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역 건설노동자 근골격계질환 유해요인 실태조사 결과 보고서에 대한 단상"
전 전국건설노동조합 대구경북건설지부 노안부장 이 정 래
1. 문제의 인식과 출발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이 노랫말처럼 우리 건설노동자들에게도 과연 꿈이 있을까? 노가다라는 이름으로 공존의 그늘에서 조차 배척당하고 소외당하며 일 년의 절반을 반실업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 뜨겁다 못해 푹푹 찌는 뙤약볕 아래서, 살을 찢는 추위와 칼바람에 맞서 발판도 설치되지 않은 비계파이프 위를 넘나들고 그 무거운 자재를 인양하는 사람들. 사람이 하는 일에 못할 것이 없다는 무모한 직업정신에 세뇌되어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망가진 몸뚱아리가 자신의 탓인 양 파스 한 장, 막걸리 한 잔으로 일상의 고단함을 달래는 사람들에게도 꿈이 있을까? 과연, 이들이 꿈꾸는 희망이 뭘까? 그것을 위해서 비록 최소한의 것일지라도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없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분명, 노동의 일상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는 사실임에도, 우리의 정당성과 억울함을 주장할 근거가 매우 취약했었다. 기껏해야 지난 2002년 8월에 발표된 최은희의 논문 ‘일부 건설업 노동자의 건강실태와 관련요인’에서 밝혀진 건설현장의 일반적이고 현상적인 유해요인과 건강실태에 대한 조사 분석이 다였다.
따라서 우리에겐 역량과 준비된 정도가 아니라 당면한 현실의 당위성에 따른 과제가 요구되었다. 이는 하루 평균 3명의 노동자가 북망산천으로 떠나가고 8명의 노동자가 응급실로 실려 나간다는 신뢰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빌어먹을 노동부 그들만의 통계 때문이 아니었다. 건설현장에서 다발하는 노동재해에 대해 무방비한 상태로 자포자기해버린 국가기관의 무능에 대한 질타만도 아니었다.
무너져 내린 건물더미 아래서 피범벅이 되어 “왜?”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죽어간 노동자들. 온 몸에 유기용제가 가득한 레미콘 범벅을 뒤집어쓴 채, 부러지고 잘린 팔다리를 부여잡고 울부짖는 노동자들이 원인도 모른 채 현장을 떠나고 또 그렇게 돌아오는 현실이 반복되고 있는 것 때문이었다. 정작 재해를 당해도 찍소리 한 번 못하고서 그 아픈 몸뚱아리를 이끌고 노동해야만 하는 현실. 회사의 협박과 강요에 의한 공상처리가 무엇을 뜻하며, 결국엔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는 현실 때문이었다.
과거의 병력이나 개인의 신체적 특성을 빌미로 직업적 인과관계를 부정당하며, 재해의 원인 규명에 대한 의학적 근거조차 재해자 스스로가 밝혀야 하는 말 같지도 않는 억지논리에 ‘산재불승인’이 남발되고 있는 현실이 곧 우리 건설노동자들에게는 사형선고와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먼지 밥, 물밥으로 한 끼를 대충 해치우고 물량을 맞추기 위해 죽을 동 살 동 모르고 일만을 하는 이들에게, 아파도 아픈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문제로 치부하는 노가다들에게 스스로가 노동자의 자긍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지키기 위한 방편들이 마련되어야 함은 절박하고 소중한 바램이었다.
2. 미친 현장, 미친 노동의 현실
나는 지금 순간에도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상영하듯 글을 쓰고 있다. 십 수 미터의 허공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고 있는 곡예사처럼 그 모든 위험과 고된 노동을 온 몸으로 받아 안은 건설노동자들의 삶을 상상하며 소위 노가다 판을 말하고자 한다. 지나치는 곳마다 철근을 고정시키는 결속선과 콘크리트 타설시 거푸집이 터지지 않도록 결속해주는 Form-Tie가 삐져나와서는 눈과 맨살을 위협하고 있고, 곳곳에 대못과 철근들이 전갈의 독침처럼 불쑥 솟구쳐 있는 곳이 건설노동자들의 작업현장이다. 순간의 방심으로 현장에 널브러져 있는 각종 부자재들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고, 한순간 끼이고, 추락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몸뚱아리 그 이상의 것을 팔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작업현장의 일상적인 현상일 뿐이다. 이번 실태조사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졌듯이 건설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위험요인 노출빈도가 가장 많은 것은 중량물 작업에 있다. 특히 중량물 작업 중 62.1%는 중량물을 무릎 아래 혹은 팔꿈치 높이 이상으로 드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38%는 작업자 키 이상 또는 이하의 높이에서 자재들을 다루는 것으로 밝혀졌다. 작업자가 취급하는 자재의 무게는 75% 정도가 10Kg 이상이며, 그 중 약 22%는 작업자가 혼자 취급하기 힘든 20Kg 이상의 자재들을 혼자서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허리 부위의 작업 자세를 보면 36.6%가 20도 이상 허리를 굴절시키며, 22.2%는 60도 이상 심하게 굴절된 상태로 작업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어깨와 무릎 부위 역시 상완이 40도 이상 들린 상태에서 작업하는 경우가 57.2%로 나타났으며, 어깨 높이 이상으로 팔을 올려 작업하는 경우도 약 24.5%였다. 그리고 작업 중 약 30% 정도는 하체가 안전하게 지지하지도 못한 곳 또는 불안정한 자세로 작업을 실시하며, 쪼그림-한 다리/두 다리 구부림의 작업 자세 빈도가 35%로 나타났다. 목의 경우에는 자재를 인양하거나 협소한 공간에서 작업을 하는 경우 목을 30도 이상 굴절시키거나 비튼 상태에서 작업하는 빈도가 20.6%로 나타났으며, 손목은 90% 이상 수평이 아닌 자세를 취해 작업을 하고, 손목이 15도 이상 과도하게 비틀리는 등 손목에 집중적인 부담이 가는 경우는 15.2%로 나타났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이런 단순 반복적인 작업 자세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다리를 구부리고, 허리를 비틀고, 목을 뒤로 젖힌 상태에서 팔을 머리 위로 뻗어서 망치질을 해대는 기상천외한 복합적인 자세로 노동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이다.
