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성적 성매매 현장은 성노동자들에게 안전 사각지대
한겨레신문 필진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 중 정희진씨(서강대 강사)가 있다. 여성주의자로서 ‘성매매’에 단호하게 부정적인 입장에 서있는 그의 글은, 이미 우리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음성적 성매매의 창궐로 인해 혼란스럽긴 해도, 아직도 여전히 성매매 특별법의 끈을 놓기가 싫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합리화의 근거로 곧잘 애용되곤 한다.
정희진은 지난 7월 17일 ‘성노동권 유감’ 이란 제하의 글에서 6. 29 ‘성노동자의 날’ 행사에서 성노동자 대표가 발언한 “성 구매 남성도 여건이 열악하기에 우리를 찾는 빈곤한 사람들”과 “구매자 처벌 반대”를 문제 삼았다.
그는 여기서 “가장 낮은 계급의 남성(빈곤한 사람들 *필자 주)이라 할지라도, 성 판매 여성에 대해서만큼은 ‘지배자’가 될 수” 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섹스(*성거래)를 통한 주체(*지배자 현상)는 “피지배 계급 남성을, 자신도 지배 계급 남성과 같다는 남성 연대라는 ‘허위의식’의 포로로 만든다” 고 해석했다.
정희진이 ‘성거래 현장상황’에 대해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상당히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가 말하는 “성 판매 여성에 대해서만큼은 ‘지배자’가 될 수”있다는 가설은 과연 어느정도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우리는 진실을 찾기 위해 ‘사실’에 먼저 접근할 필요가 있다.
예전(성매매 특별법 시행 이전)의 필자는 정희진의 이런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다 성 관련 사건사고들을 보도에서 접할 때마다, 여성이 ‘성거래’ 현장에서 남성들에게 매우 취약한 상태(금전적 대가로 인해 일방적으로 당할 수 있는)에 처할 것이라는 우려를 당연시 했다. 특히 유영철 사건과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이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필자는 이 의문을 풀기위해, 성노동자들 입장에선 결코 말하기 쉽지 않은 ‘성거래 현장상황’에 관해 그들에게 집요하게 물어 보았다. 물론 이 질문의 대상은 현재 성노동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집창촌 성노동자들이다.
“남성들이 돈을 낸 이상, 당신의 몸을 당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함부로(가학적으로) 다루지는 않습니까?“ ”심리적으로 당신은 남성에 의해 일방적으로 억압당하지 않나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남성들이 집창촌에서 성노동자와 만날 때는 자신이 호감이 가는 사람을 선택하게 되죠. 그런 호의적인 감정이 일어나지 않으면 남녀관계가 불가능하잖아요. 다른 곳은 몰라도 집창촌에서 손님과 성노동자들과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인 분위기가 일반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진상’(사고)이 가끔 있긴 하지만 그럴 때는 환불해서 손님을 빨리 돌려보내요. 법도 그렇고.. 해서 시끄러우면 골치 아프잖아요.”
성노동자들의 상세한 답변은 필자의 생각을 합리적으로 정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다. ‘성거래 현장’이 어디인가에 따라 성노동자인 여성들이 처하는 위험수위는 달라진다. 모르는 남성과 제3의 낯선 밀폐된 공간에서 여성이 1: 1 상황에 처하면, 일단 완력이 강한 남성이 물리적으로 우월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해당 여성의 안전은 그 남성이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가 여부에 전적으로 맡겨질 수밖에 없다.
유영철 사건처럼 자신의 집에서의 성거래나 음성적 성매매의 한 유형인 ‘여관바리’(모텔 등에서의 성거래)등이 좋은 예다.
반면에 집창촌은 말 그대로 성거래 공간이 모여 있는 곳이다. 찾아오는 남성들은 나란히 붙어있는 공간과 공간들. 그리고 다수의 주변 성노동자들이 주는 위압감(?)으로 인해 엉뚱한 생각을 할 수가 없어 성노동자들에게는 자연스레 ‘안전’이 확보된다. 성관계 목적 외 다른 생각을 한다면 그런 남자는 애초 집창촌을 찾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말이다.
성노동인지 성매매인지 섣부른 가치판단은 일단 유보하더라도, 현상만큼은 분명하게 별도로 파악되어져야 한다. 이는 성노동이 좋은 노동인지 나쁜 노동인지에 관한 관념적 논란을 떠나, 성거래가 이루어지는 현장 상황에 따라서는 당장 성노동자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희진이 “(*남성이) 성 판매 여성에 대해서만큼은 ‘지배자’가 될 수”있다는 가설은 현장 별 상황을 분석하지 않은 매우 짧은 생각으로 일반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은 글이다.
비단 유영철과 같은 엽기적인 초대형 살인사건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성거래 여성들을 둘러싼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책임하게 관념적인 정희진의 글은 생존의 벼랑에 내몰린 여성들에게 오명과 낙인에 기여할 뿐 그녀들 ‘안전’에는 무관심한 결과를 초래하니, 정작 여성들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셈이다.
진정 그녀들을 돕고 싶은가. 그렇다면, 성노동자들의 ‘안전’에 최우선의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필자는 정희진에게 먼저 현장에 가서 성노동자들을 만나길 권한다. 살아있는 글은 결코 책상머리에서 나오지 않는 까닭이다. 이 글은 집창촌 홍보가 아니라 그 세계를 확실하게 알아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취지로 쓰여졌다. 정희진의 여성주의가 인본주의와 만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곳에 성노동자들이 살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