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근로기준법의 허와 실



근로기준법은 우리 사회 인권의 최소 기준


우리나라 헌법은 노동(근로)권과 노동3권을 보장하고 있다. 이 노동권을 법으로 포괄하고 있는 것이 근로기준법이고 노동3권을 포괄하는 대표법이 노동조합법이다.


근로기준법은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노동의 최저 조건을 법으로 정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근로기준법의 기준이 최저라는 데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자가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것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착각이자 기만이다. 근로기준법은 최저기준임으로 근로기준법을 100% 준수해도 사회적으로 겨우 최저 기준을 지킨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일터에서 만나는 노동의 기준은 크게 보면 세 가지다. 하나는 회사가 정한 사규다. 사규는 회사가 일방적으로 정한 면이 있어 최악의 기준을 형성한다. 자본의 최대 적은 노동자나 노동조합이 아니라 다른 경쟁 자본이다. 이들과 경쟁에서 이기고 이윤을 얻기 위하여 그들은 지출을 줄이고자 한다. 생산성 향상이라는 말은 단위 상품에 비용을 적게 들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용을 줄이는 가장 손쉽고도 강력한 방법은 결국 임금 비용을 줄이는 것이다. 그들은 가능한 노예 노동에 가깝게 임금을 주려 한다. 그 결과 비정규직이 양산되어 버린다. 이런 자본의 탐욕과 폭주를 막기 위해 사회적 최저 기준을 정한 것이 바로 근로기준법이다. 근로기준법은 그 시대, 그 나라의 최대 다수 사람들의 생존의 기준을 정한다. 그래서 근로기준법은 그 나라 인권의 최저기준이기도 하다. 최악의 사규, 최저의 노동법을 넘어 ‘최저+@’를 만들기 위해 단체협상과 단체협약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노동조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최악과 최저를 넘는 첫 번째 관문이다. 이런 노동조합을 거부하는 것은 그 자체로 헌법을 부정하는 것과 동시에 사람을 최악 또는 최저의 조건에서 살게 만드는 비인간적인 행태다.


근로기준법 역사를 보면 크게 두 가지를 두고 노자 간에 투쟁하여 온 역사라 할 수 있다. 하나는 노동시간의 증감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고용과 해고에 대한 강화와 이완의 문제다. 이른바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권 이래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노동시간은 제도만 놓고 보면 주 44시간제에서 주 40시간제로 줄었다. 하지만 월차나 생리휴가 등의 폐지와 축소를 통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광풍을 통해 실제 노동시간은 전혀 줄지 않았다. 고용불안과 저임금이 강요되는 속에 비정규직이 양산되면서 추가노동을 원하는 것은 자본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들이다. 이 기이한 역전현상의 뿌리는 결국 저임금 노동이다. 저임금 노동을 관철하기 위해 고용불안과 비정규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해고에 대해서는 뭐 이제는 거의 법이 무력화 된 꼴이다. 정리해고가 인정된 이후 노동자들은 자신이 잘못도 없이 목숨 줄을 잘려도 그냥 참아야 하는 참담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민주주의가 확장되었다고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 근로기준은 속절없이 후퇴했다.



가장 큰 문제는 진짜 약자를 배제해 왔다는 것


현재 우리나라 전체 사업장 가운데 4인 이하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 수는 700~800여만 명에 이르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1,500만 노동자의 절반이다. 하지만 이렇듯 엄청난 노동자들이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최소 권리인 근로기준법의 많은 부분을 적용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2010년 12월부터 4인 이하 사업장에서도 법정퇴직금이 발생하게 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그런데도 4인 이하 사업장의 경영난이 어떻고 퇴직연금에 보험회사들의 외면이 어떻고 하는 등 말들이 많다.


근로기준법이 최저 기준이라는 것은 그 이하면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로기준법을 어기면 처벌을 받는다. 즉 법적 강제의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진짜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적용이 배제되어 있다. 해고를 당해도 구제 신청을 할 수 없고 연월차, 휴가, 취업규칙 제정 등의 최소한의 권리도 박탈되어 있다. 이는 근로기준법의 제정 취지 자체에 반(反)한다. 평등권이 짓밟히고 인권이 외면된 것이다.


사람들은 어이없게도 영세사업장 노동자의 피눈물 나는 세월이 아니라 영세사업주의 경영난을 걱정한다. 현대자동차 하청들이 위장 도급이었고 불법 파견이었음을 대법원이 확정하자 자본 측은 무슨 토론회를 열어 인건비 부담이 엄청나 국가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을 봤다. 정말 그럴까?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인간으로 최소한의 도리도 갖추지 못하여 인간 이하, 짐승으로 취급당하는 것이 정당한가. 노동자가 인권을 유린당해도 그저 참아야 된다는 것인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근로기준법은 최고 기준도 평균 기준도 아니고 최저기준이다. 최저기준도 채우지 못하는 인간들이 왜 사업을 한다고 나서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 사업은 그 자체가 인간 이하의 짓, 즉 범죄행위인데 말이다.


