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아이들을 사랑한다. 일반적인 부모들처럼 아이들을 사랑한다면서 실제 행동은 그렇지 못하다. 사랑할 수 없으면 내버려두는 게 오히려 나을 텐데, 자기만의 생각과 방식으로 사랑하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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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에 비해 그들은 자기가 살아온 삶에 대한 경험이나 방식에서 쉽사리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변화하고 재조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완고하다. 아이들 앞에서 권위를 세워야 하기 때문일까?
그들은 또한 정답을 좋아한다. 정답이 없으면 불안해한다. 그들의 세계관이나 사물을 보는 관점은 네모반듯하다. 그러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사회생활을 하지만 지평선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좀처럼 험악한 산길을 가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홀로 있지 못하다. 어떤 시스템(주류) 속에 들어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이는 어린 아이한테서나 볼 수 있는 유치함인데, 많은 이들이 그 유치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시스템에 끼지 못해 안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몇몇끼리 또 다른 시스템을 구축한다.
가르치는 사람이면서 그들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올해의 것이든 지난해의 것이든 거의가 같다. 사회라는 기계 속의 톱니바퀴가 되도록 아이들을 이끌어 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멀리한 그들의 눈은 퇴화되고, 그런 눈으로 어떻게 아이들을 강을 건너게 하겠는가.
그런데도 깨어 있으려 하지 않는다. 깨어 있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 행동과 반응을 살피고 인식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자신을 응시하고 자신과 맞대결하는 치열함을 말하는데, 이 같은 치열함이 없다. 그러니 갈수록 지성은 빈약해진다. 깨어 있음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자신과 타인, 사물과 세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도 말이다.
그는 자신이 지배와 강요 속에 자랐기에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되길 강요한다. 그러나 불안은 평화의 반대다. 무언가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자유와 평화를 가르칠 수 없다. 내부가 단련되지 않아 허약한데 어떻게 그 빛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무언가를 움켜쥐려 할 때, 저의(底意)를 가지고 사람을 대할 때, 그의 영혼은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불안한 자신을 은폐하기 위해 때로 사랑을 부르짖지만, 그것은 위선이며, 그것이 위선임을 아이들이 먼저 안다.
그리고 가장 문화적이어야 할 그들이 문화적이지 못하다. 교사가 가장 문화적이어야 할 이유는 그들이 아이들 앞에 서기 때문이다. 문화는 토요일 오후 꽃꽂이 강습회에 나가는 그런 일이 아니라, 하루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삶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나무는 큰 나무 밑에서 자랄 수 없지만, 사람은 큰 사람 밑에서 자란다지 않던가?
자기 부정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는 물고기일 뿐이다. 우리들의 슬픔은 그곳에 있다. 보고해 달라는 공문을 두 시간 전에 받았을 때, 엎드려 있는 아이 앞에서,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녀석이 교과 보충에 학원에 과외까지 다닐 때, 도통 말이 없는 아이의 풀어진 눈동자 앞에서, 지난 밤 술 취한 아버지에게 얻어맞아 눈자위가 퍼렇게 멍든 아이 앞에서, 그리고 또 이혼할 때 원수가 되어 헤어져 엄마 얼굴을 7년 째 보지 못한 아이 앞에서, 우리는 진정 슬픈 것이다. 정치가들이 툭하면 국민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하듯이 학생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관료들 앞에서 우리는 맥이 빠지고 슬픈 것이다. 스스로의 게으름과 안일함, 그리고 그것들이 묵인하여 만들어낸 교육현실의 가시덤불 속에 우리들의 슬픔은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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