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인권운동 길찾기] 한국 인권운동의 발자취

인권운동 길찾기 1 | 한국 인권운동 약사

연재를 시작하며


언제부터인가 인권운동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의문들을 낳았다. 우리가 하는 인권운동이 제대로 하는 것인가? 우리는 서로 다른 개념으로 ‘인권’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권운동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나? 왜 이렇게 인권운동이 맡아야 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나? 인권활동가들은 더 바빠지는데 인권운동의 영향력은 오히려 줄어드는 이유는 무얼까? 그럼, 인권운동은 위기가 아닐까?
이런 의문은 나만의 의문이 아니었다. 현안에 대응하기에도 바쁜 수많은 활동가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그런 것이었고, 인권운동의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고 답답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인권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으로 상당히 많아졌지만, 인권운동에 대한 고민이나 연구는 없이 인권현상에 대한 보고와 약간의 분석이 있을 뿐이었다. 결국 인권운동에 대한 고민은 인권활동가의 몫으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인권활동가들은 현장을 뛰어다니기에도 벅차고, 이런 고민들은 종종 술자리 방담으로 끝난다. 그러면서도 인권활동가들은 올해의 평택 투쟁에서 보듯이 새롭게 제기되는 인권현안들에 몸을 던진다.
인권의 역사를 추적하였던 지난번의 연재에 이어 이번 연재는 한국 인권운동의 고민들을 풀어내는 것으로 기획되었다. 우리가 쓰는 인권의 개념, 인권운동론, 인권운동의 연대 문제, 그리고 의제들, 국가인권위원회와 같은 국가기구와의 관계, 국제연대 등에 대해서 나름의 고민들을 풀어내고 토론하고자 한다. 주로는 필자의 생각을 정리해서 제기하는 식으로 되겠지만, 공식, 비공식적인 토론을 통해서 여러 활동가들의 문제의식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10회를 예정하고 시작하는 이 연재가 인권활동가들과 현실에서의 인권운동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연재되는 글에 대해 반론이 있다면 언제든지 일정한 지면을 할애하여 게재할 것도 약속한다.
그럼 먼저 연재의 첫 회는 한국의 인권운동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자.


한국 인권운동의 시작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도 논쟁거리일 수 있다. 아직까지 한국 인권운동사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정리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인권상황은 전쟁 시기를 지나고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정권의 폭압적인 탄압에 맞서는 자연스러운 인권적 항의가 이어졌지만, 그것을 모두 인권운동이라고 하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가령 1970년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여 노동자들의 인권현실을 고발하였던 사건은 인권사로 기록될 수 있지만 인권운동으로 볼 수는 없다.



교회, 인권운동의 깃발을 들다


운동은 지속적이고, 조직적이며, 의식적인 활동이다. 그래서 인권의 옹호와 발전을 위한 운동조직이 탄생하여 활동하는 것을 중심으로 인권운동사를 정리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 그렇게 볼 때 한국에서 처음으로 인권운동이 등장한 것은 앰네스티 한국지부가 탄생하였던 1972년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앰네스티 한국지부는 그 상징성은 있지만, 국내에서 인권옹호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치지 못했다.


한국인권운동의 효시는 1974년 4월 11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가 설립된 것으로 잡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조직은 그간의 정치범동지회 수준, 또는 그 가족들의 모임 수준을 넘어 지속적인 인권옹호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당시 박정희는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학생과 재야세력들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긴급조치를 발동하였고, 민청학련,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1천여 명을 구속하였다. 이로부터 교회라는 공간을 활용하여 기독교적 신앙에 기반을 두고 인권옹호활동을 펼치는 전국적인 조직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조직은 목요예배를 정기적으로 가졌고, 주간 <인권소식>을 발행하였다. 양심수의 석방, 고문의 폭로, 반대운동 등 정치범 중심의 인권운동을 펼쳐 나갔으며, 이후 한국인권운동의 전통이 양심수 석방 중심의 운동으로 성격 규정되는 것에 크게 기여한다.


