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야기는 1965년, 학교선생님이 되고 싶었으나 공장을 다녀야 했던 열여덟 꽃다운 시절부터 시작된다.
“그때는 다 어려웠지만… 몰라, 내가 욕심을 부려서 간다고 했으면 갔을지도. 학교에 안 보내주니까 꼬장을 막 부렸지. 나도 모태신앙이었지만 우리 아버지는 신앙에서 아주 엄하셨거든. 성당 안 가면 밥 먹을 자격 없다고. 그런데 나는 성당도 안 가고, 기도도 안 하고, 그런데도 아버지가 야단을 못 쳤어요. (이 대목에서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아버님도 마음이 많이 안 좋으셨겠네요, 했을 뿐인데. 인터뷰 내내 그는 여러 차례 눈시울을 붉혔고 또 그만큼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해서든 학교를 가려면 학원을 다녀야하니까 돈을 벌어야 했지. 우리 집 앞에 있던 학성모직 상무 네가 살고 있었어. 그 집 할머니한테 얘기를 했지. 학원 가려면 돈 벌어야 한다, 그래서 쉽게 취직이 되었어. 그 양반이 상무였으니까 급사로 한 일주일 다녔는데 계속 그러면 안 될 거 같아, 나는 돈 벌어야 된다고 현장에 보내달라고 그랬지. 기술 배워야 된다고 해서 기술 배우는 직포로. 직포로 갈려면 몇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빽으로 갔지. ‘구다’라고 실 감는 거. 그래서 애들이 다 알아버렸어. 쟤는 상무 빽이 있다. 그 뒤로 애들이 내 앞에서 불평불만도 안 하고. 어느 날은 월급 나온 다음 날 출근했는데 나 혼자야. 깜짝 놀라서 옆 부서에 물어보니까, 너 몰랐니? 쟤네들 월급에 불만 있어가지고 스트라이크를 했다는 거야. 그때까지도 왕따 당하는 거 몰랐지. 애들이 모여 있는 데 가서 막 따졌어. 내가 상무 편들겠냐? 너희들이랑 같이 일하는데. 그래서 더 친해졌지.”
‘공순이’가 부끄러웠던 노동자
그렇게 익힌 기술로 그는 곧 학성모직보다 좀 낫다는 대한모방으로 옮길 수 있었다. 12시간 넘게 일을 하면서도 학원은 빼먹지 않았다. 기술을 배웠지만 그는 여전히 ‘공순이’였고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다가 친구의 권유로 다시 찾은 성당에서 그는 ‘노동자’라는 말을 처음 듣고 눈과 귀가 열렸다고 한다.
“내가 예전에 성당 다닌 걸 알고 송숙자라는 친구가 같이 가자고 졸랐는데, 세 번만 했으면 안 갔을 거야. 네 번째에 못 이기는 체하고 성당에 나갔어. 가니까 예전에 있던 신부님이 아니라 바뀌었더라고. 그때 JOC(가톨릭노동청년회)가 뭔가를 설명하는데, 노동자라 그러면서 노동법 이야기를 하더라고. 내가 귀가 확 열린 거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 때 노동을 통해서 세상을 만들었다, 창조사업의 1인자가 노동자다, 노동을 통해 세상을 만들었고, 세상은 노동을 통해 유지된다, 우리가 앉아있는 책상, 걸상, 노동자가 만들었고, 전깃불 노동자가 보내준 거다.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구, 노동이 절대 부끄러운 게 아니고 천박한 것이 아니다, 생각을 하게 되었지.
1주일에 한 번 팀 회합을 했어. 그 팀을 잔 다르크 팀이라고. 세공장 사람들이 같이 팀이 되어서 성서 말씀 보고, 실천약속 하고. 아, 내가 꼭 공부만 하려고 할 필요가 없구나, 여기서 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구나, 의식이 바뀌더라고. 또 실천 활동으로 소그룹을 만들었어. 이름이 세븐클럽. 일곱 명이었거든. 그땐 알지도 못하고 영어를 썼는지 챙피해 죽겠어. (웃음) 다들 자기 비하, 자기 치장이 많았어. 가짜 대학생 노릇하면서 빚 얻어서 옷 해 입고, 책 옆에 끼고. 실천 약속으로 그런 거 안 하기 운동을 했지.”
