참들의 비민주적인 태도나 전근대적인 횡포가 아직 많은 영업 현장에 남아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 힘은 그리 위력적이지 않다. 그 보다는 합리적일 듯한 젊은 노동자들조차 전혀 반발하지 않고 수용하고 있는 실적 중심의 구조와 고객만족이라는 현장통제 이데올로기가 훨씬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이런 구조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노동강도를 강화시키고, 자신의 정당한 권리 주장을 중단하기도 한다. 대리점에서 볼 수 있는 무질서한 판매 경쟁이나 불합리한 실적 평가, 그리고 실제 노동과정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단지 점수를 깎이지 않기 위해 받아야 하는 CS교육 등에 대한 불만과 저항은 이런 현실을 의도적으로 초래한 회사를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화살은 다른 처지의 노동자들을 향하거나,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으로 돌아간다. 저항의 목표와 대상이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직원들이 점점 이기주의적으로 가는 거죠. 조합은 있어야겠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 동의해요. 왜? 위험하니까 언제 짤릴지 모르니까. 특히 선배들은 욕을 하기도 하고 회사 눈치를 보면서도 조합은 있어야겠다고 해요. 왜? 자기들 처음 들어와서 당한 게 있거든. 옛날에는 결재판 날라다녔죠. 개새끼 소새끼 소리 나오고, 욕 듣고 인간 이하 대우 받고 그랬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조합이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좀 될 수 있으면 편하게 자판기 조합이 안 좋냐. 쉽게 말해서, 될 수 있으면 (조합원들에게 투쟁하자고) 말 안하고 그냥 니들이 해라. 돈은 내라고 하면 돈은 내줄께, 이런 식….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끼고 있는 겁니다. 파업은 니가 하고 만세는 같이 부르고….
이런 현실의 배경과 본질을 온전히 이해하고,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이 아니라 이윤 제일, 실적 제일의 구조를 만들어 온 회사를 향해 저항해야 한다는 주장은 개별화되고, 따라서 무력화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노동자 단결 투쟁의 역사를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노동현장에 대한 노동자의 개입력을 강하게 발휘하고 있기는 하나, 전국 아니 전 세계를 무대로 한 현대자동차 자본의 전략 속에서 한두 군데 작은 지역의 저항은 그리 위협이 되지 않는다. 저항이 무력화되고 있다.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노동강도를 강화하고, 자본을 향해야 할 저항의 방향이 왜곡되어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 격화로 이어지고, 올바른 방향의 저항 세력은 개별화, 무력화된 상태. 이것이 바로 실적 중심의 구조와 고객만족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본이 의도했던, 그리고 실제로 현실화되고 있는 모습이다.
2) 노동강도와 스트레스 강화
만성적으로 조장되어온 고용불안감이 야기한 직무스트레스는 설문 조사에서 고용불안 영역의 스트레스 위험이 두드러지게 높았던 점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비록 직무요구 영역의 스트레스 지수는 그다지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리점과의 경쟁 때문에 차량을 판매하기가 한층 어려워지고, 일에 대한 보람이나 긍지마저 줄어들어 일하기가 더욱 고되진 영업 현장의 노동자들의 보편적인 경험이 각종 면접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그토록 실적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회사는 기본적인 영업 활동조차 지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합리적인 지원은 고사하고 실적을 올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도록 강요하며, 그 부담과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불합리한 조직 체계나 부적절한 보상에 의한 직무스트레스가 눈에 띄게 높은 수준으로 나타난 배경에는 이런 노동조건이 자리하고 있다.
(시장질서 문란을 해결할 열쇠는 어디에 있을까요?) 회사죠. 결국 회사 같아요. 어차피 (노동조합이) 전국에 있는 대리점 일일이 찾을 수 없을 거 같아요. 그만한 힘도 없다고 봐요. 회사는 DC해서 팔건 뭐해서 팔건.. 직원이 죽든 어떻게 되든…. 그런거 싫으면 나가라 이거야. 결국은 회사가 해야 하는데.
한편,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사업 다각화와 업무 통합의 결과로 파생된 중고차 판매나 대출, 보험, 카드 업무들은 모두 고스란히 영업 노동자들의 업무 부담으로 더해졌다. 설문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40.7%(영업직 노동자 중에는 40.5%, 사무직 노동자 중에는 42.9%)는 업무의 숫자나 종류가 늘어났다고 했다. 고객들을 대상으로 차량을 판매하면서 현대 카드를 모집하거나 고객들의 중고차를 글로비스로 넘기도록 권유해야 하며, 이와 관련한 각종 부수 업무를 직접 처리하는 등, 직접적인 차량 판매 이외의 업무가 증가한 것이다.
이로 인해 약 20%의 영업직 노동자들은 하루 근무시간의 연장이나 밀도의 증가(근무 중 여유시간의 감소), 주말이나 휴일 근무 횟수의 증가를 겪었으며,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인 30% 이상의 영업직 노동자들이 하루 여가시간의 감소를 경험했다. 공식적인 근무시간 이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고객 관리 등의 업무를 수행하느라 퇴근 후 업무량이 늘어났다는 뜻이다.
사무직 노동자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개인이 해야 할 업무의 종류가 늘어났을 뿐 아니라, 동시에 여러 가지 업무를 처리하게 되었으며, 업무 처리 속도도 빨라졌다. 이들 중 4분의 1 가량이 근무 중 여유시간의 감소를 경험한 배경에는 이러한 일련의 변화들이 작용하고 있다.
3) 건강 훼손과 일상의 잠식
판매실적에 따라 임금과 승진, 고용이 좌우되는 실적 중심의 구조 속에서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헌신하고 있었다. 일에 대한 보람이나 자존심마저 버려가면서 어떻게 해서든 차를 팔아 실적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노동강도를 완충시킬만한 정신적 자원마저 고갈되고 있는 상태였다. 휴일에 즐기는 스포츠나 레저는 본인의 건강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고객을 찾고 관리하는 영업 업무의 연장선에 있었다.
그 결과, 약 4분의 3에 달하는 판매 노동자들은 심각한 만성 피로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들 중 70% 이상은 피로의 원인을 업무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부담이나 일터에서의 인간관계라고 지목했다. 근골격계 증상을 갖고 있던 천여 명의 노동자들 중 약 85%는 자신의 증상이 업무와 관련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위궤양 ․ 고지혈증 ․ 치질 ․ 부비동염 ․ 알레르기성 비염 등 노동조건이나 스트레스와 관련이 높은 만성 질환들의 유병률이 일반 인구에 비해 높았다. 정신 건강의 위험을 뜻하는 사회심리적 스트레스 측정 결과, 건강군은 1.65%에 불과한 반면 약 44%가 고위험군으로 나타났으며, 27%는 중등도 이상의 우울 증상을 갖고 있었다.
5. 요약
앞에서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 그림과 같다. 현대자동차 자본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업무 다각화와 유연화를 추진해왔다. 유연화와 업무다각화는 노동자들의 업무 하중을 늘리고, 직무스트레스를 높이며,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건강을 훼손시켰다. 한편, 자본은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구조조정의 경험을 이용하여 만성적인 고용불안감을 조성하고, 이와 함께 실적 중심의 임금과 포상 구조, 그리고 고객 만족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있다. 이는 노동자들이 현재의 체제에 순응하면서 자본을 향한 저항이 아니라 ‘자발적인’ 노동강도 강화와 경쟁에 골몰하도록 조장한다. 그 결과 업무 다각화나 유연화는 더욱 더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방향으로 고착화되고, 이 모든 과정의 결말은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수준의 직무스트레스와 건강 훼손으로 전가된다. [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