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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인터뷰는 어렵겠네요.” KTX 조합원을 소개해주기로 한 이철의 철도노조 미조직특위 대표는 만나자마자 쓴 웃음을 지었다. 공교롭게도 인터뷰 약속 날짜에 공권력이 투입된단다. 벌써 철도공사 정문 앞에는 병력이 새까맣게 배치됐고 경찰들은 건물 주변 차량을 이동시키고 매트리스를 까느라 분주하다. 경찰의 시간표야 어찌됐건 KTX 노조 서울지부 부지부장 한효미씨를 소개받았다. 바쁜 경찰들과는 달리 조합원들은 몇 가지 소지품을 가방에 챙기고 석방 후 연락망을 확인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언제 시작될지 모를 침탈을 앞두고 느긋하게 인터뷰를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부지부장인 탓에 몸이 안 좋아 보이는 이들에게 미리 빠져나갈 것을 설득하느라(대부분 실패했지만) 간간히 자리를 옮겨 다니는 그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한가한 이야기나 건네길 한 두 시간, 드디어 병력 투입이 시작됐다. 조합원들의 연좌농성과 여경들을 앞세운 경찰의 강제연행. 동영상을 통해 봤던 익숙한 그림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 와중에 구호를 선창하는 효미씨.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이란 열심히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며 무사히 연행되어 탈 없이 나오길 바랄 밖에. 그런데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다. 농성장에서 끌려나온 그녀는 전경버스가 아닌 승용차에 태워져 나가는 것 아닌가. 차를 막고 이유를 따져 묻고 행선지를 캐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서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구속은커녕 탈출을 했다는 것. 며칠 뒤 만난 인터뷰는 당연히 한효미씨의 무용담으로 시작됐다.
영화의 한 장면 같던 그날
“차가 정문을 나와 유턴을 하자마자 차 앞에 철도국장님이 막아선 거예요. 순식간에 차는 연행소식을 듣고 달려온 어머니들과 학생들, 민주노총 간부들에 에워싸였죠. 양쪽 문이 벌컥 열렸다 닫혔어요. 창문도 내려진 채 문도 잠그지 않았던 거죠. 다시 문이 열리고 ‘나와’라고 누가 소리를 치는데 그때까지도 무슨 상황인가 이해가 안 됐어요. 그런데 양 옆에 탄 여경들이 한명은 이쪽 팔을, 한 명은 내 목을 껴안는 거예요. 그제야 탈출해야 되는구나 생각이 들었죠. 차가 출발하려 하자 사람들이 차 앞 범퍼를 들었다 내렸다하고, 양쪽 여경들은 머리채를 잡혔는지 끌려 내려지고. 어떻게 내렸는지도 모르게 차에서 나왔는데 여경이 다시 붙잡자 한 아주머니가 내 딸이라며 나를 와락 껴안았어요.
어서 도망가라 길래 찻길 건너편으로 갔죠. 사람들이 잔뜩 모였는데 ‘여기 있다!’고 소리칠 것만 같았어요. 난간을 넘어야 인도로 들어서는데 손을 내미니 사람들이 잡아주더라고요. 골목에 접어들자 공공연맹에서 온 한 분이 거리를 두고 따라오면서 ‘뛰지 마라’, ‘오른 쪽으로 돌아라’ 하며 길안내를 해줬죠. 얼마 가지 않아 형사 한 명이 ‘저기다, 잡아라!’ 하고 쫓아오는데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풀려서 도저히 뛸 수가 없는 거예요. 이제 잡혔다 싶었는데 돌아보니 없어요. 나중에 들었는데 학생들이 달려들어서 막았다고. 정말 운이 좋았죠. 골목을 한참 돌아 공공연맹에 도착해서 동료들 연행 소식을 들으니 나만 빠져나온 게 미안한 생각이 들면서 그때서야 막 눈물이 나오더라구요.”
어느새 80일을 훌쩍 넘긴 파업. 기차와 열기구, 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고도 남았을 날들을 산개투쟁과 농성을 거듭하며, 서울역과 국회 헌정기념관, 철도공사와 강금실 캠프에서 연행만도 수차례 당하면서도 KTX 조합원들의 파업은 큰 흐트러짐 없이 질기게 가고 있다. 지금 KTX 노조는 철도노조 용산기지 사무실에 농성장을 새로 마련하고 투쟁의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중이다.
“올해 3월 1일 철도노조 파업과 함께 시작했죠. 넉넉잡아 한 달이면 끝날 줄 알았어요. 그러다 제발 반팔 입기 전에, 제발 모기 나오기 전에 하면서 오늘까지 왔죠. 지금 목표는 100일 전에 끝내는 것으로 바꿨어요.
