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희망

"뿌리 깊은 나무는 쉬이 꺾이지 않는다, 꽃 좋고 열매가 풍성하니"

<2> 전교조결성 20주년 특집

문익환 목사, "1989년은 전교조의 해"
1990년 <전교조 신문>배포 투쟁
1992년 DJ와 정책연합
1994년 해직교사 상당수 복직
1999년 1월 6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합법화


난산이었다. 강제 낙태에 실패한 무리들은 강보에 쌓인 아기를 죽이려 날뛰었다. 피신하여 목숨을 구한 옛 예언자와 달리 막 태어난 교원노조는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1선 지도부가 단식농성 끝에 구금되고 2선, 3선 지도부도 잡혀 갇혔다. 그럼에도 투쟁대오는 지리멸렬하지 않았다. 이제 새로 진출한 대중이 조직의 중심이었다. "내가 바로 전교조다!"시련과 투쟁 속에 조합원 한 명 한 명이 각 단위에서 지도부가 되었다. 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에 온몸을 부딪치기로 작정한 교사들의 힘은 실로 컸다. 심중에는 기만의 산을 옮기고 아이들의 넋이 춤추는 학교, 사람 사는 통일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길에 내 한 몸 기꺼이 태워 반역의 어둠을 살라버리겠다는 기개로 가득했다. 영아 살해자들은 인륜을 극한 탄압을 자행했다.
 
그러나 갓난아이를 지키려는 열정과 함께 조합원들은 당시 가장 순수한 시절을 살았다. 습관도 계획도 없이, 사사로운 계산과 계파 갈등도 없이 우리는 직접 투쟁의 나날을 보냈다. 함께 가는 그 길에 고통이 기쁨이었다. 거듭 나는 환희 속에 지칠 줄을 몰랐다. 단식수업, 세상을 감동시킨 6백 전사의 명동성당 단식농성, 그리고 백 명이 넘게 옥살이를 하고 천오백여 명이 교단에서 쫓겨나면서까지 마침내 '우리의 참사랑, 전교조'를 지켜내었다.
 
학생들이 가장 가까운 우군이었다. 잘못된 교육의 직접 피해자인 학생들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피아 식별을 확실히 할 줄 알았다. 전국에서 수십만의 학생들이 선생님들을 지키겠다고 울고불고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떨쳐나섰다. 선생님, 사랑해요! 참교육, 우리 선생님을 지켜내자! 언제 그 간절한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교사들의 투쟁은 학부모들도 교육의 주체로 일깨웠다. <참교육을 위한 학부모회>가 든든한 우군으로 섰다. 고등학생들은 스스로 참교육 쟁취의 깃발을 들고 학교와 지역, 그리고 전국 조직 건설 투쟁에 나섰다.
 
교원노조의 지원군은 도처에 있었다. 스스로 노동자임을 선포하고 노조건설에 나선 교사들을 전노협 건설로 결집하고 있던 민주노조운동이 엄호했다. 농촌지역에서는 전국농민회와 굳게 연대하였다. 노점상 철거민 도시빈민 형제자매들은 '선생님들'과 어깨 겯고 싸우면서 흥감해 하였다. 권력의 탄압을 받는 동안 교회와 성당은 우리들에게 '소도'였다. 정의 구현을 위해 행동하는 사제와 목회자, 스님들은 진실을 외치는 교사들의 따뜻한 보호자요 동지였다. 재야 모든 민주세력은 일찍이 전교조 공대위로 결집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교육을 둘러싸고 형성된 전선에서 마땅히 민주적이고 공의로워야 할 교육을 이기와 탐욕의 천년왕국 유지 수단으로 전락시킨 무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참교육 교사들을 지지 성원하였던 것이다. 전교조는 강보 안에서부터 절대다수 민중의 전교조였다.
 
문익환 선생이 '전교조의 해'라고 이름 붙여 우리의 투쟁을 높이 평가한 1989년은 세계 변혁의 해였다. 노조 건설과 사수투쟁이 승리로 끝나고 세상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을 즈음, 천안문 사태, 독일 통일, 냉전 해체 등 숨 가쁘게 변화하는 세상이 비로소 시야에 들어왔다. 역사의 종언과 자본주의의 승리를 구가하는 소리도 들렸다. 혹자는 한반도 정세의 급변을 점치기도 했다.
 
이런 정세 속에 맞이한 1990년은 국내 정세도 혼미했다. 전노협 건설로 노동진영의 단결의 양과 질이 커졌지만 전교조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다. 운동의 중장기적인 과제를 놓고 조직 안에 논쟁도 벌어졌다. 현장에 있는 조합원들의 공개적인 활동은 어려웠다. 가장 기본적인 조직의 선전물인 <전교조신문> 돌리기가 큰 투쟁이었다. 조합원임이 확인되면 바로 신분상 피해가 왔다. 해직교사 후원대의 유지 확대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해직교사들이 조직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는 상황은 운동의 장기적 전망을 바탕으로 조직 활동을 짤 만큼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 결과 법외 노조 시기의 대부분을 '해직교사 복직투쟁'이 중심 과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논쟁은 활동가들 사이에 세력화로 이어져 본부 집행부 구성을 놓고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해직교사 복직투쟁의 주요 전술은 해직교사들의 직접 행동 투쟁과 현직조합원들의 공개적인 복직추진위를 통한 선언과 요구 전술이었다. 목을 내밀고 정권의 탄압을 유도하여 핵심과제를 사회정치적 쟁점으로 만들겠다는 일종의 고육지계였다.
 
