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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승의 삶을 마감했다. 벌써 두 해 전의 일이다. 한국문학을 말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토지'의 작가 박경리. 1969년에 시작해서 1994년 완간할 때까지 600여명의 등장인물과 함께 25년을 집필한 작품 '토지'는 한국문학의 기념비이다. 박경리 선생 2주기를 맞으며 '책독책서'에서는 '토지'를 준비했다. '토지'는 여러 출판사의 판본을 거쳐 지금은 나남문학사판의 정본과 동화와 청소년용으로 재구성한 판본까지 다양한 형태가 있다. 동화나 청소년용이 자칫 정본의 무게와 가치를 배반할 위험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워낙에 방대한 분량인 까닭에 선뜻 정본에 손을 못대고 있다면 동화나 청소년용부터 시작해도 좋겠다. 물론 정본의 가치와 무게는 여전하다. <교육희망>
1994년은 내가 대학 4학년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아마도 그때 박경리 선생이 대하소설 '토지'를 끝냈다는 뉴스를 보았나 보다. 그때부터 나는 '토지'를 읽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을 느끼며 지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를 이 글을 쓰면서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았다. 국어교육을 전공했으나 전공 공부가 재미없었던 나는 졸업을 앞두고 조금 불안했나 보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대하소설' 읽기는 삼국지, 아리랑, 임꺽정, 태백산맥으로 이어졌다.
'토지'는 그렇게 읽었던 대하소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1999년 한국일보에서 작가와 문학평론가 100인에게 조사한 '21세기에 남을 한국의 고전'에 소설 부문 1위가 '토지'였다는 사실은 그래서 반가웠다.
전공공부를 소홀히 한 것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한 읽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토지'에는 주요인물 104명을 포함하여 600여 명의 인물이 나온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 그 인물들이 내 주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작품 전체의 주인공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 중에 용이와 월선이의 사랑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어려서부터 사랑하는 사이었던 용이와 월선이는 무당의 딸인 월선이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용이 부모님의 뜻으로 맺어지지 못한다.
용이는 작가가 애정을 갖고 창조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배운 것이 많지 않은 그저 잘 생기고 일 잘하는 농군이다. 하지만 용이는 염치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다. 작가가 생각하는 인간의 조건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용이와 월선이는 평생 정식으로 부부가 되지는 못한다. 용이와 월선이는 각각 부모의 뜻으로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월선이는 혼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이 낳은 용이의 아들을 자기 자식처럼 사랑으로 돌본다.
용이의 아들을 낳은 임이네는 반면에 욕망의 덩어리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자식이나 남편도 자기 자신을 위한 욕망 앞에서는 다 필요 없는 존재이다. 이 인물이 얼마나 재미있고 생동감 있는지 1987년 토지를 드라마로 만들었을 때 임이네 역할을 했던 탤런트 박원숙 씨는 연기대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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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경리가 정의한 문학은 이렇다. '문학은 삶 자체, 알 수 없는 생명이 삶이라는 현장에 나타났다가 알 수 없는 삶이라는 과정을 겪으며 사라지는 바로 그 과정에 대한 탐구이다.' '토지'는 15년 전 나에게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를 한 단계 높여주었던 작품이다.
'토지'에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일제 식민해방의 날까지 거의 100여년의 한국 역사와 130여 개의 국내외 역사가 등장한다. 그 어려운 시기는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역사이었으며 그 시기를 그렇게 어렵게 하는 것은 몰염치한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 어떤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자던 대통령은 1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났다. 나는 그에게 투표한 적이 없고 그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람이지만 그의 죽음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 뜻을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할 줄 아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혹시 힘드신가? 그렇다면 '토지'를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본다. 수난의 시대를 살다간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긴 호흡으로 쉽게 좌절하지 않고 살아가야 함을 배울 수 있다. 권력의 시간이 이제 반환점을 돌고 있다. 너무 많이 남았다고? 괜찮다. '토지'의 장점은 매우 길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