동료로부터 상급자로부터 신임을 받은 그는 곧 조장이 된다. 노동운동 안 했으면 무서운 관리자가 되었을 거라고 말하는 박순희는 또한 JOC남부연합회 회장도 맡았다. 그때 그에게 전태일 열사의 소식이 들려왔다고 한다. 많은 지식인들에게 시대에 대한 부채감을 던져주었던 열사의 분신은 그에게는 커다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너무나 두려웠던 전태일 열사의 삶
“70년 11월 13일. 우리는 모임을 하니까 소식을 바로 접했죠. 추모미사도 하고 그랬는데, 그 이듬해 2월경인가 전태일 열사 어머님하고 바보회, 전태일 열사 친구들 몇 명이 연합회를 방문한 거야. 신부님이 그날 임원회의를 잡아놓구 그 이야기를 다 듣게 했어. 전태일 열사가 어떻게 준비하고 분신을 했는지. 이야기를 들으니까 두려움이 몰려들더라고. 나두 여기에 더 깊이 들어갔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구나. 너무 무서웠어. 스물세 살 때였는데 당시에는 올드미스 취급을 받았어. 결혼을 해야 하는지, 결혼해서두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는 건지…. 사람들에게 인기도 있고 변화되는 거 보면서 너무 좋았지만 이제는 너무 두려워진 거야. 신부님하구 상담을 했어. 전태일 열사 이야기하면서 나는 그런 삶을 살 수 없다. 결국 내린 결론이 수녀원이었어.
그런데 대한모방 사표 내고 본격적으로 수녀원 들어갈 준비하는 동안 안양천이 넘쳐서 우리 집이 있던 당산동이 다 물바다 된 거야. 난민처럼 초등학교에서 지내다 수녀원에 들렀는데 수녀원이 너무 아방궁 같아 보이더라고. 이렇게 화려하고 좋은데서 살면서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이랑 살 수 있을까….”
결국 그는 수녀원 대신 돈 보스코 센터로 들어가 생활하며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산업선교회 등에서 교육을 받았고 곧 구로공단 전세 얻어서 공동체를 꾸렸다. 한편 그 당시 원풍모방의 전신인 한국모방에서 섬유업계로는 최초로 민주노조가 세워졌고 그는 한국모방 지부장의 권유로 입사를 하게 되고 이후 부지부장 자리까지 맡게 된다.
“구속된 지부장을 면회하는 자리에서 나를 지부장 권한대행인 부지부장으로 임명하는데 어떻게 못 한다고 해? 석방될 때까지만 하기로 하구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겁 대가리 없이 한 거지. 근로자의 날인 3월 10일, 보름달 빵에다가 수건 한 장 주고 쑈단 불러다 쑈 보여주고 그랬는데, 쑈 거부하고, 수건 안 받고 천 명이 넘게 회사가 있는 대림동부터 고척동에 있는 교도소까지 지부장 보러 행진을 해갔어. 노동자 생일날이니까 노동자 대표 집단면회 하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석방투쟁을 한 거지. 그래서 지부장이 한 달 만에 석방이 됐어요. 그때 내 인생의 행로를 어떻게 정해야 하느냐 고민을 또 하게 되지. 정신이 없었어. 여기저기서 원풍 민주노조를 그냥 못 봐주고 우리를 죽일라구 그러는데 또 어떻게 그만두겠어?
정말 우리 원풍조합원들 고생 많이 했어. 그 때 조합원이 2,100명이었는데 3교대를 하니까 항상 700명은 움직일 수 있는 거야. 안 끼는 곳이 없었어. 사회운동, 노동운동뿐만이 아니라 위장결혼식 사건, 많이 잡혀 들어가고 무진장 맞았어. 조합원 단결력도 대단했지만 앞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미친 거지. 미쳐서 고(Go)한 거야. 어느 집단이던지 미친 사람 몇 사람 있으면 일이 돼. 지금 죽으면 순교다, 그런 마음으로 했으니까.”
원풍모방을 시작으로 불붙은 민주노조의 운동은 반도상사, 동일방직으로 번져나갔고 YH무역으로 모아지면서 부마항쟁으로 유신정권의 숨통을 죄어들어갔다. 그리고 1980년 광주를 짓밟고 들어선 신군부가 민주노조를 다 파괴했을 때도 원풍모방은 꿋꿋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는 ‘정화조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노동운동 탄압으로 회사에서 해고가 된다.
“이웃사랑 금지법이라니 말이 돼?”
“섬유노조에서 조합원 자격을 없애 버리고 그걸 회사에 보내니까 회사에서 어쩔 수 없이 해고를 시켰지. 그때 해고장 보면 너무 웃겨. 동지라고 썼어. ‘박순희 동지 너무 안타깝지만 섬유노조 본부로부터 조합원 자격이 박탈되어 종업원 자격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원풍노조는 집행부가 몇 번 바뀌면서도 민주노조를 지켜냈어. 그러니까 이 새끼들이 82년 9월 27일 날, 노조를 쳐들어왔지. 완강하게 싸우며 3박 4일을 버텼어. 죽을 수는 있어도 니들에게 사표를 낼 수는 없다고. 800여명 남은 조합원들이 10월 1일까지 현장에 남았는데 물 뿌리고 하나씩 다 떼어내 가지고 난지도에다 갖다 버렸지. 우리는 그때 다 죽었더랬어.