같은 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설립되어 KNCC 인권위원회와 비슷한 활동을 전개한다. 아울러 개신교와 천주교에서는 도시산업선교회, 노동사목, 크리스천 아카데미 활동 등을 통해서 산업화 시대의 노동운동을 지원하고, 초기 노동운동을 개척하는 역할도 해냈다. 아울러 기독교 신·구교는 농촌사회의 선교활동을 통해 농민들의 인권옹호활동도 펼치게 되며, 이중에는 가톨릭농민회의 활동이 특히 눈에 띤다. 당시 박정희 독재체제에서는 교회라는 공간 외에는 회합, 토론의 장이 없었던 관계로 자연스럽게 교회 조직이 이런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독재의 억압에 맞서는 인권단체들 속속 등장


1980년대 들어서서는 전두환 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역량들이 확대되면서 인권운동도 더욱 활발하게 진행된다. 워낙 혹독한 탄압이 자행되던 시기였으므로 대부분의 운동에서 인권문제는 필수적으로 제기되었고, 이는 운동세력의 자기보존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1980년대 중반에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약칭 민가협, 1985),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약칭 유가협, 1986)가 설립되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지속적인 운동조직이 탄생되었다. 전문가 그룹으로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약칭 민변, 1988), 민주주의법학연구회(약칭 민주법연, 1989)도 탄생하게 되면서 인권운동이 기존의 교회운동 중심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여전히 그 관심 영역은 양심수의 석방과 고문반대와 같은 정치적 자유의 확보에 활동의 중심이 주어진다. 그 외에도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장애인인권운동이 제기되고, 1987년에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설립되어 장애인운동사에서 비로소 독자적인 인권운동 조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987년 2월에는 전국의 21개 여성단체가 모여 한국여성단체연합(약칭 여연)을 발족하였다. 여연은 사회 전반의 구조적 문제 속에서 여성문제가 발생함을 자각하고 전체 사회의 변화 속에서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여성단체들은 여연 이전에는 ‘여대생성추행사건대책협의회’,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대책위원회’ 등과 같은 일시적인 공동대책위원회로 활동하던 것을 상시적인 논의와 대응을 위한 연대 틀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와 같이 1980년대까지 인권운동은 독자적인 운동이었다기보다는 민주화운동의 한 영역으로 기여한 ‘민권운동’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이때의 인권운동은 정치적 탄압이 극심한 상황에서 정치적 자유의 확보를 최우선의 목표로 삼았다. 이런 과정에서 국가권력과 치열하게 맞서는 운동의 전통을 형성하게 된다. 현재의 인권운동이 다른 운동영역과는 달리 국가 영역에 포함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이로부터 기인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의 충격


1993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는 한국 인권운동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때 민간단체들은 공동으로 참가단을 조직하고, 비로소 국제사회의 인권논의를 접할 수 있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 이후 사회운동은 급격히 분화하면서 자기의 자리를 찾아갔지만, 여전히 양심수 석방운동이라는 좁은 틀 내에 묶여 분화가 늦었던 인권운동은 이 대회 참가를 계기로 독립적인 운동으로 자신의 자리를 정립하기 시작했다.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 참가했던 인권단체 등 10개 단체는 1994년 한국인권단체협의회(인권협)을 결성하였는데, 인권협은 인권현안에 대한 협의, 공동자료실 운영, 공동의 인권교육, 국제연대 등을 과제로 삼았다. 인권협은 1995년 국가보안법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한 이래 내부의 이견 차이로 의미 있는 활동을 중지하였다.


이 시기는 장애인인권단체, 성소수자 단체, 이주노동자 인권단체 등 정체성에 기반을 둔 소수자 인권운동이 급격히 등장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또 1993년 설립된 인권운동사랑방은 인권운동의 전문화, 대중화, 국제화를 모토로 제시하면서 양심수 석방운동에 한정되었던 인권운동의 지평을 실천으로 확장해갔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인권전문신문인 <인권하루소식> 발간, 인권교육의 도입, 인권영화제 개최 등으로 새로운 운동의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등장은 세 가지 의미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첫 번째는 대통령이 국정지표로 인권을 제시하면서 국가 공무원들이 앞 다투어 인권을 말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이제는 인권이 인권단체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상황, 즉 ‘인권의 세속화’가 급물살을 타면서 진행된 것이다. 두 번째로는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폭력적인 구조조정이 단행됨으로서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사회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인권운동에서 양심수의 문제, 국가보안법의 문제 등 첨예한 정치권력과의 대결을 야기하는 전통적 부분은 1999년 준법서약서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장기수들이 모두 석방된 이후 많이 완화되었다. 시민·정치적 권리 영역에서도 정치범을 넘어서 감옥 일반에 대한 문제 제기로 나아가고, 신체의 자유와 관련한 일반인들의 인권침해 부분으로 확장되어갔고,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인 절차들이 속속 도입되었다.


