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호에게 보내는 쓴소리

'원죄'를 씻는 길은 '혁신'뿐

민주노총 신임 집행부에 드리는 쓴소리

민주노총은 지난달 10일과 21일, 대의원대회를 잇따라 열어서 그동안의 비상대책위원회 임시체제를 정리하고 새 임원들을 선출했다. 산고(産苦)를 겪고 탄생한 새 집행부이므로 축하와 격려를 보내는 것이 마땅한 ‘예의’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민주노총의 주인이 되어야할 80만 조합원의 처지에 서서 이들에게 ‘직언’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민주노동운동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쓴소리지만 듣고 소화해주기 바란다.


▲ 이수갑 철도노조 명예조합원.
ⓒ 매일노동뉴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는 세계 각국에서 ‘약탈’해 온 귀한 문화재들이 많다. 프랑스 국가는 이것들을 수백 년 동안 제 품에 지녀왔으므로 ‘당연히 우리 것’이라 여길지 모르겠으나, 그들이 어떤 논리를 들이대든 이를 빼앗긴 나라들에게서 ‘반환 쟁론’을 피할 수 없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백인들이여, 우리 땅에서 나가다오!’하고 다툴 힘이 조금도 없다. 그렇더라도 백인들이 짓쳐 들어와 인디언을 몰아낸 역사적 사실 자체가 지워질 수는 없다.

민주노총 새 집행부의 선출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당신들, 잘못 뽑혔으니 물러나 달라!”고 아무도 소리치지 않는다 하여 이 사실이 그들이 ‘정당하고 적법하게’ 선출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대다수의 무관심 속에서 그저 그렇게 막연히 간주될 뿐, 누구라도 정색하여 따지는 순간, 곧바로 ‘탄생의 비밀’이 드러난다. 나는 이를 정색하고 따지겠다. 새 집행부가 미워서가 아니라, 앞으로라도 민주노총이 발본 혁신되기 위하여.

나는 한평생을 이름없이 살아왔다.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서야 내 젊은 시절의 운동 실천을 인정받아 ‘철도노조 명예조합원’이라는 자랑스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내게 이 이름은 태산만큼 무겁다. 나는 몇년을 더 살지 모르겠지만 이 짧은 기간이나마 앞으로 내 모든 땀과 슬기를 ‘노조민주화투쟁’에 바칠 생각이다. 내가 가까스로 얻어낸 이 소중한 이름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이 글은 그런 바람의 표현이다.

운동적 정당성을 찾을 수 없다

지난 두번의 대의원대회는 민주운동의 면이든, 적법성의 면에서든 아무런 ‘정당성’을 얻지 못했다. 지난 비상대책위원회가 어떻게 하여 생겨났는가? ‘강승규 비리’로 전 집행부가 사퇴하여 구성된 것이므로 땅바닥으로 추락한 민주노총의 사회적 위신을 회복하도록 발본의 내부 혁신을 단행했어야 옳았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런 혁신의 노력도 없이, 심지어 애써 만든 ‘규율위원회’를 개점휴업 상태로 방치하고 제 임무를 마치려 했다. 누구도 분명하게 권력을 쥐고 있지 못한 비대위 국면이야말로 조직혁신을 단행하기에 알맞은 절호의 기회인데도!

비대위가 보궐선거 일정을 발표한 2월에 무엇이 예고되어 있었는가? 국회에 비정규악법 상정이 예고돼 있었다. 이미 알고 있듯이 여당은 안건 상정을 세차례 꾀했다가 반발에 부딪치자 물러섰다. 이렇게 정권과 첨예하게 맞부딪칠 것을 뻔히 짐작하고서도 서둘러 선거일정을 배치한 사람들의 정치적 속셈을 우리는 당연히 의심하게 된다.