결국, 이번 실태조사를 통해서 밝혀진 사실은 건설노동자들의 노동은 그 자체로서 근골격계질환의 발병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불법하도급이 만성화되어있는 건설현장에서 가중되는 노동으로 신음하는 노동자의 울부짖음조차 강제되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했다는 점이다.
OECD 국가들 중 노동시간이 제일 많고 노동재해 발생률이 가장 높다는 것은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건설노동자들의 노동재해 발생건수와 발생률이 여타의 국가들보다도 월등히는 아니더라도 상대적으로라도 높아야 하는 것이 상식이거늘 이놈의 나라에서는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도대체 이 나라의 산업현장에서 얼마나 안전예방 조치가 잘되어 있기에 이런 얼토당토 않는 현상이 발생하는가 말이다. 앞서 밝혀진 것처럼 건설노동자들의 작업현장은 안전에 대해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있는데, 그곳에서 건설노동자들의 노동과정이 전적으로 근골격계질환 발병의 필연적인 요인들에 의해 강제되고 있는데도 빌어먹을 그들만의 통계에서는 정반대의 사실을 말할 뿐이다.
나는 결코, 제조업이나 다른 여타의 업종들의 노동환경과 노동과정을 무시하고자 함이 없다. 또한 모르는 바도 아니다. 단지, 노동부의 통계 발표에서 나타난 사실을 토대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함이다. 미국의 건설노동자들이 한 해 평균 1만 명당 41.4명의 근골격계질환 발병자들이 발생하고 있는데 반해, 이 나라의 건설노동자들은 평균 2.3명이 발생한단다.
건설노동자들의 근골격계질환자의 발병률은 1만 명당 2.3명으로 제조업(12.0명)이나 운수업(5.9명) 등보다도 훨씬 낮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인가를 명확히 해야만 한다. 제조업 등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근골격계질환에 대한 문제인식을 작업장 내로 국한하지 않고, 개별노동자의 문제만으로 국한하지 않고 사회적 의제로 발전시키면서 작업환경 개선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온 것을 감안해 볼 때 황량한 불모지와 다름없는 건설현장에서의 이런 통계치는 말 그대로 언어도단인 것이다.
3. 건설노동자와 근골격계질환이 필연적 인과관계를 갖는 본질적인 문제
건설현장에서 다발하고 있는 대표적인 모순들은 최저입찰제에 의한 폐해와 불법하도급, 유보임금, 장시간 노동, 만성적인 고용불안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현장의 노동자들이 노동안전보건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우리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실천적‧이론적 노력들에 대해서 매우 인색해 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 결과 우리들은 지난 10여년의 세월 동안 투쟁으로 쟁취해 왔던 소기의 성과물들조차 빛을 발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외면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외람된 답일지는 몰라도 나는 감히 ‘우리의 운동방향과 실천들이 사상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삶이 자본에 의해 규정되어지고, 그것에 의해 전적으로 강제되어 살아가고 현실, 즉 자본주의체제의 뿌리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미친년 널뛰듯이 국가의 경계를 넘고,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 럭비공처럼 온 지구를 헤집고 다니며 노동자들의 골수를 빨아 먹는 ‘자본’이라는 놈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인식만이 건설현장에 널브러진 모순들을 타파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최소한의 생계비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열악한 저임금에 있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가계급의 이윤축적 계획에 따라 진행되어 온 과학의 발명과 발전이라는 재앙에서 기인한다. 기계의 발명이 가져다준 참혹한 현실은 노동자들이 평생을 바쳐서 쌓아온 숙련공의 모든 권한과 자격뿐만이 아니라 생산과정의 주체라는 인간성까지도 빼앗아 버렸다. 주체와 객체가 뒤바뀐 혼돈, 노동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계를 위한 단순보조자’로 객체화되어 저임금의 노예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생산과정에 있어서 노동자들에게 안긴 세 번째의 치명타는 과학의 발전이 가져다 준 대량생산과 속도에 기준한 생산성 향상이란 것이다. 이것은 생산과정에서 노동자가 투여한 노동력에 대한 반대급부로 작용하며 생산 공정에서의 직접적인 이윤착취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상시적인 고용불안과 실업 등의 증폭된 착취의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건설현장에서의 최저입찰제가 정부의 발표대로라면 분양단가를 낮추고 집값을 안정시켜서 국민경제에 엄청난 효과를 거뒀어야 했고, 또한 시공사 선정을 둘러싼 조합 비리를 줄이고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세도 잠재워야 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의 극한적인 상황으로 확산되었었다. 공사 중인 건물은 물론 완공된 건물마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동시에 노동자들의 고통스런 비명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를 때리지만 스쳐지나가는 바람소리일 뿐이었다. 갓 입주한 집에서 비가 새고 곰팡이가 피는 등의 부실시공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아파트 분양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만 했었다.
