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99년 봄 ‘만성 골수성 백혈병’이 그를 찾아왔다. 생사의 갈림길. 그는 운 좋게 여동생의 골수를 이식받아 살아남았다. 혈액형과 염색체가 바뀌고, 손발톱과 머리카락이 새로 자라면서 그가 다시 찾은 것은 생명만이 아니었다. 투병생활을 거치면서 그는 다시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살아온 삶이 운동을 하게 만들었다
“유신 때 사춘기를 보냈고 고3때 광주사태가 났지만 사실 그런 건 잘 몰랐어. 다만 살아온 게 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 같아. 중학교 2학년 땐가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가사를 다 탕진하고, 수십 년 살았던 동네에서 도망치듯 이사를 갔지. 지금 김포공항 가다보면 인공폭포 있는 데쯤인데 당시엔 판자촌이었고. 폐차가 된 버스 두 대를 놓고 하나는 집으로 하나는 식당으로 고쳐서 먹고 살았어. 버스를 밀면 방이 두 칸 나와요. 온 가족이 버스 한 대에서 잠을 잤지. 밥 먹으러 오는 사람들은 주로 중장비 일꾼들이었고. 어느 날 학교 마치고 집에 오니 버스 창문이 다 부서졌더라고. 철거반이 와서 그런 거지. 대학 1학년 때까지 그렇게 살았어요.”
대학을 스스로 ‘자르고’ 시작한 현장 활동을 정리한 것은 87년 6월 항쟁 직후의 일. 서울로 그를 불러들인 것은 고교생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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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음에 진 빚 때문에 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
<푸른나무>는 그가 운동을 하면서 만든 진보적 출판사로 3년 만에 『거꾸로 읽는 세계사』란 베스트셀러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던 그는 92년 운동을 그만두고 우연히 접한 지역사회개발 컨설팅을 배워 경영 컨설턴트가 된다.
“내 경우에는 소비에트가 무너지고 그런 것은 별 영향을 못 미쳤던 것 같아요. 그것보다는 80년대 같이 운동을 했던 친구들 중에 고문 받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친구, 도박하다 폐가망신 한 친구, 운동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건강을 잃은 친구, 이런 모습을 보면서 회의가 들고 지쳐갔던 게지. 대개 10년 넘게 언더에서 고생했던 친구들인데 사회에서 전혀 자기 자리도 못 잡고 내팽겨쳐지는 현실을 접하며 희망을 잃었던 것 같아.”
아프지 않았다면 다시 운동을 하지 않았을 것
“99년 백혈병 판정을 받았는데 마누라하고 10살, 7살 아이들이 걱정이었지. 당시만 해도 글리벡이 없었으니까 다 죽어야 했거든. 죽는데 좀 오래 걸리는 만성이어서 맞는 골수를 못 찾으면 3, 4년간 급성으로 갈 때까지 죽는 걸 기다릴밖에 달리 할 일이 없는 병이지. 맞는 골수를 찾아 이식해도 살 확률이 반밖에 안 되는데 나는 운이 좋아서 여동생 골수를 이식하고 이렇게 살았지. 골수이식이란 게 몸이 완전히 달라지는 거거든. 컴퓨터 하다 자꾸 다운되면 하드를 밀고 다시 까는 거랑 똑 같은 거지. 그런데 그게 정품이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까 자꾸 오류가 생기지. 똑같은 골수란 게 있을 수가 없으니까, 아무리 맞는 골수를 이식해도 부작용이 생겨요. 인공적으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까니 성치가 않는 거지.”
골수이식을 받고 그는 아내와 요양할만한 서울 근교의 집을 구하러 다니다 그만 피로가 겹쳐 대상포진에 걸리고 만다. 출산의 아픔과 비교되고는 하는 대상포진의 흔적은 아직 그의 이마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후유증으로 그는 ‘다행히’ 한 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그런데도 골수이식을 한 그가 먹을 일도 없는 ‘글리벡’의 약값을 낮추려 운동에 뛰어든 까닭은 무얼까. 그는 ‘마음에 진 빚 때문’이라 답한다.
“골수이식 하기 전에 이미 빈털터리가 됐어. 친구들과 후배들이 3년 동안 치료비와 생활비를 대주면서 우리 식구를 먹여 살렸지. 그때 글리벡이 나온 거야. 백혈병 환자 중에 충남대 교수가 있었는데 인터넷으로 글리벡 실험 데이터를 계속 지켜봐왔어. 약효가 엄청났던 거지. 환자의 97%가 약에 대한 반응을 보여. 게다가 먹는 약이고 암세포만 공격을 해. 기적이지. 그 양반은 먹어보지도 못하고 죽었지만 그 실험결과는 환자들 사이에 퍼져서 다들 먹어보고라도 죽어봤으면 좋겠다고 했지. 그리고 시판이 됐는데 약값이 매달 300만원인 거야. 황당한 거지. 더 기막힌 건 야매로 먼저 약을 구해 먹은 사람들이 검사를 하니까 데이터가 막 정상으로 돌아오는 거야.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지.
