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영삼 정부가 해직교사 복직 방침을 정한 후 교육부는 9월30일을 시한으로 정해 놓고 대대적인 선무공작(?)을 펼쳤다. YS는 해직교사 재임용이 문민정부가 내세운 '국민화합 조치의 마무리'로 규정하고 교육감들에게 '적극적 포용 노력과 세심한 배려'를 당부했다. 장관은 '해직교사들의 교육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공개적으로 인정한다'면서 채용 안내 광고를 냈다. 교육감이 보낸 채용 신청서는 ‘힘을 합하여 지난 시대의 응어리를 풀고 통일 한국의 21세기를 주도해 나갈 우리의 꿈과 희망인 2세 교육에 전념하는 참다운 스승 상을 정립해 나가자', '사랑하는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교실에서 교육적 열정을 불사르실 것을 간곡히 권유한다'는 둥 화려한 수사로 가득했다. 설득 작업에는 해직 당시 교장 교감들도 동원되었다. 마음 빚을 갚기라도 하려는가, 정감 넘치는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넘어 왔다.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에 전교조는 의견 수렴과 투쟁 대오 정비를 위해 지부별 해직교사 총회를 조직했다. 서울 총회(8.8)에서는 '탈퇴각서 수용'에서 '본격적 합법화 쟁취 투쟁 돌입'까지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전국에서 대체로 '투쟁을 통한 복직'이 공감을 이루었고 '조건 없는 복직 쟁취를 위해 시한을 넘기기'로 결의를 모았다. 중앙집행위(8.15)는 복직을 '1993년 안에 해결할 전술적 과제'로 규정하고 ▶일괄 협상 일괄 타결 ▶조건 없는 전원 복직 ▶정부의 방침 수정이 없으면 전면 거부 등을 방침으로 정한 후, 모든 협상은 위원장에게 일임하였다.
9월에도 명분과 실리를 놓고 정부와 전교조 사이의 실랑이가 있었다. 14일 기자회견에서 위원장은 '탈퇴 명시 불가''선별 방침 철회' 등의 명분을 내세웠으나 '복직 대상 확대, 임용절차 간소화 등의 조건이 관철되면 경력인정과 보상 등은 순차적 해결과제로 넘길 의향이 있다', '교육부의 특별 채용형식 수용 검토' 등의 발언으로 실리로 기운 속내를 드러내었다. 위원장은 '양측이 명분 있게 문제를 조속히 매듭짓자, 그러면 산적한 교육현안 해결을 위해 협력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11차 대의원대회(건국대)는 위원장의 방침을 승인하고 탈퇴확인란을 비운 복직신청서를 위원장에게 제출하여 조직적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해직교사들은 결의대회(9.12, 탑골공원) 후 지역별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나 시한이 다가오면서 남모를 번민에 불면의 밤을 지새운 사람들도 있었다. 9월26일 길옥화(31. 서울 신양중 해직) 동지의 투신자살 소식은 큰 충격이었다. 28일 전교조장으로 결별하는 자리에서 동지들은 '정갈하고 힘찬 글씨로 신양중 분회 결성 취지문을 썼던' 손으로 차마 ‘탈퇴각서 쓰기를 괴로워했을 것'이라며 애통함을 금치 못했다. 조직의 방침에 반발하여 9월30일 신청서를 접수한 경우(88명)도 있었으나 절대다수는 결의를 지켰다. 당황한 교육부는 10월28일까지 신청 기한을 연장하였다. 그러나 조건의 양보는 없었다. 그들은 풍찬노숙 4년 해직자의 약점을 읽고 있었다.
10월15일 위원장은 마침내 '고뇌에 찬 결단'을 발표하였다. '교육개혁과 전교조 합법화를 앞당기고 참교육 실천에 매진하기 위해', '더 큰 승리를 이룩하여 원상복직을 앞당기기 위해', '전교조에 크나큰 사랑과 아낌없는 기대를 보내준 국민들의 뜻을 받들어 소중한 아이들에게 온 힘과 정성을 쏟아 올바로 교육하기 위해' 학교로 돌아갈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해직교사들의 첫 반응은 '허탈'이었다. 지회 모임에서 "억장이 무너진다, 그래도 지도부의 판단을 따르겠다"고 한 황시백(고성고 해직, 작고)이 심정을 대변했다. 한 해직교사는 '(탈퇴각서 복직은) 90%를 차지하고 있는 현직 조합원들과 동일해지는 하나의 의식'이고, '전교조가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 한 번은 거쳐야 할 통과의례'라고 소회를 밝혔다. 결국 10월28일까지 1419명(앞의 88명 포함)이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리하여 1994년 3월 정년 1년을 남긴 이규삼 선생을 비롯하여 1294명이 신규채용 형식으로 교단에 섰다.
그로부터 15년 세월이 흘렀다. 교과부는 보상은커녕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결정된 해직교사들의 경력과 호봉을 지금까지 인정하지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