이런 반인권적인 발상의 최악은 이른바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처지다. 언제부터 노동자 되는 것이 벼슬인지 모르겠다. 근로기준법 등 노동법을 해체하고 무력화해온 자본이 아예 노동법 테두리를 벗어나서 제 맘대로 하겠다는 것이 바로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생기게 된 까닭이다. 사용자들이 똑같은 일을 시키면서도 노동자임을 부정하는 가장 큰 이유는 노동법 상의 강제 의무를 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 사업자 등록을 하거나 근로계약이 아니라 사업자 계약을 통해 위장 자영업자를 만들고 있다. 인간의 최저기준을 준수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반인간적 행위요 반사회적 범죄라는 것을 우리나라 사용자들과 정치인들은 언제 자각을 할 것인지 한숨이 앞선다.


많은 이들은 법적 제한을 탓하지만 근로기준법 적용범위를 정한 근로기준법 제10조 ②항에 의하면 대통령령만으로 얼마든지 법의 확대 적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입을 닫고 있다. 법을 죽이는 것은 단서 조항이라는 말이 있다. 경기도 버스 노사의 경우 단체협약에서 근무형태를 하루 교대제로 하며 단서 조항으로 기사가 부족할 때 격일제 근무(하루 18시간 근무)를 할 수 있게 달아 놓았다. 그리고 20년 동안, 오늘도 격일제 장시간 근무에 시달리고 있다. 자기들이 이로운 단서조항은 다 지키고 노동자에게 이로운 단서조항은 외면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그 모범이 바로 청와대에 있다. 대통령령만 정하면 되는 것을 20년 넘게 미루고 있으니 말이다. 진정한 민생정치가 여기서 외면당해 울고 있다.



모법(母法)으로 기능을 상실했다


말과 글에도 계급이 있다고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가 노동자의 말이라면 ‘아는 것이 병이다’는 자본의 말이다. 자본에게는 구조조정이 노동에게는 정리해고다. 자본에게 인권이 비용이라면 노동에게 인권은 최소한의 존엄한 생존이다. 파견노동을 보호한다고 정한 법이 파견노동을 확산하고 불법파견 노동을 조장한다. 그러고 보면 일본도 조선을 보호한다며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어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던가.


근로기준법 제8조는 ‘중간착취의 배제’를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영리로 타인의 취업에 개입하거나 중간인으로 이익을 취득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은 취업에 개입하여 중간이득을 취하는 인력업체나 파견업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취업의 통로조차 없다.


파견노동은 고용의 간접화를 말한다. 그러면 실제 노동자를 사용하는 자본가는 의무는 파견업체에 미루고 부릴 권리만 누린다. 노동자들은 간접이라는 제도 속에서 권리는 없이 의무만 진다. 이것은 근대법의 기초인 “권리 없이 의무 없고, 의무 없이 권리 없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며 우리 사회를 노예노동 사회로 몰고 가는 것이다. 최근에 새로운 미래 산업이라며 이른바 노융산업이 각광을 받고 있다. 올해 10월 이명박 정권이 발표한 ‘2020 국가고용전략’도 결국은 파견 노동, 비정규 노동을 확대하려는 정책이다. 이런 정권의 모습은 결국 근로기준법의 중간착취 배제 조항을 사문화시키고 있다.


사문화한 근로기준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해고의 문제다. 해고는 자본가가 일방적으로 근로계약을 종료하는 것이다. 민법상으로 계약은 쌍방에게 자유롭게 맺고 풀 자유를 준다. 하지만 노사 간에 자유롭게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자본에 의한 노동의 종속에 다름 아니다. 칼자루를 쥔 자와 칼날을 쥔 자가 평등하고 자유로울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근로기준법은 정당한 이유 없는 해고는 불법이라 규정하고 있다. 잘못이 있어야 해고될 수 있다. 잘못이 없거나 절차상의 하자, 징계 양형의 과함은 부당한 해고라는 뜻이다. 하지만 정리해고 제도의 도입으로 노동자들은 잘못 없이도 해고를 당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150년 동안 노동시간을 줄이고 해고 요건을 강화해온 역사가 뒤집혀 버렸다. 잘못 없이도 경영상의 이유(경영권과 인사권이 경영자의 고유한 권리라고 말하는 한국에서는 결국 경영자들의 잘못이다.)로도 해고의 길이 열린 것은 “정당한 이유 없는 해고는 불법”이라는 규정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법 위에서 잠자는 사람을 법은 보호하지 않는다