처음 채용하면서 홍보했던 준공무원 대우, 정규직화, 고용보장 등등 사탕발림이 거짓말로 밝혀지는 데는 일 년도 걸리지 않았어요. 근무연수에 따라 임금 차등을 두어야 한다며 임금을 올려주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들어온 기수 임금을 깎는 거예요. 어느 네티즌이 100기쯤 가면 한 푼도 못 받겠다고 했다죠? 의무적으로 가입된 철도유통노조에도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어서 작년 5월부터 이곳 철도노조로 와 교육을 받기 시작했죠. 해준 것도 없으면서 유통노조는 사용자와 함께 협박과 회유를 했지만 상급노조를 철도노조로 바꾸는 투표에서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찬성이었어요. 그러니까 고용승계를 못하겠다며 철도유통이 징계다 해고다 하는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내기 시작했죠.
문제들이야 다 말할 수도 없죠. KTX 개통 첫날 새벽까지도 누가 차를 탈지, 타면 어떤 차를 몇 시에 타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어요. 나 같은 경우 새벽 두시가 되서야 철도유통(KTX 여승무원 위탁관리를 맡고 있는 철도공사 자회사)에서 목포행 새벽 다섯 시 차를 타라고 연락이 왔죠. 철도유통은 우리를 관리할 경험도 능력도 없었어요. 첫날만이 아니라 그 후로 한 참 동안 어떤 사람은 열흘 동안 하루 쉬며 일하고, 어떤 사람은 일주일동안 계속 쉬고…. 게다가 필요한 물품이 고장 나면 우리 돈으로 고치고 KTX에서 빌려주는 휴대폰이 없어지면 우리가 그 비용까지 물어야 했어요. 반면에 공사 정규직원인 팀장만이 책임과 권한을 갖고 있어 우리가 처리했던 민원업무 모두가 팀장이 한 것으로 됐죠. 분실물을 하나 찾아주는 것도 다 팀장이 한 거로 말이죠. 우리는 분명히 일을 하고 있는데 한 일이 없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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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장이라도 외주위탁을 주겠다"
“그렇지만 지금도 최초 KTX 여승무원이란 자부심이 있어요. 항공운송과를 나와 유학을 준비했고 뉴질랜드에 있는 학교에 붙기도 했지만 부모님의 만류로 KTX에 들어왔죠. 운행이 시작되고 처음 한 달간은 잦은 고장에 여러 불편들을 현장에서 승객과 대면해서 해결해야 할 사람이 우리밖에 없어서 정말 고생했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어요. 굳이 여승무원이 필요 있냐며 차라리 운임은 낮추라는 사람도 있는데 티켓에 포함되는 우리 인건비가 200원이래요. 그런데 안전문제뿐만이 아니라 장애인들, 특히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나 시각장애인 같은 경우 우리 도움이 절대적이죠. 혼자 여행하는 아이들이나 노인 분들도 그렇고.
작년 말이 되자 철도유통이 공사에 실적보고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근무평점을 매겨 재계약근거로 쓰려고 쉬는 날까지 불러 교육을 시켰는데 여기에 항의하는 조합원들을 노조 간부들과 함께 징계를 하면서 상황이 악화됐어요. 공사는 사태가 심각해지자 너희들이 자회사를 설립해서 지부장이 사장하고 너희들끼리 운영하라고까지 했지만 그러다 공사가 위탁회사를 바꾸면 말짱 헛일이죠. 지금 관광레저란 자회사로 이적하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무늬만 정규직이지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건 똑같잖아요.
우스개 소리로 우리도 나중에 사장이 되면 꼭 외주위탁하자 그래요. 관리 쉽고, 해고 너무 쉽고, 책임회피 하기 딱 좋고. 결국 문제의 해결은 공사 정규직화란 것을 모두들 너무나 잘 알게 되었죠. 우리가 정당한 일을 하고 해답도 분명히 알고 있으니까 지금도 꿋꿋이 투쟁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시작된 KTX 파업 투쟁의 농성장에는 진풍경이 있다. 휴식시간이면 저마다 십자수를 놓는 것이다. “투쟁이 끝나면 십자수 전시회를 여는 게 꿈”이란 효미씨. 대부분 학교 졸업 후 첫 직장이었을 이십대 초중반의 여성들이 긴 시간 투쟁해오면서 어려움도 많고 그만큼의 고비도 있었으리라.
“정기적으로 찾아와서 건강을 돌봐주는 한의사 선생님이 계신데 맥을 짚어보면 다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래요. 왜 안 그렇겠어요. 그래도 싸움 안 나고 이만큼 온 것은 십자수 덕택도 있어요. 철도노조가 파업을 접고 복귀하면서 우리 요구안이 합의안에서 빠졌을 때도 고비였죠.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누가 대신 해줄 것도 아니고 우리 갈 길을 가는 거죠. 조합원들도 큰 동요는 없었어요. 미리 교육 충분히 되어서, 정말 교섭이 어렵게 진행되면 막판에 우리 요구가 빠질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상황을 사전에 공유한 거죠. 산개투쟁을 마치고 모여서 ‘우리는 간다, 우리 싸움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결하자!’고 농성을 결정했어요.
