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을 보면 ‘인권’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보편적인 권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권은 국가나 다른 누군가가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키고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각자가 자신의 인권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일상에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인권은 사람이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입니다. 억압과 착취에 길들여져 있었던 지난 세월 우리는 인권이라는 말을 감히 밖으로 꺼내 놓기 어려웠습니다. 도리어 인권을 대놓고 얘기하면 감옥에 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매시기 국가와 권력에 맞선 저항과 투쟁으로 그나마 지금은 대놓고 인권을 말할 수 있는 상황까지는 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갈 길이 더 멀다는 느낌이 듭니다.
노무법인 필 노무사 유 상 철
# 길가에 쓰러진 어린이에 대한 두 가지 반응
행인들이 붐비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 어린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한가로이 광장을 거닐던 2명의 어른이 이를 똑같이 지켜봤다. 한 사람은 서둘러 달려와 어린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몸에 뭍은 먼지까지 깔끔하게 털어주었다. 다른 한 사람은 곁에서 지켜보며 어린아이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혼자서 일어나라!’ 옆에서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던 어린아이의 부모심정은 어땠을까?
부모라면 당연히 달려와 어린아이를 재빨리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인가? 아이의 자립심을 위해 스스로 일어나도록 해야 하는 것인가? 육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는 주체적이지 못하다.
내담자는 몹시 흥분한 얼굴과 격앙된 어조로 ‘따다다다다....’ 사연을 쏟아 놓기 바쁘다. 상담위원이랍시고 천천히 말씀하시라고 하자 ‘댁한테는 감정은 없는데 오늘은 할 말이 있어서 온 것이니 내 말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있어라’라고 냉랭하게 잘라 버린다.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는 내담자는 출소 후 인권위원회를 찾았다. 교도관에 의한 인권침해에 대해 상담을 하자 비록 1년이 지났지만 진정 사건은 접수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인권위원회의 진정기간은 사건이 발생한 날로부터 1년을 기준으로 하지만 1년이 지난 경우라도 인권위의 권한으로 사건을 조사할 수 있다. 인권위에 진정을 접수하고 돌아간 후 접수한 진정사건을 조사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단다. 차라리 ‘아예 포기하라’고 했으면 모르는데 진정을 접수하라고 해 놓고는 조사를 할 수 없다는것을 이해 할 수 없었다. 내담자는 법무부 인권조사과에 찾아갔고 얼마 전 해당 교도관에 대한 징계가 이루어졌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인권위를 찾은 것이다.
자신은 어린아이가 쓰러져 있으면 일으켜 세워 다친 곳이 있는지 살펴볼 사람인데, 인권위원회는 넋 놓고 지켜만 보다가 어린아이가 일어서면 그 때 가서 관심을 보이는 척 옅은 미소를 날려주는 사람이라는 말을 끝으로 1시간 가까운 항변을 마치고 돌아갔다.
인권위원회가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일상에서 자신의 인권, 타인의 인권을 위해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인권위원회는 그나마 인권의 사각지대, 무차별적인 인권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유의미성은 있지만 여전히 쓰러진 어린아이를 곁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인권의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 싹이 노랗다면..........!
겨우내 강추위는 많은 시련을 안겨 주었다. 손이 시려워 이유서를 제대로 쓸 수 없을 정도로 매서웠던 추위는 사무실의 화분들에게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비닐하우스도 만들어 주었건만 하루하루 시들어가던 화분은 끝내 잎을 떨어내고 쓰러져 갔다.
누렇게 변색되는 잎들로 힘겨울까봐 보일 때마다 시든 잎을 잘라 주다가 더 이상 매말라가는 화분을 보는 것이 고통스러워 과감히 뿌리채 뽑아 버렸다. 그리고 화분이 작아서 힘겨워하는 고무나무를 옮겨 심어 주었다.
식물은 싹이 노라면 잘라 버린다. 그래야 뿌리나 줄기의 성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도 싹이 노라면 잘라 버려야 하는걸까?
자녀가 학교적응에 어려움을 겪었고 다른 학교로의 전학을 권유하는 선생님의 말을 따라 타 학교로 전학을 결정하였다. 얼마 후 전학 온 학교의 상담선생님은 정신과 진료를 권유하였고 해당 학생은 병원에서 한 동안 치료를 받고 다시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가 급우와 다툼이 있었다. 내담자의 자녀와 급우는 모두 다쳤지만 상호간에 합의하여 잘 마무리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담자의 자녀는 집에서 쉬도록 하고, 다른 급우는 일정한 체벌을 받도록 한 후 내담자의 자녀에게 무조건 전학만을 권유하는 상황에 놓였다고 한다. 내담자의 자녀가 예전부터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면 그에 대한 다양한 상담지도 등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텐데 교육기관에서는 무조건 전학만을 요구하는 상황이 너무도 안타깝다는 것이다. 물론 진정을 접수해서 사건에 대한 인권위의 판단을 받아 볼 수 있는 사안이다.
싹이 노란 식물을 솎아 내듯이 사람을 솎아 낼 수는 없다. 사회나 학교생활에 부적응하는 것은 한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한 문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풀어야만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을 식물처럼 솎아낼 수는 없다. [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