예전에 우리 상담실에서 함께 상담을 도왔던 분은 중졸인데 노조 간부를 하면서 노동법을 익혀 간단한 상담을 했다. 그 분의 한숨 중에 하나가 대졸자 노동자들이 노동법 또는 노동 기본권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었다. 대학과 대학원을 나와도 근로계약서 하나 쓸 줄 모른다. 전세계약만 해도 계약서는 쌍방이 도장 꾹꾹 찍어 보관하는데 근로계약서를 쓰는 경우도 드물지만 자기가 쓴 근로계약서를 보관하고 있는 노동자는 거의 없다. 근로계약서는 오직 회사의 소유다. 이런 무지가 자본가들의 편법과 불법의 밑거름이다.


근로기준법과 산재법 그리고 노동조합법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철저하게 교육해야 한다. 그 사람이 사장이 되든 노동자가 되든 처음부터 사람을 생각하는 일터를 만들어야 한다. 인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노동권은 불온한 것이었다. 노동조합 자체가 빨갱이의 소굴이었다.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노동권은 여전히 감춰지거나 생략되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이 생겨 임금이 오르고 해고가 줄었다. 하지만 1997년 IMF사태 이후 임금은 도루묵이 되었고 고용불안은 일상화되었다. 그리고 정리해고는 비정규직 확산으로 이어졌다. 다시 한 번 저임금 장시간 불안노동이 되돌아와 버린 것이다. 한편으로 정권과 자본은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집요하게 똥칠을 했다. 그 결과 일반시민들조차 노동조합하면 이제 배부르고 이기적인 존재로 본다. 노동법을 겨우 보장받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을 노동귀족으로 보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정권과 자본의 이런 이데올로기 공세가 사실은 우리의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똥칠임을 알아채는 이가 너무 적다.


노동기본권은 생존권이다. 다른 말로 생명권이다. 생명권을 이기적인 무엇으로 돌리는 것은 정권과 자본의 탐욕 아래 노동자들의 생명을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용기는 드물다. 상담경험으로 보면 해고나 체불임금 등에 대하여 10명 중 7명은 아예 포기한다. 진정 고발을 하는 경우가 30% 수준이고 이들 중에 2~3년이 넘게 걸리는 소송을 감당하는 사람은 또 그만큼 준다. 법에 호소하는 경우도 10명 중 한 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니 자본들은 불법, 편법을 하는 것이 준법을 하는 것보다 경영상의 효율이 높다고 계산하게 된다.


끝까지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10명 중 한 명은 주위로부터 독하거나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한다. 노동자 권리를 주장하면 회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는 등 불온하게 여겨지거나 이상한 집단주의로 왕따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 의무만 보이지 어디서 제대로 된 권리의식을 경험하겠는가? 권리의식이 제거된 사람들을 우리는 착하다고 한다. 하지만 권리의식 없는 착함은 우리를 자본의 호구(虎口)로 만들 뿐이다.



문제는 노동행정이다


근로기준법을 믿고 노동부에 진정을 했지만 좌절하여 끝내 분신 항거한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노동행정의 반노동자성은 아직도 유명하다.


구두로 근로계약을 하고 일을 한 분이 있었다. 파견회사였는데 광고에는 상여금 지급이 명시되어 있었고 구두로도 확인했다. 그런데 고용보험 문제로 해당 기관에 근로계약서를 제출해야 했다. 회사는 노동자의 서명도 받지 않는 계약서를 발급했고 그것을 무심코 기관에 냈다. 하지만 회사는 상여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퇴직 후에 상여금을 체불로 보고 지급하라는 내용으로 노동부에 진정을 하였다. 하지만 노동부는 서명도 없이 제출된 그 근로계약서를 근거로 체불임금이 발생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회사가 내건 광고는 광고 담당자의 실수라는 것이다.


노동부의 근로감독관은 직급이 높고 권한이 많은 공무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노동자의 설움을 씻는 무기로 삼지 않는다. 과거에는 부정부패의 무기였고 지금은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문제를 회피하는 무기다. 원래 근로감독관의 복무 규칙에는 1) 근로자의 권익을 보호할 것 2) 공정하게 중립을 지킬 것으로 되어 있다. 처음 취지는 근로감독관이 근로자의 권익 보호에 있는 것임을 분명히 했으나 현재 근로감독관들은 ‘근로자의 권익’은 잊고 오직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조사나 입증 책임을 노동자에게 돌린다. 그런데 이 중립이라는 복무규칙은 이전에 워낙 사용자에게 매수된 근로감독관이 부당하게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아 노동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한 규정이었다. 그것이 노동자의 눈물을 외면하는 관료들의 핑계가 되고 있다.


