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희망

新 독립군' 10만 희망릴레이'

'조선여자근로정신대'를 아시나요?


해방 66년, 마르지 않는 눈물

내평생 큰 길로 한번 다니지 못하고…

"한번은 남편이 밖에서 들어오더니 '너 일본에 갔다 왔다면서 가서 몇 명이나 상대했냐?' 하고 잡는거에요. '더러운 년'이라고…. 내 평생 마음먹고 큰길로 한번 다니지 못하고 고삿질로 고삿질로만 숨어서…. 내가 그렇게 큰 죄를 지었습니까?"

김성주 할머니(83·경기도 안양시·전남 순천 출신)


일제강점기 해방 전인 1944년 5월 당시 전남 순천남초 6학년이었던 김성주 할머니는 "중학교에 진학시켜주겠다"는 일본인 담임선생님의 말만 믿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담임선생님 말은 거짓이었다. 김 할머니가 간 곳은 중학교가 아닌 나고야에 있는 군수공장인 미쓰비시 중공업이었다. 13살 꽃다운 나이에 김 할머니는 하루 10시간이 넘는 강제 노동에 시달리면서 손가락이 잘리고 다리를 다쳤다.
 
그렇게 지낸 1년 3개월. 1945년 8월 해방을 맞아 고향인 전남 순천으로 돌아왔지만 일본에 갔다 왔다는 이유만으로 위안부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1947년 결혼을 했지만 정신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안 남편이 때렸다. "너 일본에 갔다 왔다면서? 가서 몇 명이나 상대했냐?"면서.
 
김성주 할머니는 "평생 마음먹고 큰길로 한 번 다니지 못하고 고샅길로, 고샅길로만 숨어서…. 내가 그렇게 큰 죄를 졌냐?"고 말했다.
 
김 할머니처럼 1944년~45년 사이 13~15세 나이에 일본으로 강제 동원돼 미쓰비시중공업과 아사이토누마즈, 후지코시 등의 공장에서 일한 한국 여성들만 1700여 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미쓰비시중공업에 동원됐던 8명이 지난 1999년 3월1일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를 상대로 나고야 지방재판소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지난 2008년 11월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에 해당)에서 '기각'했다. 사실상 패소한 것이다.

 
그런데 근로정신대 문제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던 이명박 정부가 미쓰비시 중공업을 지난 2009년 1년 아리랑 3호 위성 발사업체로 선정하면서 다시 싸움이 시작됐다.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일본의 양심적 시민단체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 지원회 등이 1인 시위를 하는 등 꾸준히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 정부가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게 '후생연금'탈퇴 수당으로 99엔, 우리 돈으로 1300원을 지급하면서 분노가 폭발했다.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미불 임금은 당시 액면가만 2억3000만 엔, 최소 4조원이 넘는 돈이었다. 이 돈은 현재 일본은행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도 아이스크림 한 개 값만 내놓은 것이다.
 
6개월만인 2010년 6월 13만5000여 명이 항의 서명을 했다. 이 가운데 60~70%가 초·중·고 학생들이었다. 그러자 그 해 7월 미쓰비시는 "근로정신대 문제와 관련한 대화 테이블을 마련하는 데 동의한다"고 발표하는 데 이른다.
 
"분노만으로 역사는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민들의 힘을 믿습니다." 지난 달 14일 광주인권운동센터와 전교조 광주지부 등 광주지역 30여개 단체로 꾸려진 '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한 10만 희망릴레이 운동본부'가 결성 소식을 알리면서 호소한 것은 이 때문이다.
 
다음 달 2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릴 후생연금 탈퇴수당금 99엔 지급 건에 대해 불복해 제기한 '재심사청구'공개심리 등을 대응하면서 다시 한 번 시민들의 힘을 모으고 있다. 이번에도 광주 숭일중, 나주고 등 학생들이 이미 희망릴레이를 함께 하고 있다.
 
이국언 시민모임 사무국장은 "정부가 외면한 이번 문제를 시민들과 한일 시민단체의 끈질긴 연대 투쟁으로 협상 뜻을 끌어냈다"며 "후지코시 등 다른 기업들과의 문제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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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 독립군 , 조선여자근로정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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