이 시기에는 과거의 냉전, 독재체제 하에서 발생한 국가범죄에 대한 과거청산 문제도 집요하게 제기되어 5.18이나 제주 4.3, 의문사와 같은 분야는 일부 진전을 이루어내기도 했다. 1990년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 1995년 고문방지조약 등에 잇따라 가입하면서 한국은 유엔의 주요 국제인권조약 당사국이 되었고, 이로부터 유엔의 이들 기구들의 감시를 받게 된다. 인권운동은 유엔의 구제절차들에 호소하고, 정부 보고서를 반박하는 민간보고서를 제출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면서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인권기준들을 한국사회의 인권을 재는 잣대로 활용하게 된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등장


1998년 이후 3년간 인권운동, 시민운동, 민중운동, 여성운동 등 주요 영역을 망라하는 단체들이 모여서 설립한 ‘올바른 국가인권기구 설립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독립적인 국가인권기구의 설립을 위한 활동을 인상적으로 전개하게 된다. 특히 국가인권위원회를 법무부 산하의 특수법인 정도로 위치 지워 관리하려던 법무부의 의도를 인권활동가들이 두 번에 걸친 단식농성으로 무산시키면서 독립적인 국가기구를 만들어냈던 것은 소중한 결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법이 제정된 2001년 4월 이후 법률에 대한 평가가 갈리고, 국가인권위원회 설립과정에 참여하게 된 단체와 비참여 단체 간의 갈등은 인권운동의 연대를 어렵게 만들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등장하면서 그동안 인권운동이 개척하고 축적한 성과들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거기에 국가기구들이 1998년 김대중 정부의 등장 이후 인권옹호기관을 표방하며 인권행위자로 이미지 변신을 하기 시작했으며, 일부분에서는 스스로 인권개혁을 진행하고 있다. 2005년에 들어와서는 사법개혁이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사법부도 인권의 한 주체로 등장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고, 인권사각지대로 남아 있던 군대에서도 인권적 제도가 도입되려 하고 있다. 이처럼 국가권력의 ‘인권화’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인권경찰’이니 ‘인권검찰’이니 하는 국가권력의 인권화는 법적인 절차의 중요성을 강화하게 되어 나름으로는 국가권력을 통제하는 길이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시 국가권력의 억압적 성격을 은폐, 기만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인권운동이 국가권력의 감시를 넘어 국가권력을 견인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어쨌건 김대중 정부 이후 국가가 적극적으로 인권을 제기하면서 1990년대의 인권운동이 국제사회의 인권기준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진보성을 담보하던 시대는 지나고, ‘인권’ 개념의 재구성을 둘러싸고 국가-자본-민간운동진영 간의 투쟁의 격화를 예고한다. 인권의 제도화는 인권운동의 재구성을 요구하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인권운동의 도달 지점


1990년대를 경과하면서 예전의 신·구교 기독교가 주도하였던 인권운동은 종교 인권단체 중심의 운동이 쇠퇴하고, 인권운동 내부도 단일한 입장을 갖기보다는 다양한 입장이 공존하는 네트워크 방식의 운동으로 전환되어 갔다. 2000년대에 들어와 이라크반전운동, 최근의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 등을 계기로 등장하는 평화권 또는 평화적 생존권, 그리고 중요하게 제기되는 생존권과 빈곤, 노무현 정부에서도 여전히 지지부진한 과거청산, 거기에 차별금지법의 제정(장애인 단체들은 장애인차별금지법)을 포함하는 우리 사회의 차별의 해소, 정보산업의 급격한 발전에 따른 정보인권의 침해 문제 등이 모두 인권운동이 새롭게 고민하고 대응해야 하는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또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보수진영의 공세, 자본의 급격한 자유화에 편승한 경제 권력화의 모습 등에 따라 인권운동이 대응해야 할 관심사는 주체의 성장이 더딘 것에 비해서 너무도 급격히 확장되고, 인권운동의 지형은 매우 복잡하게 그려지고 있다.


이런 인권운동의 다양한 과제들에 대응하기 위해 인권운동은 사회권, 평화권, 경찰감시, 인권교육, 청소년노동인권, 행형, 정보인권 등을 주제로 다루는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대응하고 있다. 또 2004년부터는 전국 36개 인권단체로 구성된 ‘인권단체연석회의’(인권회의)를 구성하여 일상적인 연대활동을 전개하고, 1년에 한 번 전국의 인권활동가들이 모이는 인권활동가대회도 2002년부터 매해 열리고 있다.


여기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한국 인권운동 30년사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정리해 보았다. 이 인권운동의 역사는 분명 어려운 여건에서도 인권을 통한 사회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문제의식을 놓지 않고 헌신해온 인권활동가들의 공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인권운동은 내외적으로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다음 회부터는 인권운동이 처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분석해보고, 그런 문제들을 같이 토론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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