그런데 약값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떻게 내릴 수 있는 지 아는 사람이 없어.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다국적 제약회사가 어마어마한 곳이라 해도 환자들이 몇 개월 죽을 정도로 싸우면 그깟 약값 하나 못 내리겠나 싶었지. 그래서 내가 나서서 인터넷에 호소문도 쓰고 사람들을 모았지. 2001년 7월 13일 노바티스사 앞에서 환자복 입고 싸움을 시작하면서 세상에 처음 알려졌어. 우리는 30~40명 모였는데 기자가 두 배 가까이 왔어. 그 과정에서 백혈병 환우회도 만들고. 노바티스 앞에서 시위, 약값 결정하는 건강보험 심사평가원 앞 시위, 약값 심의하는 약제전문위원회와 복지부 건정심회(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의 회의에 가서 약값은 우리가 내는데 환자도 없이 너희가 왜 결정하느냐 따지고, 특허청에 강제실시 청구, 헌법소원, 인권위 진정, 스위스 본사 앞 시위, 할 수 있는 것 다 했어.”
김상덕, 그리고 김형률과의 만남
글리벡 싸움을 하게 되면서 그는 지금은 세상에 없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글리벡 공대위와 백혈병 환우회, 그리고 건강세상네트워크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고 김상덕씨. 그리고 원폭2세 문제를 세상에 처음 알렸던 고 김형률씨가 그들이다. 강주성씨는 상덕씨 이야기를 꺼내자 “그놈 자식, 죽어버렸네.”라며 마치 그의 죽음을 잠시 잊고 있었던 듯 내뱉었다.
“상덕이는 내가 무균실에서 골수이식을 받고 병실로 옮겨졌을 때 바로 앞자리였어요. 그때 처음 알았지. 나보다 1년 먼저 골수이식을 했는데 몸이 안 좋아서 입원했던 거지. 그 뒤로 한 참 뒤에 그놈이 병실에 누워있는데 TV에 내가 나오더래. 물어물어 날 찾아왔지. 환자들 중에 내가 건진 유일한 활동가였는데…. 작년 9월에 골수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고민을 많이 했어. 보통 그런 경우는 다 죽었거든. 많이 봤으니까, 그놈도 알고 나도 알았지. 본인이야 어떻겠어. 결심을 한 거지. 산에 들어가서 요양을 할까 활동을 계속할까, 요양을 해서 나을 병이 아닌 걸 본인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활동을 한 거야. 술 먹으면서 많이 울었지, 자기 얼마 안 있으면 죽는다고…”
지난 5월 말 세상을 뜨기 전까지 불꽃같은 활동이었다. 그런 김상덕씨를 그는 ‘미운 오리새끼’라 한다.
“상덕이가 침이 안 나왔어요. 침이 안 나오면 이가 다 삭아. 이놈 나랑 밥을 먹으면서 내 앞에서 이빨 부러진 게 대여섯 번 되지. 다 부러지고 뿌리만, 잇몸만 남았는데 침이 없으면 장력이 없어 틀니도 못해. 그러니까 못 먹어서 몸이 비쩍 마르지. 50kg도 안 되고, 온 몸은 골수이식 후유증으로 검게 변하고 머리는 다 빠지고 얼룩덜룩 백반증이 나타나고. 그런 몸으로 활동을 한 거지.
나는 상덕이가 대중 활동가가 되기를 바랐어. 우리나라는 이론가는 많지만 대중운동가는 별로 없어요. 그런 점에서 많이 비판을 했어. 몰라도 좋다, 알면 좋지만 모른다고 운동을 못하는 건 아니다, 대신에 대중 속에서 대중의 언어를 갖고 해야 한다. 물론 그게 쉽지는 않지. 상덕이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더 노력을 해야 된다고 내가 욕심을 부린 거지. 작년 봄에 강제로 휴직을 시켰어.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그런데 더 안 좋아지고 정신적으로도 쉬는 게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럼 편하게 나와서 활동해라, 그러다 죽었어. 괜히 일을 시켰나, 환자는 요양을 하고 쉬게 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도 들지.”
김형률씨는 2002년 국가인권위 농성장으로 그를 찾아왔다. 선천성면역글로균결핍증이란 희귀한 혈액암을 앓고 있던 김형률씨는 지난 해 5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원폭 피해자 진상규명 및 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 투쟁 등을 벌여왔었다.
