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희망

해직교사 후원회장 김찬국 선생의 부음을 듣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지도자들의 연이은 부음에 황망하다. 개인적인 인연의 유무와 관계없이 우리 사회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분들이 물리적 시공간을 영원히 달리하게 됨은 슬픈 일이다. 지도자가 없는 세상을 살아감은 달 없는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
 
기독교 신학박사 김찬국 선생(목사, 연세대 교수, 상지대 총장 역임)의 '소천'소식에 새삼스럽게 전교조 역사의 한 자락을 들추어 본다.
 
선생은 해직교사 서울후원회(1989년 11월14일 결성)를 통해 전교조 운동과 직접 관련을 맺었다. 노태우 정권에게 목이 잘린 1500여 해직교사가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여러 지역에서 후원회가 결성되던 때이다.
 
기층 민중에서 사회지도층 인사까지 계층의 높낮이를 가리지 않고 모여 이루어진 해직교사 후원회는 그 자체 새로운 교육운동 단체로 자리 매김 하였다. 선생은 김승훈 신부, 이상희 교수(서울대)와 공동대표를 맡았다.
 
선생은 전교조 해직교사들에게 각별한 정을 보여 주었다. 박정희 유신체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4년, 장준하 백기완 선생 등과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에 발기인으로 동참하여 구속 · 해직되었고 1980년 5·17내란 직후 다시 교단에서 쫓겨나 무려 10년에 가까운 해직 생활을 겪은 분의 동병상련이었을까.
 
그 같은 선생이 살아오신 역정과 좁디좁은 청빈의 누옥에서 맑게 살아가시는 모습은 막 해직되어 장래에 대하여 일말의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던 젊은 교사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순을 넘긴 얼굴에 활짝 펴지는 열두 살 소년 같은 순진무구한 웃음과 인생을 달관한 해학을 보고 들을 때 사람들은 마음의 그늘이 지워지고 덩달아 기뻐했다. 선생은 이름을 소개할 때 "나는 김과 찬과 국이 이미 있으니 밥만 있으면 됩니다"라고 하며 노소동락하였다. 진리를 깨달은 자의 소탈함과 자유자재가 늘 거기에 있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요한 3:15)"
 
1992년 5월16일 서울지부가 준비한 참교육 문화한마당 <어화둥둥 우리들은>이 공연 장소를 찾지 못하여 애를 태울 때 전교조는 선생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어렵사리 확보한 연세대 노천극장(당시 연세대 부총장)에서 열린 그 행사에는 1만 5천이 넘는 중·고·대학생이 운집하여 북 · 장구 치고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전교조가 주최한 문화행사 중 최대의 성황을 이루었다. 장소를 확보해 준 데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선생은 특유의 해학이 담긴 말씀으로 방문자들을 맞이했다. "후원회는 될수록 빨리 없어져야 할 단체입니다." 해직교사가 모두 복직되고 전교조가 합법성을 빨리 얻기를 기원하는 역설적인 표현이었다.
 
전교조는 1996년 결성 7주년 기념 전국교사대회(보라매공원)에서 선생에게 <참교육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그 뿐이었다.
 
선생이 연로하시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병환으로 고생하신다는 풍문이 들렸으나 나는 한 차례도 문병하지 못하였다. 조직 안에서 누가 챙겨 보았는지 알 수가 없다.
 
김민곤·서울고, 해직교사원상회복추진위원장
전교조는 어려운 시절 참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맺고 이런 저런 신세를 졌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운 동행 20년'에도 안팎의 선을 긋고 살아온 측면이 있지 않은가 돌아보아야 한다. 아무리 '무주상보시'이고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인들의 말씀이 있지만 우리 조직은 보은에 썩 익숙지 못하다.
 
해직교사 서울후원회의 자원봉사를 거쳐 참교육서울시민모임 사무처장을 역임한 이정진 님이 반려 허병섭 목사님과 모진 병고에 시달리고 있다는 풍문을 듣고도 귓전으로 흘리고 그냥 지나갈까 두려운 오늘이다. 어디 그것뿐이랴.
 
삼가 김찬국 선생의 영전에 향을 사르고 옷깃을 여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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