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참사로 세상이 온통 뒤숭숭하다. ‘테러가 잘못’ 이라는 사람부터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는 사람까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한국사회도 이라크 문제와 관련하여 어지럽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3천명 규모의 한국군을 이라크 아르빌에 파견한 상태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얽힌 이해관계가 먼저인지 자이툰 부대나 한국민의 안전이 우선인지 쉽게 가늠하지 못한 채 테러참사가 우리를 비켜가길 바랄 뿐이다. 그럼 우리는 행운만 기다리며 진실을 찾는 수고를 포기해야 할 것인가.
눈을 국내로 돌려보자. 얼마 전 행정자치부가 발표한 ‘토지소유 현황’ 통계를 두고 논란이 많다.
'상위 1% 땅부자의 사유지 절반 소유'와 ‘상위 5%의 땅 부자가 전국토의 82.7% 소유’ ‘전체인구의 28.7%만이 토지 보유’ 라는 통계가 나오자,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은 즉각 정부에 강력한 토지공개념 제도 시행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에 대한 조선일보의 해석(7.20사설)은 많은 차이가 난다. 그 중 한 부분을 보자.
“어처구니없는 것은 정부가 한 뼘의 자기 땅도 갖고 있지 않다고 선동하듯 내세운 70%의 국민에 갓 태어난 갓난아이들까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가 토지 소유통계를 가구별로 내지 않고 개인별로 낸 탓이다. 토지와 주택의 소유 지분이 대부분 가장 한 사람의 명의로 돼 있어, 통계도 가구 단위로 집계하는 것이 원칙이고 상식이다. 그걸 무시한 정부의 이번 토지 통계는, 부모와 함께 사는 미성년 자녀에 대해 자기 명의의 집이 없다는 이유로 무주택자라고 하는 것과 같은 거짓이자 악의적 선동이다.”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의 시각과 조선일보의 관점 중 어느 편이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보수 내지는 수구집단의 대표적 언론사인 조선일보의 주장보다는 열린우리당과 진보적이라는 민노당의 생각이 더 정확하지 않겠냐고. 관념적으로는 옳을 듯한 말이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오류를 비판하려면, 변화무쌍한 정치적 판단에 기대기보다는 이번 조사에서 ‘개인별’ 통계가 합당한지 아니면 ‘가구별’ 통계가 적합한지 사회과학적으로 규명할 필요가 있다. 그럴 경우, 가장(家長) 명의의 부동산 소유가 일반화되어 있는 우리네 현실에서 조선일보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는 빈부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는 현실과는 다른 차원의 얘기임은 물론이다.
예가 좀 길어졌지만, 중층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사회문제를 단순히 선악 구도만을 가지고 '단칼에 무 자르듯' 일거에 해결한다는 것은 무모한 생각이다. 복잡한 문제라면 어차피 푸는 방식 또한 다양한 고려사항을 염두에 두고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풀어나갈 수밖에 없는 게 부득이한 현실이다.
그러나 성미가 급한 정치인들은 이를 기다리지 않는다. 오직 ‘우리는 너희들과 다르다’ 라는 식으로 상대적으로 도덕성이 우월하다고 강조하며 정치적 선전공간을 확보하는데 모든 역량을 투입하고 다음 선거를 기다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리숙해보이는 민중들의 촉각 또한 이를 예민하게 감지하여 다음을 준비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지난해 성매매 특별법이 시행되자 이에 대해 사람들은 ‘대한민국 성인 남녀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9.23 테러’ 라고 명명했다. 테러가 일반적으로 개인이나 단체에 의해 발생되는데 비해, 9.23은 주체가 공권력(국가)이었다는 점에서 크게 달랐다. 특히 권력에 진입한 여성계 일각에 의해 주도되면서, 성특법 이슈는 ‘성매매피해여성 vs 남성성욕+업주’ 등식으로 몰아갔다.
이 선악구도 방식은 처음에는 유효했으나 곧 한계를 드러냈다. ‘성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의해 ‘성노동자 vs 여성 권력계’ 의 등식으로 바뀌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노동자+진보적 여성주의자+진보적 시민사회단체 vs 여성 권력계+봉건적 그룹’ 등식으로 전환되었다.
성특법 시행 10개월도 안돼 그림이 완전히 뒤바뀌고 있는 것이다. 서울여성영화제 및 세계여성학대회, 세계여성행진에서 한국의 여성주의 구도가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목격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제 여성 권력계에게 성특법은 부메랑이 되어 그들에게 되돌아 가고 있는 중이다.
세상의 삶이란 착한 자들과 악한 자들이 벌이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그럼에도, 특히 복잡다기한 성담론(性談論)과 관련하여 ‘진실’ 과 ‘거짓’ 사이에서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중세기적 마녀사냥 냄새 풀풀나는 ‘악녀 VS 성녀’ 의 게임규칙을 강요당해야 하는가.
진실을 찾아 떠나는 여정(旅程)은 당연히 힘들고 피곤하다. 그러나 거짓에 의해 민심이 요동칠 때 성노동자들은 분연히 일어나 생존권 투쟁에서 노동권과 인권 투쟁으로 외연을 확대해 나갔고, 우리 사회 곳곳에서 진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친구들과 정겹게 굳은 악수로 감격을 나누는 중이다. 그리고 친구들은 이제 '노동자'와 ‘동지’란 이름으로 성노동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노동자란 말이 익숙해질수록 성노동자들은 자선과 시혜의 대상에서 당당한 주체로 바뀐다. 보기만 해도 정말 상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뜨거운 태양아래 '진실'이 아름답게 빛나는 7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