천오백 해직교사 대오를 주축으로 기동력과 전국적인 조직력을 갖춘 전교조는 노동운동을 비롯한 전체 민족민주운동 진영 안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요구받았다. 전대협을 제외하고 단일한 조직으로는 어떤 조직도 그만한 활동가의 토대를 갖추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1991년 초 장기집권을 획책한 지배 블록이 야합했을 때 구축된 전국적인 반민자당 전선에도 중심세력으로 참여하였다. 김영삼-김대중이 각축한 1992년 대선에서 전교조는 전국연합의 일원으로 DJ와 정책연합을 하였다. 그 내용에는 해직교사의 원상복직과 교원의 단결권·단체교섭권의 보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선이 있던 해에 처음으로 최루탄과 경찰의 원천봉쇄가 없이 전국교사대회를 치렀다. 그러나 연합 진영은 대선에서 패배했다.
 
전교조의 주력이 권익 투쟁으로 배치된 한편, 1988년 이후 결성된 교과별 교사모임을 주축으로 1991년 구성된 참교육실천위원회는 참교육의 내용 생산과 현장교사들과의 공유를 위해 불철주야로 뛰었다. 엄청난 양의 자료를 생산하여 배포하며 교과별 회원조직을 확충해 나간 활동은 전교조의 강령 실천이면서 동시에 현장 조직화의 유력한 수단이었다.
 
해직교사들은 교단을 떠난 지 5년 만에 복직하였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해직교사 복직이 국민 화합조치의 일환으로 부각되었다. 교육계 기득권 세력인 교장단·사학재단·한국교총은 이 분위기에 재를 뿌렸다. 그들은 전교조 해체 후 복직을 주장했다. 전교조와 교육부는 탈퇴각서 제출이라는 조건을 놓고 실랑이를 벌였다. 정권의 결심을 반대세력이 흔들었다. 해직교사들은 협상과 결정의 전권을 위원장에게 위임했다. 결국 위원장은 고뇌에 찬 결단을 했다. 4년이 넘는 해직 경력과 호봉의 인정도 받지 못한 신규채용의 형식이었다. 이 와중에 일부 해직교사들은 합법조직 건설론을 내세우며 조직을 탈퇴하기도 했다.
 
1994년 3월과 2학기를 거쳐 대부분의 해직교사들이 교단에 섰다. 조직은 본부와 15개 시·도지부를 운영할 역량을 남겼다. 교육계 수구 세력과 보수 언론은 전교조가 해체되었다고 설레발을 쳤다. 조직은 유지되었으나 복직 조치 이후 일부 활동가들이 탈퇴하고 상근 역량이 줄어들면서 실제로 전교조의 활동력은 현저히 축소되었다. 조합원 수도 갈수록 줄었다.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부는 활동을 접고 유학을 떠나거나 칩거했다.
 
문민정부의 이른바 '5·31교육개혁 조치'가 나온 것은 바로 이러할 때였다. 흔히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의 등장으로 일컬었다. 사람들은 공교육의 시장화를 예견했다. 세계적인 대세를 막을 세력은 거의 없었다. 1990년대 초와 같은 직접 투쟁 역량도 없고 법적 제도적 개입 수단도 없는 전교조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뚜렷한 전망을 내지 못하고 운동의 과제를 해결할 방책을 갖지 못한 조직에는 내홍이 일어나게 마련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노동의 유연화를 획책하는 조치의 일환으로 전교조 문제를 다루면서 이른바 '노개위 공익위원안'단체교섭권을 가진 노조 아닌 교원단체로의 합법화를 던졌다. 이의 수용 여부를 둘러싸고 본부 주요 간부를 중심으로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전교조 깃발을 내리자는 주장에 대하여 청춘을 전교조에 바친 해직교사들의 정서적 거부감이 심했다. 논쟁은 잠시 수그러들었다가 1997년 말 대선에서 DJP연합의 승리 이후 다시 불거지는 등 우여곡절이 이어졌다.
 
겨울연수의 격돌 직후 DJ가 주도한 노사정위원회는 노동유연화의 법제화를 관철시키고 전교조 합법화를 약속했다. 합의한 민주노총 지도부는 대의원대회의 불신임을 받고 물러났다. 그러나 약속한 합법화는 명목뿐이었다. 단결권, 제한된 단체교섭권과 상급단체 가입을 허용한 특별법은 1999년 7월1일부터 시행되었다. 기사회생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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