근로감독관이 제 본분만 제대로 하면 아마 지금 업무의 50%는 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노동행정은 예방은 없고 사후대처만 있다. 구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기피하고 오직 노동조합 막기에만 나선다. 또한 만약 회사마다 노조가 있다면 노동문제의 반은 예방될 것이다. 노동조합을 통해 활발하게 사회적 권리가 제기되었다면 또 그 반은 사라질 것이다. 이런 예방조치는 없고 오직 노동조합을 사회적 불안 요소로, 노동3권을 반사회적 위험요소로 보고 이를 막거나 축소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니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요구를 하는 개별 노동자들을 예비 범죄자로 냉대하게 된다. 위로를 받으러 왔다가 상처만 받고 가는 식의 노동행정이 유지되는 한 근로기준법은 여전히 그림의 떡이 될 것이다.



법과 판례는 고치라고 있는 것


박정희는 임금 청구권을 3년으로 제한했다. 일반 채권도 최소 5년인데 우리가 피땀을 흘린 돈을 빼앗기고도 이를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은 단 3년이다. 우리 상담소에 이주노동자가 와서 성질을 내고 간 적이 있다. 우리에게 화를 낸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에게 화를 낸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체불은 도둑질이다. 그래서 바로 경찰에 신고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노동부에서 재판으로 3~4년 빙빙 돌다보면 불법체류자가 되어 돈도 못 받고 추방당한다. 법으로 승소해도 이미 재산을 빼돌리고 회사를 친인척에게 위장으로 매각하여 돈 받을 길이 막막하니 우리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다.


법대로 사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법은 관계의 단절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법대로도 살 수가 없다. 권력과 돈이 휘두르는 주먹이 법보다 강하고 가깝기 때문이다. 사건을 무마하거나 조작하는 힘이 자본에게 너무나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들은 틈만 나면 노동법의 개악을 노린다. 근로기준법을 무력화 하거나 개악하는 것은 역사를 되돌리는 것만큼의 해악이라는 것을 외면하는 것이다. IMF사태 이후 우리는 정신없이 역사를 후퇴시켜왔다. 그 중심에 정리해고 도입, 비정규직 확산이라는 근로기준법에 대한 부정이 있고, 타임오프제로 상징되는 노동조합법에 대한 부정이 진행되었다. 노동법만 보면 우리는 벌써 전두환 시절로 돌아온 셈이다.


노동위원회의 판결이 사용자에게 편중되다 보니 노동행정적 절차 없이 바로 민사소송으로 가는 것이 현실이다. 노동자 권익을 옹호한다는 노동부를 통하면 더 사용자에게 유리한 결정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본말이 전도된 사회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다보니 법을 통한 문제의 해결도 더욱 재미없다. 노무사, 변호사를 만나도 흥이 나지 않는다. 그들의 법과 판결에 갇힌 눈으로는 칼날을 쥐어 흐르는 노동자의 피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은 원래 양날의 칼이다. 권리의 보호와 권리의 제한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그래서 투쟁이 필요하다. 노동과 자본은 항상 인간 존엄성의 높이, 우리 사회 인권의 높이를 두고 씨름 중이다. 노동은 언제나 인권과 존엄성의 높이를 키우자고 하고 자본은 동결이라는 이름의 후퇴를 요구한다. 그래서 노사 간에 투쟁은 노동이 이기는 것만이 정의에 맞는 것이다. 노동이 이겨야 인권의 최저 기준이 높아진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다. 인간 존엄의 최소한의 기준을 얻기 위해 노동자는 회사에 맞서고 법과 행정에 맞서고, 생존과 생계, 주변의 눈초리와 맞서야 한다.


법과 판결은 고쳐져야 한다. 그것도 인권을 높이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고쳐져야 한다. 근로기준법은 일하는 사람에게 전면 적용되어야 한다. 이것이 국가의 의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돈의 노예, 이윤의 도구가 되는 것은 가장 치명적인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산업재해를 당해 치료를 받는 것은 무조건적 권리다. 그런데 지금은 국가가 이를 감정하여 산재를 불허한다. 국가가 자기 자리를 버리고 사(私)보험 회사로 추락한 것임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이럴수록 법과 판결에 갇히지 말고 바뀔 때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체불에 체념하지 마라. 해고에 포기하지 마라. 나 한 사람의 포기가 바로 우리나라 인권과 민주주의의 포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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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훈 |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소장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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