철도노조에서도 우리들의 투쟁에 아낌없이 최선을 다해 지원해주고 있어요. 해고자가 나면 해고자도 책임지겠다며, 처음부터 끝까지 이 투쟁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결의를 해준 덕분이죠. 일부 언론에서 말하듯 누가 누구를 버렸다는 말에는 절대 동의 못하죠.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투쟁하고 있다는 점만 봐도 우리는 지금 행복하게 싸우고 있는 거죠.”
"우리는 갈 길을 간다"
부지부장이란 직책 때문에 농성장에서 조합원의 외출, 장기 병가자 관리 등 내부 조직관계 일을 맡고 있는 효미씨는 투쟁을 하면서 농담조로 인간관계가 많이 나빠졌다고 한다. 파업과 농성이 장기화되다보니 자연히 이탈자도 생기지만 그 외에도 외출, 외박 등으로 조합원들과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진다. 하기야 이 화창한 봄날에 누가 농성장에 앉아 구호를 외치고 싶을까. 인터뷰를 하던 도중에 장기 병가자였던 한 후배가 보낸 파업을 접겠다는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럴 때 제일 속상하고 힘들어요. 복귀 시한으로 발표한 날짜가 다가오고 해고 통보가 날아오고 그러면 흔들리죠. 이탈자도 생기고. 연행이나 여론몰이 이런 것 보다 조합원들이 빠져 나갈 때가 가장 힘들어요.
같이 살던 선배 언니도 산개투쟁에서 돌아오면서 이탈해서 복귀했죠. 파업 기간 중에 생일이라고 케이크까지 사와서 축하해주던 언니였는데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는 거예요. 복귀했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지 그만두고 곧 결혼한다고 해요. 당연히 결혼식에 가봐야 하지만 안 갈 거예요. 그냥 몰랐던 남처럼 생각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편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러면 정말 견디기 힘들 거 같아서….
이탈자들, 저마다 이유가 있겠죠. 정말 형편이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복귀하는 경우에는 서로 할 말이 없죠. 그것 말고도 집단생활이나 파업 자체가 싫어서,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어 보여서 나가는 경우도 있겠죠. 아무리 우리가 정당하다고 하지만 경찰에 연행당하고 공사 사람들에게 욕하고 화내고…, 하기 싫죠. 누군들 하고 싶겠어요.
결국 떠난 사람들과 남아있는 사람들의 차이는 가치관이랄까 생각의 차이 때문인 것 같아요. 파업을 하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진짜 사는 거란 생각이 들거든요. 빨리 끝났으면 싶고 힘들고 하지만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승리에 대한 확신도 그래요. 결국 우리가 만들어가는 거잖아요. 누구는 ‘너희들보다 더 열악하고 힘든 비정규직도 많은데 왜 너희만 그러냐?’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제일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아줌마 될 때까지 일 할 거냐?’, ‘한창 때야 예쁘게 봐주지’, ‘젊었을 때 어서 돈 벌어서 결혼해야지’ 하는 말들이예요. 그야말로 쓰다 버리는 소모품으로 우리를 생각하고 있다는 거죠. 이 싸움을 하면서 우리는 소모품이 아니라 노동자다란 것을 알게 됐어요. 쉬는 날인데도 명절이라고 불려나가 한복 입고 인사하고 그랬다니까요. 그게 잘못 됐다는 걸 알았어도 불이익을 받을까봐 항의도 못하면서….
민주노동당에 피신해 있을 때 세상에 노동자도 참 많고 비정규직도 참 많지만 자신이 노동자임을 자각하는 사람, 그래서 투쟁하는 사람은 정말 적다는 얘길 어떤 간부가 해줬어요. 그래서 이 투쟁이 소중하고 중요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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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에서 가장 강력한 노조가 될 것"
‘파업이 노동자의 정치학교’라면 투쟁이야말로 세상살이의 교양필수란 생각이 들었다. 파업을 시작하면서 연하의 애인과도 헤어져야 했지만 서로 힘든 시기 잘 챙겨주지 못했는데 이제 노조 일에 전념하게 되어 오히려 다행이라는 효미씨. 성남에서 물리치료사를 하면서도 가대위(가족대책위) 활동에 재미 붙였다며 위로하는 언니와 용돈을 받던 처지에서 이제 보태주는 처지로 바뀐 남동생은 그녀의 든든한 후원자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공사현장에서 다치셔서 장애를 갖게 되셨어요. 그때부터 어머니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셨죠. 어린이집 봉고를 운전하시거든요. 지금 계신 곳이 한 4년쯤 되었는데 며칠 전에 정규직으로 될 것 같다는 소식을 받았어요.”
그녀도 정규직이 되었다는 소식을 하루라도 빨리 전하고 싶으리라. 스물다섯에 KTX를 타기 시작해 이제 스물일곱. 그녀는 서른에 어떤 모습을 그리고 있을까.
“민주노총에, 철도노조에 가장 강력한 노조가 생길 거예요. 거기 간부를 하고 있겠죠. 아, 그리고 우리는 서비스업이니까 자체 연구팀을 꾸려서 서비스개발을 하며 정말 칭찬받는 철도 서비스의 전문가가 되어 있을 거예요.”
인터뷰 강곤 | 기자
사진 박김형준 |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