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비둘기> 정유미언니, 힘내세요

63-평화비둘기

정유미 언니, 힘내세요.

뉴욕, 미술인 최성희

“그동안 우리 농민들은 350만 농민들의 주권 사수를 위하여, 7천만 겨레의 안전한 먹거리 생산을 위하여 묵묵히 피땀 흘려 일해 왔습니다.”


△ 2006년 6월초, 워싱턴 세계은행 건물 앞.
FTA 반대 시위에서의 유미언니

“그동안 우리 농민들은 350만 농민들의 주권 사수를 위하여, 7천만 겨레의 먹거리 생산을 위하여…”

옆에 있는 농민 대표의 팔꿈치 주의에 그제야 유미 언니는 자신이 영어로 번역해야 할 것을 깜박 잊고 한국말로 그의 말을 반복하고 있음을 알았다.

사람들이 웃고 언니도 웃고. 언니의 해맑으면서도 넉넉한 웃음이 다큐멘터리 작가 수 해리스의 비디오를 통해 흘러 나왔다. 그녀는 언니의 한때의 룸메이트이자 절친한 친구인 미국 운동가다.

2006년 6월 초 미국 수도 워싱턴의 세계은행 앞에서 많은 한국 활동 단체 대표들, 교민들, 미국 운동가들의 한-미 FTA 반대 시위가 뜨거웠을 적 일이다.


△ 유미언니 기금 행사 전단의 앞면

2006년 10월 7일, 그로부터 넉 달이 지난 지금, 국제 행동위원회, 뉴욕재미 공동체 운동 단체인 노둣돌 등 언니의 동지, 친구들은 맨하탄의 작은 공동체 교회에서 청주에서 투병 중인 언니의 암 치료 기금을 위한 행사를 벌였다.

언니 자신도, 사람들도 아무도 6월에는 언니가 그렇게 큰 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자주 보진 못했지만 6월에 만났을 때 오히려 이전보다 더 건강해 보이기까지 했었다. 인권학을 공부한다고, 무척 바쁘다고 했다.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언니가 너무나 든든하고 고마웠다.
2001년 언니가 Korea Truth Commission의 이름으로 국제 행동 위원회 동지들과 함께 노근리 사건 등 미국의 한국전쟁 중 범죄 행위를 조사하여 두툼한 책자를 펴낸 것에 관심을 가진 것을 계기로 언니를 알게 되었다. 언니가 인권학을 열심히 공부하여 미국의 북한에 대한 부당한 인권 시비를 박살내길 바랬다. 그리고 언니는 실제로 지배언론의 개입으로 혼란스러운 나와 사람들의 머리를 두들겨 깨웠다. NED(National Endowment Democracy)의 정체를 국제 행동 위원회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알리고 주의시켰다.

잔약해 보이는데도 몇 년을 꿋꿋하게 거의 홀로 국제 행동 위원회에서 한국의 자주 평화 통일 투쟁을 국제화시키는 데 공헌한 언니의 존재가 없는 국제 행동 위원회, 재미운동은 생각할 수 없다.
FTA 시위에 참가한 모든 사람은 공감하리라. 사람들의 뜨거운 애정과 감사어린 박수를 받으며, 언니는 세월과 함께 넉넉해져가는 웃음으로 사람들과 워싱턴에서 작별했었다. 곧 한국을 방문한다 하였고 아무도 그것이 1년 이상 언니를 보지 못할 것임을 언니도 사람들도 깨닫지 못했다.


△ 노둣돌의 노래 "처음처럼"

무슨 일이 있었던가.
몸이 좀 부풀었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것이 이미 몸의 상당 부분에 퍼져간 위암 때문이었음을… 기금 행사에서 터지려는 울음을 겨우 참으며 언니의 병과 치료 상황을 상세하게 알리는 언니의 남자친구 쟈니를 통해서 진단이전부터 언니가 매일 아침마다 소화고통으로 시달려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어쩜, 그렇게 아무 내색도 없이…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실감이 안 난다.

기금 행사에서 국제 행동 위원회 대표인 사라 플랜더를 비롯, 많은 동지들이 그들이 알고 있는 언니를 애정으로 떠올리고 노둣돌 친구들이 “바위처럼”을 힘차게 불러 주었다.
헤더 등은 언니를 통해 알게 된 광주항쟁을 가슴 뭉클하게 노래로 불렀고 청소년 운동 단체의 미아는 “바람에 들려오는 대답”을 서정적으로 들려주었다. 유고 연대 투쟁을 통해 언니를 안 음악가 밀로스의 찡한 장난감 피아노 연주가 있었다.

필리핀 민다나오 출신의 무슬림 여성운동가는 언니와의 한 대화를 이렇게 기억했다.


△ 10월 7일 기금 행사 중 청주로부터 언니의 육성 녹음 인사를
진지하게 듣는 사람들

“몇 년 전 내가 한 회담에서 민다나오의 미국에 의한 민중 학살리포트를 읽으며 울음을 중단할 수 없었을 때 같은 판넬에 앉았던 유미가 말했다. ‘울어, 역사는 그렇게 읽혀져야 하는 거야’라고.”

역사는 눈물로서 읽어야 함을 일깨우는 사람.

그런 깊고 넓은 영혼의 소유자였기에 그렇게 몇 년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가. 항상 어딘가 외로워 보였다. 나는 유미 언니가 거의 온 몸으로 낯선 땅 미국에서 한국의 고난과 투쟁을 껴안다시피 하며 살아왔던 짧지 않은 세월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나는 결코 그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땐 강하지만 좀 차가워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언니를 강한 규율과 인내심으로 뭉친, 주위의 변화에 관계없이 자기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항상 일하는, 능력 있는 사람으로 떠올렸다. 나는 ‘염소자리 생일이야. 염소자리’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언제부턴가 언니는 친근한 사람이었다. 나는 한국의 투쟁을 다룬 모든 행사에서 언니에게 항상 모든 책임을 가볍게 떠 넘겼었다. 언니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반석이었고 나는 언니 주위를 장난꾸러기 공기처럼 떠돌아다닐 수 있었다. 언니가 없는 지금, 믿고 기댈 반석이 없는 지금, 이 혼란과 당황스러움을 어디에 하소연 할 것인가.

사라 플랜더는 언니를 통해 사사로운 감정으로 분열되었던 동지들이 다시 하나로 모일 수 있었음을 일깨웠고 폴 등 많은 사람들이 언니의 강한 포커스 능력이 언니의 병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늘 강렬한 이야기꾼이었던 래리도 “유미, 꼭 돌아와서 명상하는 법을 가르쳐줘. 나는 잘 안돼. 늘 존단 말야”하고 애교를 부렸고 한국의 투쟁 때 마다 나타났던 장님 에드는 누구보다 많은 돈을 기금으로 앞서서 내었다. 최근 다리에 이상이 온 게리는 버팀목을 잡으며 언니의 병 투쟁이 얼마나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가를 말했고 “유미, 꼭 건강해서 돌아와.”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언니가 없는 자리는 허전하고 혼란스럽다. 그리고 언니로 인해 하나로 모인 사람들로 따뜻하고 아름답다.

오디오를 통해 언니의 여전히 젠 체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남한 운동가들의 헌신, 애정으로 진단, 치료 받을 수 있었어요. 저는 꼭 뉴욕으로 돌아가고 한국의 자주를 위해 다시 싸울 것입니다. I miss You. I love You.”

언니, We love you. We miss you. 잘 쉬어.

지금은 언니 몸만 생각하고 꼭, 꼭 완쾌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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