일부 동지들이 “선거를 중단하고 투쟁에 나서자!”고 주장했는데 민주노총 주류세력의 반응이 걸작이었다. "동지들! 정치인들이 안건 상정을 늦췄습니다! 무사히 선거를 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겨우 ‘상정 보류’만을 얻어놓고서 ‘이제는 투쟁하지 않아도 된다’니, 이런 진정성 없는 투쟁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지금 비정규 개악안은 환노위를 통과해 국회 본회의 처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36, 37차 대대를 통해 탄생한 새 집행부에게 어떠한 운동적 정당성도 부여할 수 없다.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강승규 비리’를 척결할 진정성이 있었더라면 적어도 ‘고스란히 자본의 지휘를 받는’ 어용 KT노조 문제만큼은 청산했으리라.

그런데 조준호 후보는 거리낌없이 그들을 두둔했다. 이번 선거에서 새 집행부는 어용 KT대의원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더라면 (박빙의) 당선이 불가능했고, 그러니 그들의 사업 향배에서 KT노조가 캐스팅 보트를 쥐는 지경으로까지 흘러갈 수밖에. 새 집행부는 ‘비리의 청산’은커녕 ‘어용의 비호세력’으로 나선 셈이니 어떻게 이들에게 진솔한 마음으로 축하를 보낼 수 있겠는가.

적법성 시비를 피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조준호 집행부는 적법하지 못한 대대를 통해 당선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당선 무효소송’을 내지는 않겠지만, “당신들의 권력 취득은 불법 부당하다!”고 분명히 못 박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들이 낙선했더라면 서슬 퍼렇게 법원으로 달려가지 않았을까?

10일의 대대는 성원자격 시비로 말다툼을 벌이다가 안건 토의는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났다. 그날 위법성이 지적된 사항들이 그날도, 다음의 21일날도 거의 해결되지 못했다. 선거 20일전까지 대의원 명단을 확정해야 한다는 규약을 위반하는 사례 투성이요(36차와 37차 대대 사이에도 무려 90명의 대의원이 바뀌었다), 당연히 대의원은 하부 조직에서 ‘선출’하여 올리는 것이 마땅한데도 연맹 지도부들이 멋대로 ‘지명’하여 올린 사례가 한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대의원 당사자도 모르게 상부에서 멋대로 명단을 변경하는 일까지. 당신들은 10일 대대에서 터져나온 양심적 대의원들의 ‘분노’의 소리를 벌써 잊었는가.

불법성, 무법성은 끝이 없다. 10일날 선거하기로 공고되었고, 그날 선거를 치르지 못했다면 ‘재공고’를 내는 것이 법리의 상식이다. 그 뒤의 중집에서는 “21일 대회가 규약 위반이 분명하지만 대대에서 결정된 것이므로 강행하자”고 확인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모든 것을 다수결로 밀어붙이고, ‘규약 위반’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풍토가 척결되지 않고서 민주노총의 미래를 말할 수는 없다.

직선제를 들여오라

조준호 집행부가 탄생의 ‘원죄’를 씻는 길은 비대위 체제에서 ‘나 몰라라’ 했던 조직혁신의 과제를 진정성 있게 끌어안는 길뿐이다. “취지는 좋으나, 당장은 어렵다”고 미뤄버리는 얄팍한 태도로는 도토리 한알만큼도 혁신을 이뤄낼 수 없다.

‘위원장/임원 직선’이 집행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80만 조합원이 민주노총에 참여할 길이 없고 그래서 아무 관심도 보내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몇몇 연맹 과두관료들이 전횡을 일삼는다는 사실만큼 엄청난 문제는 없다. 몇달의 준비기간을 두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곧 한다!”고 단언하느냐 여부가 문제다.

‘임원 직선’보다 더 중요한 것이 ‘대의원 직선’이요, 운동의 대의에 맞게 대의원의 ‘대표성’을 깊이 배려하는 일이다. 중소영세사업장과 비정규직 등에게 대표성을 ‘할증’할 때, 조직의 활력은 단시일 내에 높아진다. 대의원 직선은 하의(下意) 상달의 정통 경로일 뿐아니라 ‘정파구도 타파’의 지름길이기도 하다.

조준호 집행부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조직혁신의 민의를 외면할 때, 남은 열달 동안 당신들의 ‘정당성/적법성 결여’를 씻을 다른 길은 없다.

이수갑 철도노조 명예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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