“글리벡 투쟁하는데 ‘나도 혈액암 환자다, 그런데 나는 환우회도 없다, 끼어 달라, 자기는 원폭피해자2세다.’ 그러는 거야.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중요한 문제였어. 그런데 지금 싸우기 어렵다, 다음 기회가 되면 꼭 할께, 약속 했지. 그때 코 꿰어서 여기까지 왔어. 내가 아니라 그 놈이 나를 끌어들인 거지. 공대위 했으면 좋겠다, 시민사회 조직하자 그래서. 내가 병 걸려서 만난 특별한 사람들 중 하나지. 둘 다 오래 가지 못할 친구들이었어. 상덕이는 왔다갔다 제 맘대로 할 수는 있었지만 형률이는 그것도 어려웠으니까 몸 상태는 형률이가 더 심했지. 둘 다 사는 동안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불사르고 갔어. 둘 다 고집이 무지하게 쎄서 나하고 많이 싸웠어, 일 하지 말라고 해도…, 지들이 자기 무덤 팠어요, 이놈 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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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상덕씨와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 강주성씨 |
건강권과 환자의 권리를 위한 싸움
“글리벡 싸움을 하면서 환자 권리를 위한 조직이 필요하다고 느꼈지. 그런데 환자 조직이 있어야 환자권리연대든 뭐든 할 텐데 그게 없으니까 우선 시민환자 조직을 만든 거지. 생활보호대상자, 빈민이 제외되는 의료소비자가 아니라 시민환자조직. 의료가 너무 전문적이어서 제약 관련 전문 시민단체, 응급의료, 공공의료, 건강보험 등등 각각의 전문영역에 각각의 단체가 필요해. 그래서 건세(건강세상네트워크)는 아주 다양하게 분화되어야 한다고 봐요. 전문성과 역량이 형성된다면 더 작은 조직으로. 환자 조직도 더 필요해. 지금도 암 무상의료 하자 그러는데 암 환자들 목소리가 전혀 없는 거야. 그런 점에서 백혈병 환우회는 투쟁하면서 만들어져서 각별히 소중한 조직이지.”
그렇게 2002년 글리벡 투쟁 막바지에서 만들어진 건강세상네트워크는 불과 몇 년 사이에 보건의료운동의 대표적인 단체가 되었다. 얼마 전에는 최초로 약가조정신청을 해서 받아들여진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혈압강하제 750가지 중에서 411가지를 조사해보니 다 동일성분, 동일함량, 즉 같은 약인데 제약회사, 약 이름이 다르고 약값이 달라. 한 알에 60원부터 6백 80원까지. 그래서 조정신청을 냈는데 처음으로 받아들여졌어. 제약회사 700개가 대책회의 하느라 난리가 났어요. 지금까지는 약값을 결정하는 정책 자체가 없었어. 그건 복지부가 제약회사, 병원, 약사 그 틀에서 기득권을 인정했기 때문이야.
제약 특허가 20년이야. 그런데 다국적 제약회사는 FTA에서 특허 만료된 약에 대한 자료 독점권도 가지려고 해. 특허 기간이 끝나도 다른 제약회사에서 값싼 카피약을 못 만들게 하겠다는 거지. 글리벡이 2001년 출시되었는데 1년 반 동안 매출액을 11억 5천만 달러였어. 만들 때 투자비용이 8억 달러였다고 밝혔는데 1년 반 만에 이미 초과 회수한 거지. 거기다가 만성 골수병 환자는 우리나라에서 2003년에 600명인데 지금 1,600명으로 늘었어. 약 때문에 죽지 않으니까 매출액이 2.5배 늘어난 거지. 20년 동안, 그리고 앞으로 도대체 얼마를 벌겠다는 거야.
결국 환자들이 낸 돈으로 먹고 사는 제약회사가 환자들에게 비수를 꽂는 거야. 자본주의가 원래 그렇다지만 고리대금은 하면 안 되잖아. 마음대로 돈 버는 것이 자본주의가 아니야. 룰이 있어야 하는데 자본주의 룰조차 지키지 않는 거지. 비도덕적인 일이야. 제약독점이 갖는 살인이지. 2차 세계대전보다 많은 사람이 1년에 제약회사 때문에 죽고 있어.
노무현 정권은 FTA에서 의료를 서비스 중 하나로 보고 있다는 것 자체도 문제지. 기본 관점이 의료를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발전시키자는 거야. 물론 의료기기 같은 분야는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사람 몸에 가하는 서비스는 상품이 되어서는 안 돼. 그렇게 됐을 때는 의료가 불행해지고 우리 몸이 상품으로 전락되는 거지.”
보건의료운동과 건강권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마찬가지로 그의 활동이 어디쯤에서 멈출지 짐작되지 않는다. 이야기하면서 그는 한 시간에 한 두 번씩 눈에 안약을 넣는다. 골수이식 후유증으로 눈물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눈을 깜박할 때마다 안구에 물기를 칠해줘야 하는데 눈물도, 안약도 없으면 결국 눈은 염증을 일으킨다. 그의 활동은 우리사회에 눈물과도 같기에 더 많은 물방울들이 모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의 빚진 마음이 완치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너무 잔인한 일일까. 그의 사회적 투병은 계속 될 것이다.
인터뷰 강곤 | 기자
사진 박김형준 | 다산인권센터 활동가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그는 마음에 진 빚 때문에 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