나는 그때 제3자 개입금지법, 이게 이웃사랑 금지법인데, 그걸로 잡혀서 83년도에 나왔어. 감옥 갔다 와서 보니 가관도 아니야. 노동자들은 다 현장에서 쫓겨나서 주눅이 들어있고 노동운동을 학생들이 잡았더라고. 지금까지 우리가 한 일을 조합주의니 경제주의니 하며…. 나 그때 미치는 줄 알았네. 다 노동운동을 디딤돌로 쓴 놈들. 학출(학생운동 출신)들이 우리 노동자들을 못난이 취급을 한 거야. 그 바람에 우리 조합원들 노동운동의 노자도 듣기 싫어서 떠난 사람 많아요. 노동조합으로는 정세를 엎을 수 없다, 노조는 희망이 없다, 그러다가 87년 노동자 투쟁 일어나니까 노동조합만이 살 길이다 하면서…. 물론 기여도 많이 했지. 그건 인정하지만 한두 달 체험삼아 판을 헤집고, 자기 힘들어서 나간다는 소리는 못하니까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명분 만들려고, 자기는 해고당해서 나가지만 그때부터 노동자들은 당하는 거거든. 새싹한테 소나기를 퍼부으면 뿌리 채 죽잖아. 자기 명분 찾으려고 의도적으로 싸우는 걸 너무 많이 봤어.”
그는 “권력, 금력에 이어 학력을 가진 놈들에게도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슬픔”을 안고 원풍 식구들과 논의한 끝에 전북 익산으로 내려가 가톨릭노동사목 일을 시작한다. 당시 익산 경찰서에서는 서울에서 왕빨갱이가 내려왔다고 총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못자리가 모판에서 자라서 논으로 모내기 되듯이 우리도 모내기를 해야 한다고 누누이 얘기하던 것을 실천한 거지.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노동자들 사는데 방 하나 얻어서 시작한 게 가톨릭노동사목이예요. 전국 24군데, 사북, 태백까지 상담소가 있었어. 전노협(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건설 전에 전국 노동자 교육을 노동사목 실무자들이 다 했어요. 87년 노동자 대투쟁 전후로 해서는 노동조합 설립신고 같은 거 교육하면서 밤샘도 많이 했지. 88년 노동자 대회, 그게 해방 직후에 있었던 전평 노동자대회 이후 처음이었잖아? 연세대에서 전국 노동자들이 모여서 대회를 하구 마포대교를 지나 국회까지 행진을 했는데, 마포대교 건너다 감회가 새로워서 중간쯤에 섰어. 그때 정말 우리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여기까지 살아왔던 것도 기적이다… 그 후 20년을 더 살았네.”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선한 싸움꾼
마포대교를 건너는 대목에서 그는 다시 눈시울을 붉히더니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후 20년. 전노협과 민주노총 지도위원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로, 그리고 매향리 투쟁과 평택 대추리 지킴이로 그의 활동반경도 노동에서 반전평화운동으로 보다 넓어졌지만 그의 싸움의 방식과 자세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노동은 다 똑같아, 똥을 푸든지 사무실에서 서류를 보든지. 노동은 사람의 존엄한 생명력에서 나오잖아요? 노동자들이 너무 피곤해서 일요일은 쉬어야 하고 일요일도 일해야 하는 사업장도 많은데. 교회가 하나님이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고 7일째 아름답게 하나님을 찬미 찬양하기 위해 교회를 지은 거잖아요. 그러면 교회가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지. 일요일은 찬미찬양 드리면서 쉴 수 있도록, 6일만 일해도 살 수 있는 비용이 나오고. 일요일은 미사 드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게 해야지. 근데 그걸 안 하거든요. 이웃사랑 금지법으로 사람 잡아들일 때도 교회는 안 움직였어. 천주교가 운영하는 병원, 학교 이런데서 노조를 인정하지 않잖아 다 파괴하고 천벌을 받을 일이지.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일이야.”
그의 이야기는 거침이 없다. 원풍모방노조 조합원들은 매년 9월 27일, 노조가 문을 닫은 날을 기념해서 모임을 갖는다. 아직도 노동자들의 싸움이, 그리고 박순희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환갑 나이의 그는 여전히 원풍모방 부지부장 박순희이고 선한 싸움꾼* 아녜스(그의 세례명)이다.
출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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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 환갑을 기념해 나온 『선한 싸움꾼 박순희 아녜스』(삶이보이는 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