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취임 초기, 전교조는 이명박 교육 정책에 대한 토론회를 주요 사업으로 추진했다. 전국 곳곳에서 시민 사회 단체와 함께 하는 교육 정책 토론회가 열렸다. 영어 몰입, 영어 숭배 교육은 이명박식 교육의 대표 상품으로 각인되었다. 이때부터 이명박 경제에 대한 기대와 이명박 교육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분리되어 갔다. 묻지마 지지에 가려졌던 이명박 교육 정책의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분회마다 교육정책토론회를 개최했다. ‘어륀지’ 파동 때부터 지지율은 이미 급락하고 있었다. 연이어 ‘고소영’, ‘강부자’가 지지율을 10% 이상 떨어뜨렸다. 하지만 대통령과 핵심 교육 참모인 이주호 수석은 학교 현장의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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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조치가 발표되었다. 포장은 ‘학교자율화’였는데, 벗겨보니 ‘교장맘대로’ 였다. 전교조를 비롯해 학부모 단체, 청소년 단체, 시민·사회 단체가 모였다. ‘4·15공교육포기정책반대연석회의’는 29개 단체로 구성되었다. 학교를 학원화하고 공교육 기관으로서의 책임을 포기한 조치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조직해 나갔다. 위원장은 청와대 앞에서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전국적으로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0교시, 우열반, 심야강제학습, 학교부조리 방지 대책 포기 에 대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학교 현장에서는 40만 교사 선언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가속페달을 밟아 나갔다. 4월 25일, 청와대에 국무위원, 장관, 여당핵심이 모여 국정과제보고회를 가졌다. 대통령은 “1년 안에 변화, 개혁 모두 끝내라”고 다그쳤다. “잠 좀 자자, 밥 좀 먹자”는 학생들의 호소조차 뭉개고 넘어가라는 지시였다.
이후 촉발될 촛불 시위에 불씨를 던져준 셈이었다. 전교조는 전국교사대회를 조직해 나갔다. 이명박 교육 정책의 본질을 알게 되면서 학교 현장 분위기가 달궈지기 시작했다. 연금법 개악도 뇌관 구실을 했다. 분회 교육과 홍보 활동에 탄력이 붙었다.
5월 2일, 촛불을 든 아이들이 청계천에 나왔다. “너나 먹어! 쇠고기!”, “너나 받아! 강제 보충!” 아이들은 ‘미친’ 소에 빗대 교육도 미쳤다고 선언했다. 중앙 무대도 없고 깃발도 없는 전혀 새로운 운동이 불도저를 가로 막으며 등장했다. ‘배후’를 찾는 정부와 “우리가 다 배후”라는 10대 사이에서 소통은 이미 불가능했다.
늘 아이들 곁에 있는 전교조가 마땅히 책임을 자임해야 했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을 재협상으로 저지하겠다고 약속하며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 결합했다. 5월 24일 교사대회는 그런 결의의 장이었다. 이명박 교육 정책 전면 전환,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학교 급식 저지, 연금법 개악 저지 등등 여의도 문화 마당에는 사상 최대, 1만 6천 교사가 모였다. 이명박 교육 정책, 졸속 쇠고기 협상에 대한 분노는 ‘우향우’ 밖에 할 줄 모르는 이명박 불도저의 엔진을 끄라고 요구했다.
촛불은 국민대항쟁으로 진화했다. 교육, 민영화, 언론, 대운하, 의료 등 이명박 정부가 하고자 하는 모든 분야가 문제였다. “아무 것도 하지마!” 촛불은 대통령에게 그렇게 경고했다.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결의했다. 전교조는 온나라대행진과 100만 국민서명 운동을 펼쳤다. 서울의 촛불을 전국 방방곡곡으로, 전 국민에게 나르며 이명박 교육 정책 문제점을 알려 나갔다. 분회마다 현수막을 걸고 학부모에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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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는 5년 치 일을 1년 안에 끝내겠다는 정부 계획을 저지하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은 교과부장관, 청와대교육수석, 교육비서관을 다 교체하고도 정책기조는 버리지 않고 있다. 조직역량을 다 쏟아 정권 초기의 교육 정책 가속은 막아냈지만 방향을 돌리지는 못했다. 시의적절한 사업과 투쟁, 사상 최대의 교사대회와 촛불 참여를 거치면서 남은 성과를 조직적으로 수렴할 때다. 여전히 촛불은 타고 있고, 이명박표 무한경쟁 교육도 착착 준비 중이다. 그러므로 상반기 사업의 진정한 성과는 하반기 사업을 거치며 나타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