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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뉴스 26호-기고] 형제복지원은 끝나지 않았다

[기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9월 23일, 국회 앞에서 『내무부훈령에 의한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등의 진상 및 국가책임 규명 등에 관한 법률(안)』의 조속한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있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한국판 아우슈비츠라고 불리는 부산의 형제복지원 사건은 복지라는 이름으로 국가적 폭력이 용인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배경은 1975년 내무부훈령 410호가 만들어지면서 부터이다. 당시 육군 상사였던 박인근 원장은 거리의 부랑인을 수용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이후 수용시설을 확장하며 복지사업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전두환은 대규모의 국제행사인 86서울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81년 총리에게 보낸 서신에서 부랑인에 대한 실태파악을 요구하였다.

‘총리 귀하, 별첨 정보보고서와 같이 근간 신체장애자 구걸 행각이 늘어나고 있는바 실태 파악을 하여 관계 부처 협조 하에 일절 단속 보호 조치하고 대책과 결과를 보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 전두환’

그는 이후 파악된 약 1만8천명에 대한 일제단속 및 보호조치를 하도록 지휘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강제수용 결과를 통해 사회복지시설 등에 보조금 지원을 결정하였고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 외 타시설 운영자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며 격려하는 등의 일들을 해왔다. 이렇게 정부와의 공모로 형제복지원에서만 12년 동안 513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공식적인 사망자 수)했으며, 그 안에서 일어난 온갖 인권유린의 상황들은 수많은 억울한 사람들을 양산했고, 이들이 경험한 끔찍한 사건들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이 사건은 86년 우연히 형제복지원을 목격한 울산지검 한 검사에 의해 인지수사에 착수하게 되었으며, 87년 원생 1명이 탈출을 시도하다 걸려 폭행으로 사망한 사건에 분노한 35명의 원생이 집단 탈출하면서 사회적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87년 당시 3700명 정도의 수용된 원생들, 12년간 2만여 명이 넘는 수용인들이 겪었을, 공권력과 복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추악한 민낯이 세상에 알려졌음에도 원장 박인근은 횡령으로만 2년 6개월을 선고받았을 뿐이었다.

27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형제복지원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억울하게 잡혀가서 갇혀 지내고, 폭행 속에 살다가 죽어간 이들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진상규명이 밝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난하거나, 장애를 가졌거나, 여성이나 아동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차별한 폭행, 감금, 상해, 강간, 협박, 사망 등이 복지시설에서, 국가의 묵인 하에 일어났지만 누구하나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진상규명을 통해 국가가 책임지고, 아직도 고통 속에 놓여있는 피해생존자에 대한 지원과 다시는 형제복지원과 같은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방편을 만들도록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려내며, ‘형제복지원 특별법’을 제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자회견 당시, 당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최승우씨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저는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가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꿈이 많은 학생이었는데… 국가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버렸고, 내 인생을 전부 바꿔버렸습니다.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0929 국민법정 사진
끝나지 않는 악몽을 고발하다
이후 9월 29일(월)에는 <“끝나지 않는 악몽을 고발합니다” 형제복지원 국민법정>이 건국대 법학관 모의법정에서 열렸다. 이번에 진행된 국민법정은 87년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던 점으로 인해 공소시효를 없애고, 이미 판결된 사건에 대해 다시 공소제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도 없애서 당시 법정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내용들을 제대로 묻고자 준비된 것이다. 이 자리에 참여한 배심원과 재판을 지켜보는 참석자들의 표정은 비장했다.

형제복지원 국민재판은 공소장에서 전두환과 박인근을 기소했다. 피고 전두환은 대통령으로 복지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명목을 앞세워 경찰, 부산시, 형제복지원 등과 함께 부랑인 등의 수용을 진두지휘하였다. 이후 공권력(경찰과 부산시)을 동원해 피해자들을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단속하고 속여서 형제복지원으로 인계하도록 하였으며, 복지원에 매년 20억원을 지원하며 박인근을 추켜세웠다. 피고 박인근은 복지원 원장으로 이렇게 인계된 피해자들을 형제복지원에 강제 수용하여 군대처럼 상명하복 수직구조를 만들어 수용인이 다른 수용인을 감시, 관리하는 체계로 운영하면서 그 안에서 수많은 인권유린의 범죄를 저질러왔다. 이렇듯 공적, 사회적 지위를 이용한 전두환과 박인근은 형제복지원 안에서 불법감금, 살인 및 사체은닉, 폭력, 강제노역 및 급여착복, 성폭력, 치료자 방치, 미취학아동약취유인 등 심각한 범죄를 주도한 자들이었음을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검사에게 공소사실을 확인한 이후,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전부 자신의 경험과 목격한 내용들이었다. 통금시간에 역사 안에 머물러 있다가 파출소에 가게 되어, 거리를 돌아다니던 중에 트럭에 실려서, 어린 남매가 부친에 의해 파출소에 잠시 맡겨졌다가, 거리에서 혼자 놀고 있다가, 구걸을 하다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복지원으로 끌려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어 공포 그 자체였던 폭력과 두려움, 죽음이 일상이었던 복지원에서의 삶을 증언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듣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경험했을 끔찍한 일들이 눈앞에 보이는 듯 해서 가슴이 먹먹했다. 공소사실과 증언을 들었던 전두환, 박인근(대역들)은 잘못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에 재판을 숨죽이고 지켜보던 참석자들이 연신 한숨을 쉬고, 울먹거리거나 화를 내기도 했다.

형제복지원 사건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내무부훈령 제410호’에 근거한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지침 처리’에 의해서였다. 당시 훈령에서 규정한 ‘일정한 주거가 없이 관광업소, 접객업소, 역, 버스정류소등 많은 사람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질서를 저해하는 모든 부랑인을 말한다’라고 하는 제2절 부랑인의 정의는 상당히 애매했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전두환의 말 한마디가 그토록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가난한 사람들을 복지라고 부르지만 지옥 같았던 대형시설에 수년간 가둬놓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 살아가게 한 것이다. 다행히도 죽지 않고 살아있게 된 생존자들은 잊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경험의 잔상 속에서 3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힘들어 하고 있었다.

약 3시간에 걸친 재판 끝에 전두환에게는 22년 6개월, 박인근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모의재판은 끝이 났고, 판결에 대해서는 속 시원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이들의 잘못을 들추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왜냐하면 40년 전에 규정된 부랑인의 정의는 2014년을 살아가는 지금도 여전히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복지라는 미명 하에, 혹은 공권력을 이용하여 홈리스를, 장애인을, 힘없는 사람들을 대하는 비인간적인 일들이, 또 그러한 시설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국가가 책임지고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규명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과 사회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동의 또한 바꿔가야 할 과제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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