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한상희의 쇳소리] 버마의 속옷

인터넷에서 ‘버마’와 ‘속옷’으로 뉴스를 검색하면 두 기사가 눈에 띈다. 2001년 말의 한 외신은 ‘버마 캠페인’이라는 단체가 한 여성속옷회사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이는 장면을 다룬다. 6년이 지나 이 트라이엄프사가 서울 명동거리에서 ‘란제리 거리 패션쇼’를 벌이는 그 즈음에 또 다른 외신은 ‘버마를 위한 Lanna Action’이라는 여성단체가 버마의 독재자들에게 여성 속옷을 보내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음을 전한다. 그리고 그 두 이야기 사이에서 우리나라는 슬픈 현대사를 매몰차게 외면하며 딴청으로 일관한다.


속옷불매운동은 국제노동기구(ILO)의 80년 역사상 처음으로 제재조치가 발동된 버마의 강제노동에서 출발한다. 이 운동은 “브래지어가 지탱해야 하는 것은 가슴이지 독재자가 아니다!”라는 슬로건을 앞세우며, 6살짜리 아이까지 일을 시키며 1달러미만의 일당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던 회사를 징벌함으로써 결국 버마 군부독재자들과의 공생을 포기하게끔 이끌었다.


버마의 이 속옷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들에게 발포를 서슴지 않는 폭압정권의 균열을 향하여 다시 등장한다. 여성의 팬티를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져버린다고 믿는 버마 권력층에 대하여 국제사회가 보내는 저항의 메시지이자 버마 군중의 집단저주가 펼쳐지고 있다. “버마식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스스로 매판자본이 되어 군중을 착취하고 소수민족의 말살을 도모하는 그 무지막지한 독재권력에 대하여, 빼앗겨서 부끄러운 자들이 뿜어내는 미약하나마 끈질긴 반역의 의지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버마의 속옷은 억압과 착취의 상징이자 동시에 저항과 전복의 상징이 된다. 아울러 그것은 버마 민주화 운동이 가지는 양면성을 드러내는 것이 되기도 한다. 정치적 자유가 시장의 자유로 변질되고 저항은 권력으로, 전복은 집권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슬픈 악몽이 그들의 미래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속옷의 억압은 버마 민중들의 개별적인 삶에까지 파고드는 반면, 속옷의 저항은 신자유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외부세계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에 있다. 속옷의 저주가 세계의 민주사회와 교감하면서 독재체제의 통쾌한 균열을 이끌어낼지, 아니면 세계자본의 무한증식욕구에 휘말려 칙칙한 군복에서 산뜻한 상품으로 이전하는 권력의 변태로 종결될지 도저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현재는 이런 버마의 고민에 별다른 답이 되지 못한다. 버마의 민주화운동에 대해 “한국정부가 한 일이라고는 버마 민주화 활동가들에 대한 난민신청거부와 버마 천연가스개발뿐이었다”는 비아냥 때문만은 아니다. ‘민주화와 산업화의 동시진행’이라는 명제 자체가 자기기만성 환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되려 한미FTA나 이라크철군연기와 같은 반민중적 조치들이 판을 치는 우리의 현실이야말로 그들에 반면교사가 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버마의 속옷은 우리의 과거인 동시에 우리의 ‘오래된 미래’로 다가온다. 그것은 돌아가야 할 미래가 아니라 우리에게 운명 지워진, 기억하기 싫은 미래이다. 군부의 발포에 저항하는 속옷과 자본의 발호에 저항하는 속옷, 결코 다를 수 없는 이 두 저주는 단지 시차만 달리 한 채 한국과 버마를 오가는 것이다. 우리가 버마 민중들의 아픔과 연대하여야 하는 당위는 여기서 나온다. 그들의 현재는 우리의 미래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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