우리 건설노동자들에게 있어서 다단계불법하도급은 생존권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생명권까지도 무참히 침탈하는 만 악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 말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가장 오래되고, 가장 성능이 좋은 이윤 착취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일 한만큼 가져가라!’는 자본가의 유혹 앞에 자신의 육체가 골병들어 죽어가는 줄 모르고 하루 이틀 일하다 보니 우선은 돈이 되는가 싶어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어 끝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수렁에서 안착 되어버린 도급제다. 여기에는 나날이 일자리가 보장된 것도 아닌 현실, 젊어서 힘 좋을 때 열심히 해서 돈을 모으자는 자가당착적인 과욕 등의 심리적인 요소도 기여했겠지만 그 이면에는 매우 계획적이고도 치밀한 자본가계급의 계략이 숨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밝혔듯이, 자본가는 노동자들에게 열악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그리고 한층 강화된 노동의 강도를 통한 생산성 향상 등의 복합적인 요소들로 최대한의 초과이윤을 빨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설현장의 불법다단계하도급은 이 조건에 가장 완벽하게 들어맞는 환상적인 악마의 기술인 것이다. 이것이 수 십 년 동안 변하지 않는 방법으로, 가장 확실한 빨대를 꽂아 노동자들의 골수를 빨아 먹고 있는 건설자본의 본질이다. 이것들이야말로 건설노동자 근골격계 질환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Ⅵ 맺음말을 대신하여 — 남겨진 숙제들
참으로 아쉬움이 많이 남은 사업이었다. 물론 이 한 번으로 끝날 사업이 아니었다. 적은 수이지만 함께한 모두가 이 사업을 시작으로 많은 꿈을 꾸며 중장기적인 계획들을 만들어 가고자 했다. 정말, 우리 건설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숨 한 번 크게 쉬고 담배 한 모금 태울 수 있는 여유를 되찾는 것이 근골격계질환뿐 만이 아니라 노동재해를 예방할 수 있는 지름길이란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현장사업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고 싶었었다.
지금의 착잡한 심정은 나를 비롯해 그 누구도 탓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당시 함께했던 현장의 동지들이 ‘걷기모임’을 통해서 작지만 아주 소중한 삶을 나누며 서로를 감싸 안아가고 있다. 비록 우리의 역량에 비해 준비가 부족했고, 보다 조직적이지 못했고, 보다 적극적인 실천의지로 사업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해도 우리들이 체험하고 체득한 결과물들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다. 조사기간 중 현장에서 보고 만난 건설노동자들의 그을린 모습에서 새삼스럽게 느꼈던 무한한 가능성을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들의 것으로 만들어내어야 한다.
이 사업으로 인해 나에게는 특별히 주어진 의미가 있다. ‘존재와 실천’에 대한 분명한 길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노동안전보건운동이라는 것이 특화된 또 다른 운동의 한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체변혁운동의 궤도에서 항상 함께하며 때로는 그 핵심을 관통하는 중심이라는 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노동자계급의 생명권을, 나아가 민중과 인간의 생명권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노동안전보건 운동이 시혜와 봉사의 운동에 젖어있지 말고, 기능적 운동에 빠져만 있지 말고 ‘노동자의 사상에 근거하여 실천하는 변혁운동’으로 거듭나기 위해 몸부림쳐야 된다는 것이다.
끝으로, 현실에 널브러져 있는 무수한 과제와 고민들을 하나로 묶어세워야 한다. 노안활동가들 모두가 힘들고 외로운 길을 오랜 세월동안 묵묵히 지켜왔다. 그 과정에서 빚어진 말 못할 사정들, 갈등, 갈라섬 등등이 있겠지만 지금의 시기는 전국적 투쟁과 전국적 전선을 요구받고 있다. 이 나라의 모든 노동자들이 상시적인 고용불안에 떨고 있고, 폭증하는 불안정고용 노동자들의 삶이 위태롭기만 한데도 국가와 자본은 방치만 하고 있다. 아니,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숨통을 끊어버리고자 발악을 하고 있다. 우리, 미약한 힘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했으면 한다. 우리들 모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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