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 그 애매하고도 곤란한
호칭은 아무래도 관계 안에서의 소통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관계의 기본은 소통일 테고, 소통을 위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언어라는 도구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원활한 대화를 위한 방식들을 최대한 사용해야 한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마다 호칭 없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친밀하지 않은 사이에서는 직책이나 직함을 붙여서 말을 붙이고, 좀 더 친해지면 가족 간에서 통용되는 호칭을 쓰게 되며(언니, 형, 이모, 삼촌 등) 여기서 더 지나면, 위아래가 없어진다(야~ 박○○~!).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이름 뒤에 붙는 호칭이 짧아지고, 짧아진 호칭은 그 만큼 가까운 관계를 표현해준다.
그러나 명색이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타인을 부를 때마다 깍듯하게 붙여주는 우리나라의 존칭들은 가끔 친밀도를 형성하는데 방해를 하기도 한다. 매일 붙어있는 사람들이라면 친밀도 형성이 그만큼 쉬워지겠지만, 약간 어정쩡한 간격을 두고 만나는 사람들은 친밀도를 쌓기도 전에 호칭에 관성이 붙어버려 정작 점점 친밀도를 쌓아도 더 친해질 수 있는 호칭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가 힘들어져 버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씨라는 호칭으로 어색하게 시작했다가, 점점 친해지고 나서도 호칭이 입에 붙어버린 나머지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를 하다가도 호칭을 부를 때면 갑자기 ○○씨라는 재미없고 무미건조한 결말로 농담을 마무리 하게 되는 것이다. 어색해지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어찌나 ‘동방예의지국’의 분위기가 강한지, 직함이나 직책을 제대로 붙여서 부르지 않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학교 다닐 때 한 교수가 과 학생이 ‘○○선생님’이라고 호칭했다는 이유로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을 본 적도 있다. 이거야 말로 부를 때마다 ○○○ 간호사님, ○○○ 생활설계사님, ○○○ 유치원 교사님 이라고 부르는 것과 뭐가 다른가?
주변 사례 두 개
#1. 내가 아는 선배가 다녔던 어린이 집은 학생과 교사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서로 이름을 그냥 부르고 반말을 했다. 어느 날 새로 온 학생에게 ‘여기는 모두 반말을 써’라고 했더니 어린이집의 식사를 관리하시는 분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넌 가서 밥이나 해!”
#2. 대학 때 후배들 갈구고 깐깐하게 굴기로 유명했던 한 선배, 참가자 대부분 서로 반말을 하는 캠프에 참여했다가 개과천선해서 돌아왔다. “난 걔가 나랑 정신연령이 비슷하다는 걸 알고 충격 받았어!” 권위나 관습보다 사람의 진짜 가치를 알아 볼 수 있었던 기회였단다.
호칭이나 존칭이 사람에 대한 존경이나 예의를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내 별칭으로 부르건 ‘이 자식아!’라고 부르건 나와 같이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호칭을 쓰건 간에 그들이 나를 무시하거나 경멸한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다. 오히려 싸가지 없는 공무원들에게 ○○과장님 따위의 직함을 부를 때 경멸의 의미를 담아 부를지언정.
그렇다고 해서 호칭이나 존칭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존댓말이나 호칭 등의 구체적 표현 방식으로만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방식을 연습해 온 우리로서는 언어라는 도구가 없이는 타인에 대해 충분히 배려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호칭 따위 붙이지 않고도 불러줄 수 있도록 별칭(레이)을 달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레이씨/레이선생님’이라고 나를 부른다. 그건 그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라 호칭 없이 존중해주는 방법을 연습하지 못해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말을 쓰는 것도, 호칭을 지켜서 부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그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다. 지금은 꽤나 보편적으로 쓰이는 ‘형’이라는 호칭은 남성들이 손위 형제를 부르는 호칭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라 문제가 되고 누나라는 호칭은 남성들이 손위 여성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그래서 ‘여성’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강제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나는 정작 중요한 것은 호칭의 형식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어진다. 내가 얼마나 진정으로 타인과 소통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반말이나 호칭을 없애는 방법은 분명 좋은 것임에 틀림없다. 형식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던 존중과 권위라는 허울을 벗어던질 수 있는 방식이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가 아직 존댓말을 사용하는, 형식적 존중의 언어 구조를 벗어던지지 못한 사회에서 반말 사용은 사례 #1과 같은 일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한편 나 역시도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 반말을 듣게 되는 것에 쉽게 익숙해지고 싶어지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걸 피하기 위해 나는 늘 약삭빠르게 쉽게 반말을 하지 않는다.
어쨌든 고민이다. 누군가와 제대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만 한다. 그가 나에게 와서 꽃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이제는 만날 때마다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그런데 이 말을 묻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럴 땐 어떻게 하지?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